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106화 (106/273)

106화

자신만만한 성현이 내민 자료를 본 김인호 AD는 잠시 기다려달라며 노트북을 꺼냈다.

성현의 말대로 직접 자료들을 비교해본 김인호는 결국 이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최 측이 가지고 있는 자료와 이성현이 가지고 온 자료가 일치한 것이다.

이는 결국 성현이 가져온 조작에 대한 설명문도 사실이라는 소리였다.

좌절감이 밀려들어와 고개를 푹 숙인 김인호에게 성현이 찬찬히 설명을 덧붙였다.

“20대 표수는 1111표 차이. 30대 표수가 1112표 차이. 계속 똑같은 패턴의 표 차이가 나고 있어요.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다시 계산을 해봐도 성현의 말처럼 일정한 투표수 차이가 나는 것이 확실했다.

심지어 이러한 패턴이 계속 반복됐다.

어떤 이가 개입했다는 정황 증거가 너무나도 명백했다.

결국 김인호 AD는 자료를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 완전 난리 나겠는데.”

당장 앞으로 이 사건을 처리할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하필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대규모 서바이벌에서 투표 조작 사건이 일어난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한국에서 끝나는 단발적인 오디션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데다 각 국가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쉽게 넘어가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한국에서 벌어진 일.

“이걸 어쩐다......”

김인호의 고민이 깊어졌다.

당장 증거를 잡은 것을 떠나 이 폭탄 같은 자료를 어떻게 공개할지 막막했다.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디서부터는 발뺌을 해야 할지 계산하느라 김인호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게다가 지금 이 자료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방송국 내부인사가 아니라 오디션 참가자였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성현이 먼저 김인호에게 해결책 아닌 해결책을 내놓았다.

“제가 나서서 언론에 공개할 생각은 없습니다.”

성현의 말에 김인호 표정에 순간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이것이 언론에 공개될 경우, 더 넥스트 슈퍼스타 서바이벌에 큰 오점이 밝혀지는 꼴이 된다.

이 먹음직스러운 멋잇감을 언론들이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이 뻔했다.

성현의 말은 이 수치스럽고 번잡스러운 과정을 겪지 않게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대신 주최 측 내부에서 이 사안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성현의 말뜻은 분명했다.

조작이 확실해졌으니 언론에 발표하지 않는 대신 본선 3라운드 결과에 대해 재고해달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김인호 입장에서도 다행이었다.

그 또한 이번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었으니까.

“우리 인연을 조금 더 이어갈 수 있겠네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인호는 바로 성현이 준 자료를 집어 들며 말했다.

거래 성립.

성현은 만족스럽게 웃었고 김인호는 서둘러서 자료와 짐을 챙겼다.

“연락드리겠습니다.”

***

김인호 AD는 자료를 가지고 곧장 누군가를 찾아갔다.

‘더 넥스트 슈퍼스타’를 담당하는 메인 PD 중 한 명인 한동균 PD였다.

김인호에게서 자료를 건네받은 한동균 PD는 김인호를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자료였다.

“출처가 어디야?”

“이성현 참가자 측에서 입수한 정보고 내부 결정이 날 때까진 언론에 밝힐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이성현? 아, 그 싹수 있는 놈.”

김인호 말에 한동균 곧장 성현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주시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참가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필 참가자한테 이 자료가 넘어가다니….

골치 아프게 되었다.

한동균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거 단순한 종이 쪼가리 아닌 거 알지?”

“네.”

“책임질 자신 있어?”

“네. 긴급회의 소집해 주십쇼.”

김인호에게서 확답을 들은 한동균 PD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한국 지사 회의실에 메인PD들과 고위 간부들이 모였고 그들 모두 김인호가 가지고 온 자료를 확인했다.

자료를 확인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어디선가 시한폭탄이 날아온 셈이었다.

자료를 다 확인하고 회의실이 침묵에 잠기자 한동균 PD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사실 확인은 이미 끝났습니다. 홍대와 신촌 팀 투표 결과는 조작됐습니다.”

한동균 PD의 말에 혀 차는 소리와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홍대와 신촌 팀 경연이라면 주도자는 뻔했다.

그쪽 지역 총괄 PD를 맡은 마영진, 그놈이었다.

“그 인간 원래 찝찝하긴 했어. 소속사 대표들한테 접대받는다는 소문도 많았고.”

한 PD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평소 마PD 행실에 대한 말들이 많이 오갔는데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그렇지 전 세계적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까지 더러운 수작을 할 줄은 몰랐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에 다들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참 동안 조용하던 회의실에 한 PD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묻읍시다. 이거 밝혀지면 의혹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미 자료까지 나온 마당에 그게 가능하다고 봅니까? 괜히 숨기려 했다가 파장만 더 커질 수 있어요.”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이대로 묻자는 의견과 더 큰 논란을 일으키기 전에 차라리 먼저 밝히자는 의견.

“자료를 준 게 홍대 측 참가자인 만큼 이대로 묻는 건 불가능합니다. 밝히는 건 이미 정해진 절차고 어떤 방식으로 밝힌 건지를 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동균PD의 말에 다른 PD들 모두 쉽사리 의견을 내지 못했다.

상황이 나빴다.

일반 네티즌이 들고일어난 게 아니라 하필이면 피해를 입은 당사자 측에 자료가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묻는다면 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섣부르게 입을 열지 못했다.

워낙 중대한 사안인 만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견 말해도 될까요?”

그리고 그때 조용히 있던 김인호 AD가 손을 들고 물었다.

한동균이 말해도 된다는 사인을 보내자 김인호는 거침없이 의견을 냈다.

“이미 다수의 커뮤니티에서 조작과 관련된 분석 글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선택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러다 네티즌들이 먼저 이 사실을 밝히게 될 경우 우리 쪽에서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거고, 그렇게 되면 오디션 프로그램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으니까요.”

김인호 말에 PD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조작 사실이 밝혀진 이상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선택이라면 어떤 선택을 말하는 거죠? 어떻게 언론에 공개할지를 정하자는 겁니까?”

그리고 이를 듣고 있던 PD가 김인호에게 묻자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뗐다.

“아뇨, 마영진 PD님을 품고 갈 건지 말 건지에 대한 선택이요.”

김인호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이렇게 된 이상 마PD의 향후 거취 문제를 피할 수만은 없었다.

다른 이들한테서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 전에 방송국에서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전 버리고 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대중들한테 자료 공개하고 마영진PD님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만이 이번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김인호의 말에 한동균도 재빨리 말을 보탰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마PD와 아예 선을 긋고 스탠스를 정확히 취할 필요가 있어요. 최악의 경우 검찰 조사까지 받게 될 텐데 깔끔하게 손을 터는 것이 훗날을 위해서도 최선이라고 봅니다.”

한동균 PD의 말에 남은 PD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우리끼리 자체 조사한다고 털릴 인간도 아니고 이렇게 된 거 그냥 우리 쪽에서 먼저 고발해버리죠. 그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리고 마침내 마PD를 검찰에 고발하는 쪽으로 의견은 좁혀졌다.

방송국에서는 마PD의 만행을 알지도 못했고, 전적으로 마PD의 개인행동이었으므로 검찰에 넘기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겠다는 선 긋기였다.

이 사실이 언론에 먼저 알려지기 전, 마PD를 먼저 조사받게 하고 한국 지사 측은 이번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생각이었다.

***

[ 마모 PD, 검찰 조사 3일 만에 오디션 조작에 대한 모든 혐의 인정. ]

[ 수사 과정에서 몇몇 소속사에게 접대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 ]

[ 주최 측 고위 관계자 : 투표 조작은 마모 PD가 독자적으로 한 짓. ]

[ ‘더 넥스트 슈퍼스타’ 주최 측, 투표 결과 모두 공개하기로 결정. ]

[ ‘더 넥스트 슈퍼스타’ 주최 측, 앞으로 있을 투표는 모두 공개하겠다 밝혀. ]

[ ‘더 넥스트 슈퍼스타’ 팬들, 조작이 벌어진 대결, 재대결 요구. ]

주최 측이 마PD를 고발한 이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더 넥스트 슈퍼스타’와 관련된 기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올라왔다.

기사가 발표되자 수많은 팬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홍대팀에게 응원메시지를 보내왔다.

릴리의 SNS에는 언니를 믿고 있었다는 많은 이들이 성지순례라며 릴리의 마지막 게시물에 댓글을 달았다.

탈락한 이후, 거의 모든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고 있던 성현은 틈이 나는 대로 기사들을 확인했다.

결국 마영진PD는 조사를 받은 지 3일 만에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자신 혼자 벌인 짓이라고 밝힌 마PD는 끝끝내 배후세력 같은 건 없다고 선을 그었다고 못 박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최 측에서 재발 방지를 위해 앞으로 있을 투표에서도 모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부터 ‘더 넥스트 슈퍼스타’ 팬들의 재대결을 요구한다는 기사까지 다양한 기사들이 올라왔다.

성현이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기사를 확인하던 성현은 이런 기사보다도 가장 기다리고 있는 소식이 하나 있었다.

언제쯤 연락이 올까 생각하고 있던 중, 때맞춰 휴대폰이 울렸다.

김인호 AD로부터의 전화.

기다리고 있던 전화가 오자 곧장 받았다.

여보세요, 를 채 하기도 전에 김인호가 들뜬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왔다.

“방금 회의 끝났는데 최종적으로 재경연 결정됐습니다.”

“안 그래도 경연 곡 작업하고 있었는데 잘됐네요.”

김인호 말에 성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신나서 기뻐하는 성현의 목소리를 기대했던 김인호는 놀라서 되물었다.

“재경연 결정될 거 알고 있었어요?”

“다른 서바이벌도 아니고 더 넥스트 슈퍼스타잖아요. 이렇게 대규모 서바이벌에서 투표 조작을 알고도 가만있진 않을 테니까요.”

김인호는 역시 보통은 아닌 놈이라고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성현을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이번에도 영 그른 듯했다.

“어렵게 다시 잡은 기회니까 최선을 다해봐요.”

“네. 본선 4라운드에서 뵙겠습니다.”

김인호에게 자신감을 내보인 성현은 전화를 끊고는 다시 곡 작업에 집중했다.

마지막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