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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29화 (129/273)

129화

아직 미성년자인 요하와 주선아는 식사를 마친 후 일찍 돌아갔다.

남은 멤버들끼리 가볍게 술을 하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 이제 더 마시면 집에 기어들어 갈 거 같아요. 그만 마셔야지.”

탁, 술잔을 내리치듯 테이블에 올려놓은 임하나의 선언이었다.

이미 취기가 올라 살짝 발음이 꼬여서 말하는 걸 보고 서지현은 임하나 앞에 있는 술잔을 멀찍이 치웠다.

그 모습을 본 임하나는 술에 안 취했다고 주장하듯이 눈을 부릅떴다.

“안 마신다니까?”

“언니 아까부터 안 마신다면서 계속 마셨잖아요. 술도 약하면서.”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하는 서지현.

임하나는 한동안 그런 서지현을 노려보듯이 보다가 서지현 쪽으로 기울어졌다.

“지현이~ 지금 언니 걱정해주는 거야? 아이고 이뿌다.”

서지현 볼을 꼬집으며 말하는 임하나는 이미 취객이었다.

서지현은 취한 임하나를 떼어내 소파에 기대게 하며 찬물을 건넸다.

“언니, 언니. 이거 물 좀 마셔봐요.”

서지현 말을 듣고는 물을 마신 임하나는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지만 몸이 이리저리 기울어지고 있었다.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겠다는 듯 일행들이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하나씨 오랜만에 긴장 풀려서 그런가 조금 취한 것 같네요.”

“그동안 계속 달려오기만 했으니까 하루쯤은 내려놔도 되지 싶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조은별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둘을 바라봤다.

딱히 말릴 생각이 없는 듯한 성현의 말에 서지현은 대번에 서운하다는 듯 이쪽을 쳐다봤다.

“성현씨, 저번에 저한텐 가수는 목 관리가 생명이라고 소주에 닭발도 못 먹게 했으면서. 서운해요.”

서운함이 담뿍 묻어나는 서지현 말에 성현은 조금 미안한 듯 웃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서자명이 술잔을 비우며 성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훅 치고 들어오는 서자명의 진지한 톤에 다들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임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서자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서자명씨도 취했나보다.”

“쉿, 하나 언니. 쉿.”

놀란 서지현이 임하나의 손을 잡아 내렸다.

뜬금없는 서자명의 말에 성현은 그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 시선에 서자명은 술기운을 빌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표현했다.

“공연장 구해준 것도 고맙고, 이렇게 좋은 팀원들 만나게 해준 것도 고맙고, 멋진 음악 할 수 있게 해준 것도 고맙고. 그냥 다 고마워요.”

듣고 있던 멤버들 모두 일순 숙연해졌다.

천소울 못지않게 평소 감정 표현이 적은 서자명이었기에.

성현 또한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서자명의 진심을 느낄 수 있어서 거기다 대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일행들은 각자의 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진짜 시간 빠르다. 오아시스 바에서 공연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맞아요.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조은별의 말에 서지현 역시 생각에 잠겨서 아련하게 말했다.

“재밌긴 뭐가 재밌어. 너 쓰레기 맞았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지현씨가 쓰레기를 맞았어요?”

임하나는 지금도 생각하면 분한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오히려 그 말에 깜짝 놀란 릴리가 묻자, 묻자 조은별과 임하나, 서지현 모두 추억에 잠겨 함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지난 일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때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릴리.

“말하면서 느낀 건데 지금보다 그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 관객들한테 야유받고 뽕짝이나 부르라고 욕먹었어도 그땐 다 함께였잖아요.”

조금 씁쓸한 듯 웃으며 말하는 임하나 때문에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다들 그때가 떠올랐는지 얼굴에 아쉬움과 슬픔, 허탈함이 한가득이었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는 다 털어낸 듯 환해진 멤버들이었는데.

테이블이 조용해지자 성현의 일행들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까지 믿고 따라와 줬는데 끝까지 함께 가지도 못하고......’

자신을 믿어준 동료들에게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날로 커지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성현은 말없이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때, 누군가 성현의 잔을 가로챘다.

“이제 그만 마시지.”

모건 사건 이후 술을 입에 안 대고 있던 천소울이었다.

성현이 조금 과음을 하는 것 같자 술잔을 가져간 것.

그런 그에게서 다시 술잔을 뺏은 성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서 그래요. 미안해서.”

살짝 술에 취해 두서없이 말하는 성현.

천소울, 그 또한 성현이 지금 어떤 감정일지 알 수 있었기에 그런 성현을 가만 지켜볼 뿐이었다.

***

새벽 2시가 조금 넘어서야 릴리의 생일 파티가 마무리됐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놀던 멤버들도 각자 집으로 향했다.

멤버들은 아쉬운 마음에 쉽사리 헤어지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며 뜸을 들였다.

“전 하나 언니랑 먼저 가볼게요.”

서지현이 조금 취한 임하나를 데리고 먼저 택시에 올라탔다.

그걸 기점으로 천소울은 조금 걸어야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주영준씨 저랑 같은 방향이랬죠? 같이 가실래요?”

“그럽시다. 릴리도 같은 방향이니까 셋이 같이 가시죠.”

“성현씨 집이 어디예요? 택시 불러드릴게요.”

그렇게 성현을 제외한 셋이 함께 택시를 잡으며 성현에게 물었다.

살짝 취한 것 같은 성현이 걱정되는 마음에 물은 릴리였다.

그 말에도 성현은 괜찮다며 손을 휘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다들.”

남은 멤버들을 배웅하고 나서야 택시를 부른 성현은 위태롭게 도로 가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의 말에 성현은 집 주소를 불러주었다.

곧장 출발하는 택시 안에서 성현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보통 때와 같으면 다음 날 컨디션을 생각해서 집으로 향했을 성현이었다.

그런데 오늘 따라 한 잔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차피 이대로 집에 가봤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디로 갈지 고민에 빠져 있던 성현은 이내 한 곳이 생각이 나고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저 지금 가도 돼요?”

성현의 물음에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말이 들려왔다.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은 성현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저기, 죄송한데 목적지를 바꿀 수 있을까요?”

***

집에 가려던 성현이 택시를 돌려 도착한 곳은 오아시스 라이브 바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라이브바 내부엔 손님은 2팀뿐이었고,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분위기였다.

낯선 분위기에 두리번 거리며 성현이 들어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왔어?”

주방에 있던 심훈영이 성현이 온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심훈영은 이미 조금 취한 듯한 성현을 보고 씨익 웃으며 물었다.

“안주로 계란말이 했는데 괜찮지?”

“없어서 못 먹죠.”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는 성현.

심훈영은 성현을 손님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로 안내했다.

지인들이 가게를 찾았을 때, 조용히 이야기하기에 좋은 자리였다.

“술은 뭘로 할래?”

“가볍게 마실 만한 거 뭐 없을까요.”

“가볍게 마실 만한 거라......이번에 선물 받은 와인 있는데 와인 괜찮아?”

“와인 좋죠.”

성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테이블에 미리 준비한 안주와 와인을 세팅하느라 부산한 심훈영을 잠시 구경하는 성현.

심훈영은 마지막으로 와인잔을 두 개 가져오며 은근하게 말을 꺼냈다.

“마PD인가 그 사람 때문에 떨어질 뻔했다며.”

“어떻게 아셨어요?”

성현은 자신의 근황을 꿰고 있는 심훈영이 놀라워서 물었다.

“어떻게 알긴. 너튜브 영상이랑 뉴스 기사 맨날 확인하니까 알지.”

“보고 계셨어요?”

이어지는 심훈영의 말은 놀라웠다.

한낱 프로듀서 지망생인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작곡가 선배가 있다는 것이 괜히 낯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멋쩍은지 자신의 뒷목을 매만지는 성현을 지켜보던 심훈영이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럼. 네 가수 네가 지킨다는 약속 잘 지키는지 지켜본다 했잖아.”

“…….”

농담을 던지며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주는 심훈영의 말에 성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물장사를 한 지도 벌써 십수년.

손님의 표정을 한 번 훑으면 모르는 게 없는 오아시스 바의 마스터, 심훈영이었다.

성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곧바로 묻는 심훈영의 말에 성현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 약속을 잘 못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요.”

“뭐 힘든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그냥요.....”

성현이 걱정되는 마음에 되묻는 심훈영의 말에도 성현은 말끝을 흐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심훈영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말없이 성현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는 데 누군가 자신을 찾았다.

“사장님 여기 계산이요.”

“저희도 계산이요.”

라이브 바에 있던 손님 2팀이 연속으로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떴다.

넓디넓은 라이브 바에는 성현과 심훈영만 덩그러니 남았다.

성현은 기껏 따라준 술도 먹지 않고,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었다.

심훈영은 성현의 축 처진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노래 들을래?”

“좋죠.”

역시나.

노래라는 말에 바로 반응한 성현을 보고 심훈영은 웃음이 터졌다.

저걸 누가 말려.

심훈영은 성현의 대답에 자신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큰 박스로 곧장 향했다.

그 안에 가득 쌓인 LP판을 뒤적이던 그는 이내 한 장을 꺼내 턴테이블에 얹었다.

지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용한 라이브 바에 오래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잔잔한 기타 소리와 하모니카 연주에 한껏 몸이 나른해진 성현은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했다.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생각을 했을까요.”

옛날 노래가 가지고 있는 시 같은 가사에 심취한 성현.

심훈영 또한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했다.

텅 빈 라이브 바를 구슬픈 가사와 선율이 가득 채웠다.

마치 거기에 맞추듯이 꽤나 취한 성현이 흔들거리며 음악에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주고받진 않았지만, 종종 아는 노래가 나오면 낮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거 알어?”

“당연히 알죠. 와 이걸 LP판으로 가지고 계세요?”

그렇게 몇 곡이나 들었을까, 성현과 심훈영의 테이블에 있는 와인병이 비었다.

심훈영은 다음 노래를 틀기 위해 박스 안 LP판을 살피던 중, 오래된 녹음기를 발견했다.

반짝 눈을 빛낸 심훈영이 신나서 몸을 폈다.

“내가 깜짝 놀랄만한 노래 들려줄까?”

그 말에도 성현은 이제 완전히 술에 취해서 고개만 끄덕였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성현을 보며 혀를 끌끌 찬 심훈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선물 받은 노랜데 들으면 술이 확 깰걸.”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녹음기를 스피커에 연결한 심훈영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성현을 한번 돌아보았다.

심훈영이 녹음기를 재생하자 지지직거리는 음성과 함께 남자 둘의 대화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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