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생각지 못한 성현의 연락을 받은 일행들은 카페에 앉아 있는 성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성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반겼다.
하루 만에 봤으면서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다시금 드는 생각은 역시 이들을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것.
그들 모두 떨어진 마당에 성현에게서 연락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서로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저녁 늦게 연락이 와서 갑작스럽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어제 정신이 없어서 축하한단 말도 못 하고 갔더라구요. 합격 축하드려요.”
조은별은 어제와 달리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그렇게 말했지만, 어젯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어제 그러고 떠나버린 것이 부끄러운 듯, 조은별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저도요. 진짜 축하해요, 성현씨.”
목소리만큼은 씩씩한 서지현도 웃으며 말했다.
조은별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서지현, 릴리, 주영준 할 것 없이 모두의 눈이 부어있었다.
의연한 모습을 하고 떠난 그들도 속은 많이 상했을 것이 분명했다.
“릴리씨는 괜찮다 하더니 많이 속상했나 봐요.”
서지현은 항상 완벽한 모습을 보이던 릴리의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부어있자, 놀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물었다.
새삼 부은 눈이 부끄러운지 눈덩이를 매만지던 릴리가 조용히 말했다.
“…침대에 자려고 누워서 알람을 맞추려는데 생각해보니 연습실 갈 필요가 없더라구요. 진짜 그 순간에 나 떨어졌구나 실감 나서 눈물 펑펑 흘렸어요.”
릴리의 말에 주영준 역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실이라는 말에 넷이 도로 침울해지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을 꺼내나 고심하는데, 카페 직원이 성현이 미리 주문해 둔 음료를 가져왔다.
“키위주스 어떤 분이세요?”
“이쪽이요.”
직원의 물음에 성현은 대번에 서지현 쪽을 가리키고 서지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성현이 아직 이런 사소한 점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제가 기억한다고 했잖아요. 마끼아또는 이쪽으로 주세요.”
마끼아또는 조은별 앞으로 가져다주고 이내 다른 음료들도 차례로 멤버들에게 전달해줬다.
“저 커피 안 마시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프로듀서면 그 정돈 알아야죠.”
이정도는 기본이라는 듯 웃으며 말하자 릴리는 생각지도 못한 성현의 행동에 감동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현씨 알면 알수록 사람이 참 좋네요. 잘 마실게요.”
성현이 주문한 음료를 마시며 인사를 건네는 주영준은 카페에 들어설 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다른 멤버들 모두 음료로 입을 축이는데 성현은 혼자 음료를 마시지 않고 한동안 멤버들을 진지하게 보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다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요?”
성현의 물음에 멤버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주영준은 놀랐는지 사레에 들려 콜록거리기까지 했으니 이들의 당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서바이벌 오디션에 떨어진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
당장 슬픔에 잠겨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볼 겨를은 없었다.
“앞으로 가수나 프로듀서 길을 계속 가실 건지 아니면 너튜브를 계속 이어갈 건지 궁금해서요.”
성현의 물음에 다들 입을 꾹 다문 채로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한 건 릴리였다.
“너튜브는 계속할 건데 소속사를 바꿀 생각이에요. 음악적으로 더 승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MCN 쪽에서 순순히 보내준대요? 릴리씨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데요?”
“다음 달이면 끝나요. 원래도 소속사 옮길 생각에 재계약 거절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군요.”
릴리의 말에 성현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다른 멤버들 또한 한 명 두 명 차례대로 자신들의 계획을 말해줬다.
“전 원래 있던 소속사에서 다시 작업같이 하자 그래서 조만간 복귀할 거 같아요.”
“전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데… 아마 어디서든 작업하고 있겠죠?”
그렇게 다들 자신들의 계획을 말하는 도중에도 잠잠하게 있던 서지현은 모두의 말이 끝나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사실 탑뮤직에서 계약서를 보내왔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처음 듣는 서지현의 말에 커피를 마시던 조은별이 놀라 커피를 뿜었다.
탑뮤직이면 메이저 소속사는 아니더라도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을 배출해낸 나름 이 바닥에선 잔뼈가 있는 소속사로 유명했다.
“타, 탑뮤직? 계약 조건은?”
“조건도 괜찮아요.”
“근데 뭘 고민해! 당장 하겠다고 해야지.”
아이돌 관련 업계에 빠삭한 조은별이 흥분해서 하는 말에, 서지현은 조금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가만히 있다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게…… 다른 곳에서도 제안이 들어와서요.”
엔터들이 이번 ‘더 넥스트 슈퍼스타’에 스폰서로 참여한 만큼 서지현의 탈락 소식도 빨리 퍼졌다.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본 다수의 소속사에서 먼저 계약 제의를 해온 것.
이 사실을 들은 조은별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이름 대봐. 어디 어디서 제안 왔어?”
자신이 더 흥분한 듯한 조은별 말에 서지현은 제안이 들어온 소속사의 이름을 말해줬고, 함께 있던 멤버들 모두 너무 잘 됐다며 축하를 건넸다.
서지현의 설명을 자세하게 들은 조은별은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건은 다 괜찮네. 잘 고민해봐. 소속사에서 얼마나 널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인지 널 위해서 어떤 구체적인 플랜을 가지고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고.”
조은별은 기쁜 마음이 앞섬에도 서지현이 걱정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성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가 따로 있어요.”
그 말에 일행들 모두 일제히 성현을 쳐다봤다.
모두가 저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
“여기까지가 제가 가지고 있는 플랜입니다.”
성현이 자신의 얘길 끝내자 멤버들 모두 놀라 벙찐 표정을 짓고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가 성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탓.
멤버들이 너무 대놓고 당황한 티를 내자 성현은 빠르게 덧붙였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말씀드리는 거니까 너무 부담 느끼실 필요 없어요. 어디까지나 선택은 여러분 몫이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성현의 말에 여전히 다들 뭐라고 반응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성현은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보고 먼저 말을 꺼냈다.
빨리 화제를 돌려야 했다.
“릴리씨 어제 더 넥스트 슈퍼스타 서울 지역 본선 리뷰 영상 올리신 거 봤어요.”
“아, 맞아요! 리뷰 영상 올릴 생각을 다 하셨어요.”
성현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조은별 또한 맞장구치며 말했다.
릴리의 채널에 올라온 후기 영상은 하루도 되지 않아 100만 조회수가 훌쩍 넘어서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 영상은 릴리가 공개된 ‘더 넥스트 슈퍼스타’ 서울 지역 영상을 함께 보면서 자신의 생생한 후기를 올리는 것으로 인기 동영상까지 올랐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오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편집하다 보니 자연히 홍대팀에 대한 코멘트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도 봤어요! 저희 얘기 완전 많이 했던데요? 영상 보면서 완전 감동했어요.”
“저도 영상 찍으면서 다시 보니까 괜히 울컥하더라고요. 울음 터지면 저 탈락한 거 스포될까봐 몇 번이나 정지하고 다시 진정되면 보고 그랬다니까요?”
서지현의 말에 릴리가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생생한 릴리의 말에 나머지 멤버들도 다들 그 영상을 봤다며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성현은 이렇게 다시 탈락한 멤버들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다.
한참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임하나와의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시계를 확인한 성현이 다급하게 멤버들을 둘러봤다.
“제가 뒤에 연습 약속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봐야겠네요.”
성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멤버들도 어정쩡하게 따라 일어나려 했다.
“얘기 마저 나누세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멤버들 과의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나가려는데 조은별이 그를 불렀다.
“성현씨는 포기하지 말고 꼭 성현씨만의 길을 걸으세요. 응원할게요.”
두 주먹까지 쥐고 응원하는 조은별 말에 성현은 웃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서지현과 릴리, 주영준까지 한마디씩 건넸다.
“오디션 우승해서 꼭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듀서 되셔야 해요.”
“계획만큼 멋진 결과 얻으셨으면 좋겠어요. 파이팅!”
“제안하신 내용은 심사숙고 해보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또 봬요.”
따듯한 멤버들의 말에 성현은 코끝이 찡해져서 얼른 가게를 벗어나기로 했다.
“다들 고맙습니다. 그럼 저 진짜 가볼게요.”
자신을 응원하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던 성현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오디션에서 좋은 결과를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듀서라.’
멤버들이 말한 저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
카페에서 나온 성현은 곧장 임하나를 만나러 향했다.
임하나는 작업실에서 나오는 줄 알았던 성현이 작업실 방향과 반대 방향에서 오자 조금 의아해서 물었다.
“작업실에서 오는 거 아니었어요?”
“네.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미팅이요?”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본선 4라운드가 이제 시작한 참인데 성현의 미팅이란 말에 임하나의 표정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성현은 그 모습을 보고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택시를 잡아탔다.
“안경은 왜 썼어요?”
성현은 옆에 탄 임하나가 평소엔 쓰지도 않던 안경을 쓰고 있자 궁금해서 물었다.
그 말에 임하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부끄럽다는 듯 대답했다.
“눈 부어서요.”
임하나 말에 안경 너머 임하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녀의 부은 눈을 본 성현은 그녀 또한 탈락한 팀원들 때문에 울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짧은 물음에 임하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성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냥 말해주는 게 나으려나.’
임하나를 만나기 전 카페에서 멤버들을 만났던 얘길 해줘야 하나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장 무대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인데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방금 전 카페에서 그들과 만난 이야기를 하려면 왜 만났는지도 이야기해야 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일단 임하나는 지금 눈앞에 닥친 오디션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 말이다.
자신의 계획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말해도 충분하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성현이 합격한 멤버들에겐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자마자 택시가 청담동에 있는 한 건물 앞에 멈추고 둘은 택시에서 내렸다.
“여기가 저스트미 선배님 작업실인 거죠?”
화려한 외관의 건물에 감탄하며 묻는 임하나의 말에 성현 또한 저스트미의 작업실 외관을 올려다봤다.
저스트미의 명성을 증명하듯 그의 작업실은 이 근방에 있는 어떤 건물보다 멋들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관이 이렇게 좋은데 안에 있는 장비들은 더 좋겠지.’
하지만 성현에겐 연습실 외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현의 관심사는 오로지 저스트미가 가지고 있을 값비싼 장비들과 미발표곡들.
그 모든 게 저 안에 숨겨져 있다는 생각에 더는 기다릴 수 없어진 성현이 임하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어갈까요.”
저스트미와 작업할 생각에 설레하며 들어가려는데 임하나가 성현을 붙잡았다.
“깜빡했다. 잠시만요!”
성현을 두고 건물 맞은편 편의점으로 달려간 임하나는 곧 검은 봉다리를 들고 나타났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봉다리.
그걸 본 성현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메로나요.”
임하나는 싱긋 웃어 보이며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먼저 작업실 벽에 설치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저스트미가 문을 열고 나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일찍 왔네요. 들어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