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널 만난 이후로 내 일상에 사소한 변화들에 행복했고 너를 생각하며 눈 뜨는 하루가 내겐 썩 괜찮았어.”
천소울의 맑은 미성에 섞인 살짝 긁는듯한 탁성으로 시작한 곡은 덤덤하게 전개됐다.
그럼에도 무대 장치 하나 없이 오로지 음색으로만 가득 채운 무대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천소울의 강점은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성량과 가사 전달력이 좋다는 것에 있었다.
천소울과 연습을 시작하던 날.
천소울은 성현이 원곡보다 조금 더 리드미컬하게 편곡한 노래를 듣고는 바로 감을 잡았는지 녹음실로 들어갔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부르고 난 뒤,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
노래는 완벽했다.
고음 처리도 깔끔했고, 천소울의 발음은 정확해서 듣기 편했다.
성현의 편곡에 맞춰서 차분하게 절제할 곳은 절제하고 성량을 터뜨릴 곳은 터뜨리는 완급조절도 훌륭했다.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매력적인 음색까지 겸비한 천소울의 노래는 누가 들어도 최고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경연 무대에 서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성현은 방금 노래에서 부족한 점이 무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천소울은 성현이 말없이 생각에 잠긴 것 같자 조용히 녹음실에서 나와 스튜디오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자신 역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성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존 킴의 ‘네 생각’ 가사를 모두 프린트했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단순히 가사만 뽑은 것이었다.
가사를 두 부 프린트한 성현은 그중 한 부를 천소울에게 내밀었다.
천소울은 갑자기 성현이 건넨 종이를 받아들고 그게 가사라는 걸 알자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어떤 사람을 그리고 있는 거죠.”
“그 사람은 천소울씨에게 어떤 사람인데요?”
이어지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뭔가를 깨달았는지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고민하던 천소울은 가사를 곱씹으며 대답했다.
“…후회, 아니, 그리움의 대상?”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후회에서 왜 그리움으로 변했죠?”
“처음 부분만 보면 단순히 그리움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2절로 넘어가서 이 부분을 보면….”
두 사람은 밤새도록 노랫말에 대해 어떤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이 순간만큼은 멜로디라인도, 박자도, 음정도 필요 없었다.
오롯이 이 가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가사를 되씹고, 재해석하고,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천소울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새벽빛이 밝기까지 의견을 나눈 끝에 천소울의 노래를 완성해냈다.
***
“어쩔 수 없나 봐 하루 종일 바보처럼 네 생각이나. 그렇게 멍하니 또 하루가 흘러가”
그는 고음이 아닌 묵직한 중저음만으로 공연장을 채웠다.
차갑게 느껴지는 핀라이트 하나만이 천소울을 따라다니며 비추고 있었다.
여기에 정확한 가사 전달력까지 더해지면서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여기까지 들은 성현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진 객석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됐다. 성공했어.’
천소울은 완벽한 노래를 넘어서 모두를 울릴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성현은 천소울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이번 무대에서 잘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천소울은 노래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삶이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전달력을 키울 수 있도록 성현과 둘이서 가사를 해석하기는 했지만, 지금 천소울이 보여주고 있는 몰입력은 단순히 노력만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성현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객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이전 신나는 분위기의 무대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던 자신들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숨조차 쉬지 못하면서 천소울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N년차 인생 사신 듯. 무슨 저렇게 사람이 애절하냐.
-거짓말 안 하고 나 진짜 감수성 메말랐는데 노래 듣고 눈물 흘린 적 처음임.
-누구냐. 누가 천소울 울렸냐. 가만 안 둬.
-방송 보면서 이 정돈데 라이브로 들으면 얼마나 더 소름 돋을까.
-이건 그냥 게임 끝났네. 홍대 팀 승리.
너튜브 반응들 또한 앞선 릴리의 무대는 근소하게 홍대팀 반응이 앞섰던 것과 다르게 압도적으로 천소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어떤 무대를 가져와도 이번만큼 호소력 짙은 천소울의 무대보다 못할 거란 확신이 들 정도로 천소울은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마침내 천소울의 무대가 끝났을 때 멤버들 모두 간절하게 두 손을 모았다.
그들 모두 천소울이 이길 거란 걸 알았지만 이전 릴리의 무대처럼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소울씨 지면 진짜 들고 일어납시다.”
서자명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건 진짜 질 수가 없는 무대예요.”
“근데 아까도 질 수 없는 무대였는데 졌잖아요......”
임하나 말에 갑자기 분위기 조금 가라앉고 멤버들 모두 릴리의 눈치를 보며 말이 없어졌다.
“이번 무대 지면 정말 탈락인 건가요.....?”
“그렇지. 규칙은 규칙이니까......”
시무룩한 요하의 말에 임하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천소울마저 지게 된다면 자신은 준비했던 마지막 무대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홍대팀은 패배하게 된다.
멤버들은 모두 천소울이 압도적인 무대를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무대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성현은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마PD. 이번엔 당신도 어쩔 수 없겠지.’
투표 공개 전 성현은 마영진 PD라면 어떻게 나올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고 이내 그 예상은 적중했다.
“홍대와 신촌의 두 번째 대결, 그 결과가 공개됩니다!”
<두 번째 경연 결과>
홍대 측 공연자 : 10,932표
신촌 측 공연자 : 10,847표
근소한 차이로 홍대팀이 이겼다.
성현은 스크린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토록 압도적인 실력 차임에도 겨우 이기게 된 상황이 서글펐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굳이 논란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천소울은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참가자였다.
애초에 이번 무대에서 천소울이 지게 되면 릴리의 무대와는 다르게 엄청난 파장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마PD라면 최대한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당연히 이번 무대만큼은 천소울에게 승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무대를 노릴 생각이겠지.’
마 PD는 두 번째 무대에 천소울이 나올 경우를 대비해 일부러 신촌 측의 가장 잘하는 참가자를 마지막 무대에 배치했을 가능성이 컸다.
마PD는 베테랑인 만큼 아무 생각 없이 조작을 일삼는 PD가 아니었다.
천소울 정도가 아니라면 조작으로 이긴다 해도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판을 짰을 거다.
‘우리 팀에 천소울만 있는 게 아니란 걸 모르고 짠 거겠지만.’
이번만큼은 마PD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성현은 자신들의 히든 카드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
릴리의 패배, 천소울의 승리로 현재 경연 결과는 1대1.
최종 결과는 마지막 3라운드 무대로 결정된다.
“초박빙의 승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양 팀 모두 근소한 차이로 한 번씩 승리를 한 상황! 누가 본선 4라운드에 올라갈지는 마지막 무대까지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엠씨의 물음에 객석에 있는 시청자들이 홍대! 신촌!을 외쳐댔고 천소울의 압도적인 퍼포먼스 덕분에 너튜브로 실시간 영상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홍대 파이팅!
-천소울 팀 파이팅!
-신촌 주민이라 신촌 응원 하지만 마음은 자꾸 홍대를 향하네ㅠ
-신촌 가즈아!
-홍대가 이겨야지. 객관적으로 릴리 누나가 진 건 말이 안 됐음.
“너튜브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상당히 뜨겁네요. 그럼 이 기세를 몰아서 곧장 마지막 무대 시작하겠습니다!”
엠씨의 말에 객석에 있는 사람들 흥분해서 소릴 질렀고 백스테이지에서 마지막 무대를 기다리는 임하나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무대 하나로, 그동안 함께 해온 동료들이 전부 탈락할 수 있는 벼랑 끝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임하나의 마음을 아는 성현도 굳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다.
성현이 임하나를 마지막 무대에 세운 이유는, 그녀의 실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임하나씨는 승부사니까. 오히려 지금의 긴장감이 더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임하나는 성현에게 고음에 대한 지적을 받고 난 바로 다음 날 성현을 찾아갈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다.
거기다 압박감을 느낄수록 더욱 노력하는 스타일이었다.
“임하나 참가자 준비하세요.”
스탭의 말에 임하나는 긴장감을 떨치려는 듯이 한숨 크게 쉬며 이성현을 바라봤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임하나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채였다.
성현을 보며 미소 짓는 임하나의 모습에 성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긴장 안 돼요?”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임하나가 기특해서 묻자 임하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쩌겠어요. 이번엔 도망도 못 치는 자리인데.”
성현이 지난 번에 했던 멘트를 장난식으로 되돌려주는 임하나였다.
고음을 하지 못해 언제까지 도망칠 거냐고 질책했던 성현의 말을 이제 이런 식으로 장난삼아 내뱉을 정도로 임하나는 성장해 있었다.
그런 여유에 성현은 더욱 임하나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즐기고 와요. 온전히 임하나씨 무대니까.”
성현의 신뢰가 가득한 말에 임하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무대에 올랐다.
***
무대에 오른 임하나가 자리를 잡자 곧이어 엄청난 수의 조명이 임하나를 향했다.
자신을 비추는 조명에 살짝 미소를 지은 임하나는 한 차례 손발을 털더니 진행팀에게 준비가 됐다는 사인을 보냈다.
곧이어 무대에 성현이 편곡한 J.KIM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임하나는 특유의 끈적이는 목소리의 안정적인 보컬로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임하나의 독특한 음색을 듣고 모두 눈을 반짝이며 무대를 지켜봤다.
노래는 점점 리듬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임하나는 리듬감을 살리며 그루브 있게 살짝씩 몸을 흔들며 무대를 누볐다.
딱히 안무를 정했던 건 아니지만, 임하나는 노래에 녹아들며 즉석에서 몸을 흔들었다.
말 그대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어나가는 임하나는 경연 무대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워 보였다.
워낙 모든 춤을 잘 추고, 또 춤을 즐길 줄 아는 임하나의 안무에서 나오는 바이브는 노래가 지니고 있는 소울을 제대로 표현해냈다.
그리고 다가온 클라이맥스.
임하나가 중저음에서 갑자기 엄청난 성량의 고음을 내지르자 객석에선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임하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대를 향해 손을 쭉 뻗으며 더 높은 음을 찍었다.
고음을 깔끔하게 처리하면서도 노래가 주는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감각적인 표정과 제스처를 사용해가며 전달하는 임하나의 무대를 본 성현은 소름이 돋았다.
‘짧은 사이에 자기만의 무대를 만들어버리는구나.’
긴 시간도 아닌 단 몇 분 사이에 임하나는 무대를 온전히 자신의 노래를 채우고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역시 임하나였다.
모든 일행의 탈락 여부가 걸린 상황 속, 그 엄청난 책임감 속에서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발동해 잠재력을 완전히 터트린 것이다.
그야말로 ‘디바’의 모습, 그 자체였다.
순간, 임하나 위로 홀로그램이 반짝였다.
지난번 서지현의 [리더의 자질]이 발현했을 때와 같은 현상이다.
성현은 빠르게 임하나의 정보창을 확인했다.
[디바의 품격]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온 임하나의 디바의 씨앗이 디바의 품격으로 발현해있었다.
‘최고의 디바를 얻은 기분이야.’
그걸 확인한 순간 임하나의 무대가 끝났고 뜨거운 환호성이 스튜디오 홀을 완전히 매웠다.
앞선 어떤 무대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격렬한 반응이었다.
성현은 숨이 차는지 숨을 몰아쉬며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임하나를 보고 넘치는 고양감에 저도 모르게 환호를 내질렀다.
프로듀서로서,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