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문희진의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성현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김 기자가 문희진이란 사실도 놀라운데 그녀가 흘리는 말을 듣고 있자니 조작PD에 대한 걸 알고 있을 거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 한구석에서 떠나질 않았다.
거기다 갑자기 자신에게 함께 음악을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벌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같이 음악을 하자는 건 무슨 뜻인 겁니까?”
성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문희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별 뜻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말 그대로 앞으로 오디션을 함께 진행하자는 겁니다.”
“왜요?”
“그쪽이 실력 있으니까요.”
성현의 살짝 가시 돋친 말에도 문희진은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데 이토록 기분이 더러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기분 나쁜 벌레가 팔을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에 성현은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성현 참가자가 프로듀싱한 무대들을 쭉 봤어요. 당장의 실력도 좋지만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희진은 자신의 휴대폰에 있던 동영상을 성현에게 보여줬다.
그것은 더 비기너 무대를 비롯하여 버스킹 공연, 본선 3라운드 무대 등 성현이 프로듀싱한 무대들을 시간 순서대로 편집한 영상이었다.
“그쪽 오기 전까지 계속 이거 보고 있었어요. 마지막 무대에선 퍼포먼스 측면에서 볼 때 천소울씨의 기량이 더욱 좋아졌더군요.”
문희진 말에 성현은 그제야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듣고 있던 노래가 자신이 프로듀싱한 곡들이었단 걸 알 수 있었다.
“프로듀서가 가수를 보는 안목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수가 프로듀서를 보는 안목 또한 중요합니다. 가수 참가자인 제 눈엔 이성현씨는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매 라운드마다 성장할 수 있는 프로듀서인 거 같고, 전 당신에게 베팅하고 싶습니다.”
마치 쉽죠? 라고 물어보는 듯한 문희진의 말투에 성현은 굳게 입을 닫았다.
프로듀서인 성현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고 가수인 자신이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선 성현과 함께하길 원한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스폰서들 사이에서도 이성현 참가자는 핫하잖아요.”
문희진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한 후에 성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성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거절합니다. 저한텐 이미 훌륭한 가수들이 있고 이런 제안 듣는 거, 솔직히 좀 불쾌하네요.”
성현의 말에 문희진은 순간 표정이 구겨지지만 이내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는다.
구원권을 써주네 마네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간택해줄 테니 감사히 여기라는 저 오만한 태도가 성현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수와 프로듀서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빤히 보이는 태도였다.
성공을 위한 발판.
아마도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 뻔했다.
문희진은 성현의 속도 모르고 계속 나불거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너튜브 봤다면 알겠지만 저 실력 좋습니다. 전 당신이 데리고 있는 모든 가수들 보다 더 경쟁력 있는 사람이고 저와 함께하는 건 프로듀서인 당신에게도 나쁠 거 없다 보는데요. 당신도 우승하고 싶잖아요. 아닌가요?”
문희진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성현은 그녀의 자신감이 결코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닌 걸 알기에 비웃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동조할 생각도 없었지만.
‘실력이 확실한 참가자긴 했지. 경쟁력도 확실하고.’
성현도 너튜브 영상을 봤기에 문희진이 지닌 자신감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엔 한 가지 성현이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정말 제가 데리고 있는 모든 가수들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나요?”
날카롭게 파고들은 물음에 문희진은 성현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성현이 말뜻이 뭔지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천소울.
아무리 문희진이 실력이 좋아도 천소울만큼은 문희진 자신도 자신이 더 실력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문희진의 영상을 보고 눈길이 가는 가수였다는 것은 성현도 인정했다.
문희진의 지역과 이름을 외워두자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천소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참가자는 분명 아니었다.
그예로 성현은 문희진의 영상을 한번 찾아보고는 그 뒤로 찾아서 틀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천소울이 잘하는 건 인정하지만 어차피 이번 라운드에서 떨어질 겁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운이 좋았을 뿐이지 원래 대로라면 진작 떨어졌어야 할 참가자입니다.”
“운이요? 진심으로 천소울씨가 여기까지 운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합니까?”
잠시 말문이 막혔음에도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문희진을 보고 성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 얼굴을 보고 문희진은 변명하듯 빠르게 말을 뱉었다.
“그 녀석이랑 작업해보면 알겠지만 독불장군에 은근 멘탈도 약합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이 있죠. 과연 쇼비지니스 바닥에서 그런 놈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문희진의 말에 성현은 조금 의아해서 그녀를 봤다.
방금 문희진이 한 말을 들어보면 그녀는 천소울을 잘 아는 듯했다.
이태원 지역의 참가자가 천소울과 친분이 있나?
어쩌면 오디션에 참가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까 신촌 지역의 마PD와 관련된 일을 안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한 것도 그렇고, 그냥 천소울을 아는 사람인가? 하고 넘기기에는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설마….’
다시 스멀스멀 의심이 들자 성현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말없이 문희진을 바라보던 성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떼고 들릴 듯 말 듯 한 한마디를 건넸다.
“…메이크 유어 스타.”
성현의 말과 동시에 문희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 어떻게 아는 겁니까?”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문희진의 질문으로 확실해졌다.
그녀는 메이크 유어 스타를 알고 있다.
성현은 자신 말고도 그 게임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확실해지자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문희진의 질문에 성현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성현이 단호하게 대꾸해버리고 입을 닫자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던 문희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성현을 붙잡고 외쳤다.
그 다급한 모습을 보자 성현은 문희진이 마PD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잠깐만, 그럼 이미 알고 있는 거잖아요? 이번에 신촌이랑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문희진씨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성현은 살짝 몸을 틀어 문희진의 손을 거뒀다.
문희진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재차 말했다.
“아뇨, 그러니까 저랑 함께 하자니까요. 이대로면 이성현씨 당신, 떨어집니다. 저랑 손잡으면 제가 이성현씨도 구제해주고, 또….”
“싫습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걸로 하죠.”
성현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희진은 성현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의뭉스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입니까? 신촌을 이길 수 있는 방도라도 있는 거예요?”
“그걸 제가 문희진씨한테 말할 이유는 없죠.”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를 나가는 성현의 뒷모습을 문희진은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성현에게 제안을 하러 왔건만 오히려 성현에게 한 방 먹었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녀는 성현을 붙잡지도 못한 채 벙쪄서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게임에 대해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문희진은 성현이 나간 후에도 한참 동안 홀로 카페에 앉아 혼란스러운 머리를 다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혼란 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문희진은 일부러 생각을 더 단순화시켰다.
성현이 게임 ‘메이크 유어 스타’를 알건 말건 상관없다.
어차피 성현이 마PD의 조작을 미리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즉 이번 신촌과의 대결에서 지는 건 이미 정해진 일.
‘이성현을 품지 못한 건 아쉽지만 천소울을 떨어뜨릴 수 있는 걸로 충분해.’
천소울.
게임 속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재능과 능력이 넘치는 참가자였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그를 이번 라운드에서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소득은 있었으니까.
***
아지트로 돌아온 이성현 역시 조용한 스튜디오 한켠에서 문희진에 대해 생각이 잠겼다.
‘나 말고도 메이크 유어 스타를 한 사람이 있을 거란 건 생각지도 못했어.’
지금 이 상황은 제아무리 성현이라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문희진은 가만히 있지 않고 신촌 지역과 경연을 하게 된 자신을 포섭하러 오기까지 했다.
‘혹시… 문희진이 마PD를?’
거기까지 의심이 미치자 성현은 자신의 계획을 조금도 흘리지 않은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확률이 커.’
당장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만약 성현이 마PD 조작 사건을 해결하고 본선 4라운드로 올라간다면 그녀를 자주 만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성현은 복잡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연습 중인 멤버들을 쳐다봤다.
‘오디션에서 다 같이 음악을 한다는 게 역시 쉬운 일은 아니구나.’
당장 마PD도 마PD 지만, 천소울을 비롯해 일행들과 높은 곳에서 함께 음악을 하기 위한 여정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당장은 마PD 조작 사건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겠지.’
이번 신촌 지역과의 경연에서 이기는 게 우선이었다.
문희진의 등장으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변수가 생길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변수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생각의 결말은 단순해졌다.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곧 멤버들을 훑어보던 성현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멈췄다.
릴리.
그녀가 마PD 조작을 벗어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인물이었다.
“릴리씨.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성현은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바로 스튜디오의 문을 열어 릴리를 불렀다.
성현의 부름에 주영준과 연습 중이던 릴리가 연습을 멈추고 성현에게 다가왔다.
성현은 오디션과 관련된 질문을 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무대 준비는 잘 돼가요?”
“마지막 경연 무대인 데다가 홍대팀에 와서 하는 첫 무대다 보니 조금 떨리네요.”
너튜브 스타인 그녀조차도 이번 무대는 조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번 라운드 자체가 개인 경합이 아니라 팀 전체의 운명이 걸린 경연이기 때문이다.
성현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떨어졌을 릴리였다.
떨어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멀쩡하게 가수 인생을 살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릴리는 성현에게 무엇으로라도 보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이번 경연만 이기면 4라운드로 올라갈 수 있었고 그 문턱에서 가장 첫 무대를 릴리가 맡았다.
떨릴 수밖에 없는 무대였다.
“멤버들이랑은 좀 친해졌어요?”
“네. 다들 먼저 말도 걸어주시고 친절하세요. 그런데…….”
릴리는 조금 말끝을 흐리더니 성현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제가 이번 무대에 오르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왜요?”
“전 원래 홍대 팀 기존 멤버도 아니고 아무래도 이전 무대에서 제 행동 때문에 실망한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서요. 어떻게 보면…….”
릴리는 숨을 고르더니 작게 뒷말을 덧붙였다.
“무책임했잖아요.”
그녀는 여전히 이전 무대에서 잠실 팀원들을 저버렸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대에서 한 돌발 행동 때문에 팀이 졌다는 생각에 아직도 잠을 설치곤 했다.
“릴리씨 잘못 아닌 거 알잖아요. 김태구 대표의 행동을 알면서도 방관한 팀원들한테도 잘못이 있는 거예요.”
릴리는 항상 착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다.
일찍이 그걸 파악한 성현은 자신의 말로 쉽게 릴리가 이런 죄책감을 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최대한 그녀를 위로해주려 했고 릴리도 그런 성현의 진심을 아는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연습에 매진한 릴리는 피곤한 안색이었기에 평소보다 더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다.
성현은 지금 릴리가 이 분위기를 타서 이번 무대에 오른다면 그게 바로 팬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지만 긴 말을 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릴리씨는 그런 걱정 하지 말고 무대만 생각하면 돼요. 경연 무대라 생각하지 말고 대중들한테 릴리씨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음악 보여줘요.”
“네. 기회 주신만큼 음악으로 보답할게요.”
성현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인사를 하는 릴리를 보던 성현은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제가 릴리씨를 부른 이유가 있어요.”
“네, 뭐든 말씀만 하세요.”
릴리는 성현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성현은 그 모습을 보며 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뗐다.
“사실 이번 경연에서 릴리씨의 영향력이 필요해요.”
이어지는 성현의 말에 릴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