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99화 (99/273)

99화

성현은 릴리가 이번 무대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을 찾고 경연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음악을 즐겼으면 했다.

그래서 일부러 평소 음악적인 교류를 많이 했던 주영준 프로듀서를 붙여줬다.

거기다 부담을 느끼지 말라고 준비 기간도 다른 사람들보다 길게 주기까지 했다.

릴리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해 주영준과 많이 이야기해보고 결정한 다음에 무대에 올랐으면 싶은 성현이 바람이 담긴 배려였다.

이것 말고도 성현은 이번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 꼭 릴리여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존재 자체가 마PD의 조작을 파훼할 핵심 키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번 경연에서 너튜브 스타인 릴리씨의 영향력이 필요해요.”

성현은 고심 끝에 릴리에게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예상대로 릴리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잠실팀에서 있을 당시 김태구 대표한테 조종당해 팬들에게 투표를 조장하고 인기 투표로 경연을 치러 올라온 기억이 떠올랐다.

“성현씨는… 김태구 대표하고는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릴리의 입에서 차가운 말이 튀어나왔다.

음악을 향한 성현의 진심을 믿었던 만큼 방금 성현의 그 말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믿었던 이에 대한 배신감.

이번 일은 애초에 체념하고 김태구 밑에 있었던 과거보다 훨씬 비참하고 아프게 느껴졌다.

릴리는 몸을 돌렸다.

며칠 동안 자신과 고생했던 주영준에게는 면목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격한 실망감을 떨치기에도 버거웠다.

릴리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성현과 있었던 스튜디오에서 나가려고 했다.

“릴리씨 무슨 생각하는진 알겠지만, 저에 대한 판단은 제가 하는 얘길 듣고 결정해주세요.”

성현은 다급한 마음에 릴리의 앞으로 가 그녀 앞에 서서 말했다.

릴리는 이미 마음이 돌아선 듯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벌써 눈시울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들을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이성현씨도 절 이용하려는 건데.”

“무작정 절 도와달란 거 아니에요. 제 얘길 듣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돕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어떤 것도 강요할 생각 없습니다. 선택은 전적으로 릴리씨가 하는 거예요.”

성현이 릴리의 눈을 보며 간절하게 말하자 잠시 고민하던 릴리는 결국 성현의 말을 들어보기로 결정했다.

지난 경연에서 자신에게 자유롭게 음악을 하라 했던 성현의 말을 잠시 떠올려보면서.

릴리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들어는 볼게요. 어떤 이유 때문인지.”

“말씀은 드릴 거지만 조건이 있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꼭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밖에 있는 멤버들한테도요?”

“네. 둘만의 비밀로.”

성현의 제안에 릴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성현의 말에 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

릴리와의 대화를 마친 후 성현은 다시 임하나와 서지현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임하나의 문제만 해결하면 됐다.

다른 프로듀서들은 각자 곡을 준비하러 흩어지고 자리에 없었다.

“연습 잘하고 있었어요?”

성현의 등장에 임하나의 표정이 확연하게 굳어졌다.

서지현은 둘 사이에 껴서 성현과 임하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조금 쉬다가 다시 하려구요.”

서지현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애써 밝게 말하며 하나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성현이 잘됐다는 듯 의자에 앉아 자리까지 잡고 이야기를 꺼낸 탓이었다.

“그럼 아까 하던 얘기마저 할까요?”

성현의 말에 서지현은 다시 임하나 눈치를 보고 임하나는 망설임 없이 성현의 앞에 가서 앉았다.

서지현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쉬고 임하나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말씀하세요.”

임하나도 이대로 고음 문제를 피하긴 싫었고 차라리 성현에게 솔직한 말을 듣고 싶었다.

“하나씨의 음색이 중저음에서 매력적이긴 해도 고음에 안 어울리는 소리도 아니라고 봐요. 어쩌면 고음에서 더 빛을 낼 수 있는 음색이라 보는데 고음을 안 내려는 이유가 있나요?”

성현도 알고 있었다.

임하나의 보컬은 몰라볼 정도로 많이 발전해왔다.

서지현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성현의 디렉팅으로 임하나는 점차 댄스만큼 노래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성현의 말에 임하나는 조금 고민을 하더니 이내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시다시피 전 원래 댄서 출신이잖아요. 고음을 내려면 상대적으로 호흡이 중요해지는데, 저 같은 경우는 매 무대에서 춤이 메인이다 보니 지금까지 고음을 제대로 내본 적이 없어요.”

임하나의 차분한 설명에 성현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임하나 말대로 고음을 내기 위해선 특히 호흡 관리가 중요했는데 격한 춤을 추는 임하나로서는 충분히 부담감을 느꼈을 수 있었다.

‘아냐. 저게 다가 아닐 거야.’

그러나 성현이 보기에 임하나의 지금 대답은 솔직하지 않아 보였다.

지금까지 무대에 섰던 임하나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설명은 부족했다.

방금 말한 호흡 문제는 지금까지의 트레이닝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임하나가 호흡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면 그동안 성현에게 상의할 기회도 충분했다.

하지만 임하나는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한 적이 없었다.

성현은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준비한 지현씨와의 듀엣곡은 안무가 거의 없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그런데도 하나씨, 고음 파트는 전부 지현씨한테 넘겼잖아요. 춤 때문에 고음을 내지 않는다는 건 조금 핑계처럼 들리네요.”

성현의 무뚝뚝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서지현은 더욱 좌불안석이 된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다가 성현의 눈치를 한번 보고 외투를 챙겼다.

“저 요 앞에 토스트집 좀 다녀올게요.”

그렇게 연습실 나가려는데 성현이 서지현을 불렀다.

“곧 무대 올라갈 수도 있는데 목 관리하셔야죠. 키위주스 말고 따뜻한 음료로 드세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서지현을 보고 곧 무대에 올라갈 수 있다는 건 자신이 아니라 서지현이 뽑혔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역시 그 말뜻을 이해한 서지현은 임하나와 성현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지현이로 결정된 건가요?”

“글쎄요. 현재로선 그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네요.”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덧붙이는 말에 입술을 깨물던 임하나가 물었다.

“......고음 때문인가요?”

“단순히 고음 때문은 아니에요. 프로듀서가 좋은 곡을 만들고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중요한 건 가수와의 소통이에요. 그런데 하나씨는 지금 저한테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성현의 말에도 임하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이 생긴 성현은 다시 한번 묻기로 했다.

“우리 솔직해지죠. 고음을 안 내려는 이유가 뭐예요?”

성현의 물음에 임하나는 조금 망설이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무서워요.”

“뭐가요?”

“실수할까 봐요. 춤은 실수해도 곧바로 커버할 수 있는데 고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음이탈 한 번 나면 앞에서 아무리 빌드업을 잘해놔도 다 무너지는 거잖아요.”

“무너지는 게 싫어서 고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건가요?”

“네. 전 안정적인 무대를 하고 싶어요. 아무리 무대에서 즐긴다고 해도 실수 한 번 하면 떨어지는 게 오디션이잖아요. 제가 잘하는 것만 안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임하나는 그제야 성현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성현은 임하나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잘하는 것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실수 없이 보여줄 수 있게 구성하는 것은 어찌 보면 참가자로서 당연한 전략이었다.

‘임하나씨는 안 그러길 바랐는데.’

그러나 성현은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라 임하나란 사실이 안타까웠다.

보통의 참가자들은 저런 전략을 써서라도 위로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임하나는 그 사람들처럼 몸을 사리지 않아도 되었다.

왜? 성현은 임하나의 특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바의 씨앗]

특성만 보면 임하나는 결코 고음을 못 하는 참가자가 아니었다.

임하나의 말처럼 두려움에 갇혀 제 기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포텐을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 너무 안정적인 무대를 추구하는 바람에 그것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던 거구나.’

성현은 임하나가 안타까웠다.

임하나는 음색이 워낙 뛰어난 탓에 고음 없이도 지금까지 훌륭한 무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타고난 음색 덕분에 딱히 고음을 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임하나는 제 몸에 맞는 옷을 갈아입듯 특출난 음색으로 매 무대마다 다양한 모습을 맘껏 펼쳐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고음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무시할 수 있었던 거였다.

굳이 그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아도 모면할 수 있는 무대들이 많았으니까.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 고음을 잘 못 내는 가수라는 틀에 갇혀 실수할까 봐 그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있었다니.

성현은 임하나의 재능을 꽃피워주고 싶었다.

간만에 프로듀서로서의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이번 무대에 조작 사건이 있는 만큼 하나씨 특성이 꼭 발현되면 좋겠는데.’

“어쩌면 제 잘못도 있는 것 같네요. 하나씨가 고음을 쓰지 않으려는 걸 알면서도 모른척해 왔거든요. 하나씨 음색 좋고 춤 잘하고 고음 없이도 충분히 무대 채울 수 있는 아티스트잖아요.”

“…….”

믿고 따랐던 성현이 스스로를 질책하는 말에 임하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이어진 성현의 말에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라 목줄기가 당겨왔다.

하지만 무엇 하나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속을 제대로 꿰뚫은 성현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동시에 자신을 믿어주었던 성현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성현은 임하나의 특성을 꽃피울 방법을 고민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성현은 임하나의 성격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나씨. 하나씨처럼 하이 노트 없이도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하이 노트가 있다면 더 완벽한 가수가 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성현의 말에 임하나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임하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이겨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임하나가 서고 있는 무대는 그냥 무대도 아니고 한순간의 실수로 미래의 기회까지 송두리째 없어지는 서바이벌 오디션 무대였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도박 같은 무대를 준비할 수는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더 큰일인데. 알면서도 시도를 안 했단 거잖아요. 그럼 임하나씨는 고음만 있으면 더 완벽한 가수가 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안정적인 길만 걷고 싶단 이유로 노력조차 안 한 거네요?”

그동안 애써 외면해오던 문제를 성현이 지적하자 임하나는 충격을 받은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임하나씨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요? 항상 승부욕 넘치더니 결국 이기려는 목적 때문에 정작 중요한 건 외면하고 모른척하는 사람이었나요?”

“......죄송합니다.”

임하나는 어느새 목이 매어 잠긴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도 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 확실히 임하나를 도발해서 그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처음 임하나씨를 봤던 때가 떠오르네요. 기억나요? 본선 1라운드요.”

본선 1라운드라는 말에 임하나 역시 성현을 만났던 그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탈락에 연연하다기보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그 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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