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본선 1라운드를 떠올렸다.
춤을 무시하는 정기준 선배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대결을 펼쳤다.
그땐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점차 높은 라운드에 올라갈수록 오히려 겁쟁이가 되었다.
더 많이 이기고 싶었고 팀원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만 보여주게 됐다.
안전한 길.
여러 번의 오디션 무대를 치르면서 임하나가 선택하게 된 길이었다.
“춤 하나로 무대를 꽉 채우던 그때 그 패기는 어디로 간 거죠? 아니면 하나씨가 자부심을 느끼는 건 오직 춤뿐인 건가요? 노래는 노력할 가치가 없는 부수적인 건가요? 무대 장치 마냥?”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노래가 단순히 무대 장치이냐는 말에 임하나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노래를 잘하면 잘하고 싶었지 단 한 번도 무대 장치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서지현과 성현의 도움에 노래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고음이 없어도 자신의 음색이 특별하다며 여러 곡을 소화하면서 계속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미뤄두고 있었다.
고음은 임하나에게 있어서 평생의 숙제 같은 존재였다.
잘하고 싶지만 언젠가는 잘하겠지 싶어서 계속 미루고 있는 숙제.
“하나씨가 고음을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으니까.”
성현의 질책 속에는 해보지도 않고 못하는 것으로 단언하고 있는 임하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들어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하나씨보다 더 노력하고 더 도전하는 다른 가수 지망생들한테 미안해하세요. 하나씨가 음색만 믿고 고음에서 도망가고 있을 때 아무것도 없는 누군가는 한 음이라도 더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었을 겁니다.”
틀린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에 임하나는 더 이상 성현을 볼 용기가 없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사흘 후 일요일에 마지막 오디션 볼게요. 그때 무대에 누가 오를지 다시 결정하겠습니다.”
성현은 그 말을 끝으로 연습실 나갔다.
성현이 나간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임하나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
한편, 연습실을 나온 성현은 긴장이 풀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성현의 성격상 이런 식의 도발은 익숙하지 않았다.
평소 임하나의 승부욕 넘치는 성격을 이용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지만,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성현은 저도 모르게 임하나가 남아 있는 연습실을 돌아봤다.
‘자극이 됐으면 좋겠는데.’
이번 계기로 임하나가 디바로서 재능을 꽃피우길 바랐다.
단순히 게임 캐릭터였던 임하나의 능력치가 궁금하다기보다 이제는 정말 가수 임하나의 성장을 지켜보고 싶었다.
프로듀서인 자신의 손으로 임하나의 디바의 씨앗을 발현시킬 계기가 무언가 더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 채로 작업실로 향했다.
복도에서 차 두 잔을 사들고 돌아오는 서지현과 마주쳤다.
“이거 따뜻한 차예요. 유자차!”
성현을 보자마자 변명하듯 외치는 서지현을 보고 피식 웃음이 터졌다.
임하나가 한 소리 듣는 걸 보고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이었다.
“들어가 봐요. 서지현씨 위로가 필요할 것 같으니까.”
성현은 서지현의 어깰 두들기며 지나쳐 갔다.
서지현은 성현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임하나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재빨리 연습실로 들어갔다.
연습실 한복판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미동 없는 임하나가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서지현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가 걱정돼 냉큼 달려가 물었다.
이렇게 축 처져 있는 임하나의 모습은 처음이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자 임하나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언니 울어요?!”
깜짝 놀란 서지현이 얼른 임하나의 얼굴을 보는데 그녀의 표정은 결코 슬픈 얼굴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주먹을 쥔 두 두 손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서지현은 어라? 싶은 마음에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고 봐. 고음 뚫고 말 거니까.”
분하다는 듯 혼잣말을 하는 임하나는 서지현이 뒷걸음질 칠 정도로 무서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임하나는 서지현이 쥐여준 따듯한 음료가 식을 때까지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
하루 뒤, 성현 스튜디오에서 곡 작업하고 있는데 임하나가 문을 벌컥 열더니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하나의 등장에 당황한 성현이 임하나를 부르려는 찰나, 임하나는 아무런 상황 설명도 없이 스튜디오 내 녹음실로 들어갔다.
성현은 당황했지만 일단 스튜디오 마이크 켜줬다.
임하나는 켜진 마이크를 확인하고 성현을 보며 말했다.
“존 킴. 너와 나의 순간 틀어주세요.”
너와 나의 순간.
임하나와 서지현이 함께 준비했던 듀엣곡으로 저번 연습 때 프로듀서들 앞에서 불렀던 곡이기도 했다.
‘설마.’
성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곡을 틀어줬다.
말없이 임하나를 지켜보는데 임하나는 긴장할 것도 없이 곧장 첫 소절을 불렀다.
“네가 없는 난 웃을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
서지현이 감미로운 미성으로 도입부로 시작했다면 임하나는 소울풀한 음색으로 애절함을 표현했다.
별다른 편곡이 없어도 이미 임하나의 목소리만으로 원곡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특색이 묻어나왔다.
“힘든 날 나를 지켜주던 너. 이젠 내가 널 지켜주고 싶어.”
임하나는 원래 가지고 있던 그루브한 음색으로 16마디를 불렀다.
여기까진 어제와 비슷했기에 놀라울 것이 없었다.
원래 임하나가 가지고 있던 스타일이었고 중저음이 주로 나오는 파트들이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성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임하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시작되는 주제 파트.
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며 임하나를 쳐다봤다.
여기서부턴 존 킴 특유의 가성이 돋보이는 고음부가 반복되며 나온다.
임하나의 가성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도 했다.
“고단했던 나의 삶에 한 줄기 희망이 되고 날 가슴 뛰게 해주던 너.”
임하나는 성현의 예상을 가볍게 뒤엎고 가성이 아니라 파워풀한 두성으로 고음 파트를 질러버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여유롭게 애드립까지 선보였다.
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고 임하나를 지켜봤고 임하나는 쉴새 없이 이어지는 고음파트를 너무나 파워풀하게 끝내버렸다.
‘무슨 수식어가 더 필요할까. 그냥 디바 그 자체야.’
임하나에게 디바로서 재능이 있단 걸 알았지만 막상 그녀가 이렇게 화끈하게 고음을 끌어올리자 두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물론 듀엣으로 편곡된 곡이다 보니 중간중간 호흡이 딸리거나 고음 파트에서 음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으나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임하나가 단 하루 만에 고음에 대한 두려움을 깨부수고 스스로의 한계를 넘었단 거였다.
‘역시 임하나씨는 승부사구나.’
확실히 임하나는 승부욕이 강한 참가자였고 승부사의 기질이 있었다.
하루 만에 이 정도 고음을 이끌어내고 자신에게 독설을 한 프로듀서를 제 발로 찾아가 긴장도 하지 않은 채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음은 임하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녀가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부분이었다.
“하!”
임하나의 노래가 끝이 났고 임하나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이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임하나와 성현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해 웃었다.
이 웃음 하나로 충분했다.
성현이 임하나의 고음을 인정했다는 것은.
임하나가 스스로 두려움을 깨고 나왔으니 이제 성현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차례였다.
성현은 녹음실과 연결된 마이크의 전원을 켰다.
“애초에 듀엣곡으로 편곡한 거라 호흡이 딸리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너무 고음에만 치우치다 보니 감정 전달이 되지 않는 건 문제예요.”
성현의 디렉팅을 진지한 표정으로 받아들인 임하나는 이것저것 발성을 해가며 성현에게 물었다.
그럴수록 성현은 더욱 열성적으로 그녀를 코치했다.
“소리는 감정에 따라 바뀌어요. 그래서 같은 노랠 부르더라도 부르는 사람이 어떤 감정을 부르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도 다르게 들을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같은 곡이라도 가수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전달되는 감정도 다르겠죠?”
“네.”
“하나씨는 이번 곡을 어떻게 해석했어요?”
“음. 힘든 순간을 함께했던 연인한테 자신의 고마움을 표현하면서도 앞으로 남은 생을 함께하자는 약속처럼 느껴졌어요.”
“그럼 거기에 맞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번 해볼게요. 하나씨가 누군가한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던 적이 언제예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성현은 임하나를 기다려주었다.
서지현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줬던 것처럼 성현은 임하나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임하나는 노래를 통해 전달해주고 싶은 감정 자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성현은 임하나의 이야기를 집중하며 들으면서 임하나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부른 노래와 아까 전의 고음만 신경 쓰면서 부른 노래 파일 두 개를 재생해주며 두 곡의 차이를 설명했다.
“여기 고음을 들어보면 아까보다 훨씬 듣기 편하죠. 그냥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니까.”
“진짜 그러네요.”
임하나는 두 노래의 차이에 주의해서 노래를 들으며 어느 부분에서 자신의 감정이 격해지는지 파악했다.
확실히 자신이 몰입해서 노래를 부르자 곡의 깊이가 한층 깊어져 있었다.
지금까지는 고음 부분을 신경 쓰면서 실수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앞서 있었는데 이렇게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닫자 고음 말고도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지막으로 제스처. 듣는 사람에게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선 가수의 감정선 못지않게 제스처 또한 중요해요. 아까 하나씨는 노래를 부를 땐 고음에만 신경 쓰느라 가만히 주먹을 쥐고 불렀잖아요.”
“제가 그랬나요?”
임하나는 자신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부분을 성현이 짚어주며 말하자 조금 놀라서 물었다.
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녹음실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여러 가지 제스처를 보여주며 설명하자 임하나는 안무를 익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성현을 따라 했다.
성현은 직접 임하나의 손을 들어 올리며 세세하게 디렉팅했다.
“고음을 내면서 이렇게, 이런 식으로 손동작을 추가해주면 더 간절함을 전달해줄 수 있어요.”
“어, 진짜. 뭔가 더 절박한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성현의 디렉팅이 이어질수록 임하나의 노래는 더욱 완벽해져 갔다.
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연습에 매진했다.
임하나는 춤을 출 때처럼 어느새 땀 범벅이었다.
성현은 임하나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해주었다.
“지금 제가 알려준 테크닉은 당연히 중요한 거고 갈고닦아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테크닉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진심이에요. 전 하나씨가 고음이나 기술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씨의 음악을 하면 좋겠어요.”
“저만의 음악이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고민에 빠졌다.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삼켰다.
당장 고음이 부족하단 말에 고음을 연습해서 왔더니 이젠 다시 고음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만의 음악을 하라고 한다.
성현이 내준 숙제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