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어두운 무대 위 달빛이 비치듯 은은한 조명이 릴리를 비추고, 거대한 달 모형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는 살짝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새하얀 눈과 같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릴리는 무대 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다.
마치 달의 요정 같은 자태였다.
아직 노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관객들은 모두 그 모습을 보고 한숨과도 같은 탄성을 뱉어냈다.
내심 관객들은 저번 무대에서처럼 릴리가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고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릴리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45도 각도로 살짝 고개를 숙여 감정선을 잡고 있던 릴리는 이윽고 잔잔한 반주가 흘러나오자 읊조리듯 첫 소절을 뱉었다.
“바스락거리던 낙엽과 속삭이는 바람 그 안에 너와 나 시간이 멈춘 듯해.”
달빛 아래 쓸쓸한 분위기 속 릴리는 툭툭 내뱉는 듯 첫 소절을 시작했다.
아스러질 것처럼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노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히 릴리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객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숨을 죽이고 릴리의 노래를 감상했다.
릴리의 여리고 맑은 목소리가 쓸쓸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무대 뒤편 거대 스크린에는 릴리의 노래에 맞춰 환하고 다채로운 은하수가 펼쳐졌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고서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르는 릴리의 모습은 눈이 부셨다.
‘바로 이 모습이야.’
릴리의 무대를 지켜보던 성현은 계속해서 너튜브 반응을 확인했다.
평소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노래를 주로 부르던 릴리.
그랬던 그녀가 쓸쓸하고 아련한 분위기의 노래를 부르자 댓글창은 새로운 모습을 보고 난리가 났다.
-이런 컨셉도 괜찮다. 저번 무대도 그렇고 릴리 본인이 다양한 음악을 시도해보려는 것 같음.
-누가 우리 릴리 울렸냐. 가만 안 둬.
-비주얼 미쳤네. 이번 무대 비주얼도 역대급인 듯.
-묘하게 분위기가 성숙해진 느낌. 갠적으로 지금까지 무대 중 제일 좋은 듯.
-언니, 릴리 언니. 여신니뮤ㅠㅠ
마침내 릴리의 노래가 끝났을 때 객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어떤 사람은 릴리의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는지 눈물 자국을 그대로 달고서 있는 힘껏 박수를 치기도 했다.
릴리는 무사히 무대를 마치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으며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네, 두 무대 모두 잘 봤습니다. 그럼 바로 투표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투표가 시작되었다.
릴리의 앞 순서에 공연한 신촌팀 역시 준비 기간이 길었던 만큼 퀄리티 좋은 무대를 보여줬었다.
그들은 릴리의 곡과 정반대의 신나는 분위기의 곡이었고, 무대 내내 객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성현은 릴리의 순서가 뒤였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여겨졌다.
신촌팀의 무대가 뒤였다면 비교적 잔잔했던 릴리의 무대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둘 다 좋았는데 하나만 고르라면 릴리.
-아, 릴리 언니 무대 너무 좋다. 앞 무대 다 까먹었어.
-근데 이건 개취인 듯. 난 신나는 노래 좋아해서 신촌팀이 더 좋았음.
-아까 신촌 무대는 뭔가 신나긴 하는데 그냥 그게 끝. 또 듣고 싶단 생각은 안 들어.
두 무대 모두 너튜브 반응을 확인한 성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많은 댓글에서 릴리가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릴리에 대한 평가가 앞서고 있는 듯했다.
‘취향 때문에 갈릴 순 있지만, 확실히 릴리 무대가 더 좋았어.’
하지만 채팅창 반응은 어디까지 시청자들의 의견일 뿐이었다.
이번 대결엔 마PD가 개입된 만큼 투표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번 결과로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만약 이번에 릴리가 진다면 확실히 마PD의 장난질이 개입된 것이 확실해질 것이다.
“그럼 첫 번째 무대 투표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성현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며 스크린을 보는데 이내 투표 결과가 떴다.
< 첫 번째 경연 결과 >
신촌 측 1번 공연자 : 10,994표
홍대 측 1번 공연자 : 9,531표
“아......”
근소한 차이였지만 릴리의 패배였다.
성현은 이 결과를 보고 확신했다.
어디선가 마PD가 결과를 조작하고 있었다.
결과를 확인한 성현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곧장 릴리를 보는데 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투표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이어서 신촌 팀 리빙 레전드 대결 시작하겠습니다. 양 팀은 무대에서 내려가 주시길 바랍니다.”
엠씨의 말에 승리에 기뻐 펄쩍 뛰던 신촌팀 참가자들과 멍하니 서있던 릴리 모두 무대에서 내려왔다.
백스테이지로 내려온 릴리는 투표 결과에 적지 않게 당황했는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미안해요.”
성현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지만 릴리는 성현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릴리는 애써 표정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얼굴색이 많이 안 좋아져 있었다.
성현은 이번 일로 릴리가 다시 자신감을 잃을까 봐 얼른 릴리에게 더 말을 건넸다.
“저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요. 약속 지켰잖아요. 릴리씨가 정말 원하는 음악 하기로 한 거.”
성현의 말에도 릴리는 고장난 인형처럼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모습이 마치 애처로운 프랑스 인형처럼 가냘파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성현은 지금 이 상태의 릴리에게 무슨 말을 더 해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짜고짜 릴리에게 이 결과는 조작된 것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를 어쩐다….’
곧 대기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성현의 일행들까지 백스테이지로 달려와 릴리를 둘러싸고 위로하자 릴리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성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릴리를 지켜보다 혼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조작된 결과 때문에 릴리가 또 한 번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투표 결과 잘못된 거 아니죠? 신촌팀이 잘하긴 했어도 릴리 무대가 분명 더 반응도 좋았잖아요.”
조은별을 비롯한 프로듀서들은 결과를 믿을 수 없는 듯 분해했다.
가수 참가자들은 축 처져 있는 릴리를 위로하기 바빴다.
“지현씨, 하나씨, 제가 미안해요…. 조금 더 준비했어야 했는데.”
“미안해할 거 없어요.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예요.”
“그래요. 아직 완전히 진 것도 아니고 다음 무대 남았잖아요.”
일행들 모두 처음 겪는 패배에 당황했지만 애써 웃으며 당장 패닉에 빠진 릴리를 위로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성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실력만으로 평가받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릴리는 동료들의 계속해서 이어지는 따듯한 위로에 감정이 폭발했는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성현이 그런 릴리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가는데 내내 가만히 있던 천소울이 한발 빨랐다.
“울지 마요.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천소울은 릴리한테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뱉고는 무대 쪽으로 가버렸다.
울고 있던 릴리는 놀라서 어느새 눈물을 멈추고 천소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맞다! 우리한테 천소울씨 있었지. 세상 듬직하네.”
임하나는 가라앉은 팀의 분위기를 보고 일부러 목소리를 돋워서 말했다.
임하나 말에 울고 있던 릴리를 비롯한 성현의 동료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천소울의 실력이라면 두 번째 대결은 이긴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
“두 번째 무대에서도 신촌 팀이 이긴다면 세 번째 무대까지 가지 않고 신촌팀이 본선 4라운드 진출이 확정됩니다. 과연 홍대팀은 마지막 남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두 번째 무대 시작하겠습니다!”
엠씨의 말과 동시에 신촌팀 참가자들이 무대에 올랐고 곧 그들의 노래가 시작됐다.
이번에도 역시 대단한 실력을 갖춘 참가자들이었고 댄스곡을 선택한 그들은 격한 춤을 추면서도 흔들림 없이 노래를 이어갔다.
‘잘하네.’
백스테이지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성현마저 그들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참가자들인지 칼군무까지 완벽하게 해냈고 시선 처리 같은 디테일 부분도 완벽했다.
지금 당장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실력이었다.
조작질이 개입하더라도 큰 잡음은 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실력의 무대였다.
성현은 신촌팀의 무대를 보고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에 백스테이지에서 함께 무대를 지켜보는 천소울 쪽을 돌아봤다.
천소울은 그들의 공연을 보면서도 담담함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현은 이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천소울이 조금 신기해서 자세히 보니 손을 까딱이면서 자신이 준비한 노래를 낮게 연습하고 있었다.
‘온전히 자기 무대에만 집중하고 있구나.’
천소울은 자신이 경연에서 진다면 그대로 탈락하게 되는 상황임에도 큰 동요가 없었다.
머릿속에 오로지 자신의 무대만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집중력이었다.
이를 본 성현도 굳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대를 준비하도록 내버려뒀다.
신촌팀의 무대를 보고 순간적으로 걱정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지금 성현과 함께하는 가수는 그 누구에게도 질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신촌 팀의 무대가 끝이 났고 객석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홍대팀 준비해주세요! 지금 올라갑니다.”
인이어를 낀 스탭이 천소울에게 말을 전했다.
무전을 치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스탭은 무대 위에서 엠씨의 정리 멘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천소울은 가볍게 목을 돌리는 스트레칭을 하며 스탭을 따라갔다.
그 자신감 넘치는 덤덤한 뒷모습을 보고 있던 성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까지 최고의 무대 보여주세요.”
지금까지 한 마디도 없던 성현이 오늘 처음으로 천소울에게 딱 한 마디를 건넸다.
그 말에 천소울은 살짝 뒤돌아보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천소울의 당당한 대답에 성현은 든든함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있는 성현은 두고 천소울은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
***
천소울이 무대에 등장하자 엄청난 환호 소리가 스튜디오 홀 안을 가득 메웠다.
천소울은 자신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관객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으며 스탭이 준비해 놓은 의자와 스탠드 마이크 앞으로 향했다.
무대에 정 가운데에 선 천소울은 눈을 감더니 마음을 가다듬었다.
준비를 마치고 눈을 뜬 천소울이 진행 팀에게 준비됐다는 사인을 보내자 반주가 흘러나왔다.
존 킴의 네 생각이란 노래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곡이었다.
저번에 보여주었던 파워풀한 가창력과 빠른 템포의 곡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선곡이었다.
성현은 이번 무대를 이전 무대와 다르게 화려한 무대 연출과 퍼포먼스를 모두 제거했다.
곡에 맞춰서 천소울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 역시 저번 무대와는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대신 천소울이 가지고 있는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부각할 수 있도록 편곡했다.
천소울 또한 성현의 편곡 의도를 알아채고 평소보다 감정 전달과 보컬 테크닉에 집중해서 연습해왔다.
‘잘 부탁해요, 천소울씨.’
세 번째 무대까지 가기 위해선 천소울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신촌 팀을 이겨야 했다.
감히 조작질을 할 수 없게끔 천소울의 기량을 있는대로 끌어내 보여줘야만 했다.
성현은 간절한 마음으로 천소울의 무대를 지켜보고 천소울은 이내 마이크를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첫소절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