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97화 (97/273)

97화

임하나와 서지현은 각각 파트를 배분해서 불렀다.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내내 임하나는 고음 부분 파트를 일절 맡지 않았고 성현에게는 이 지점이 신경 쓰였다.

임하나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끈적하고 그루브한 음색은 저음과 중음에서 매력을 발휘했다.

이를 알고 있는 임하나도 일부러 중저음 위주의 파트를 맡곤 했다.

그건 비단 이번에 서지현과의 듀엣 노래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특별히 고음을 요구하는 곡을 한 적이 없긴 하지….’

임하나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무대에서 폭발적인 고음을 피해왔다.

지금까지 부른 곡들이 그루브를 살리면서 음색이 돋보이는 곡이었기에 성현도 딱히 신경을 쓰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 곡은 달랐다.

이번 곡은 평소처럼 그루브하고 리듬감이 돋보이는 곡이 아니라 잔잔한 멜로디의 발라드곡.

어떻게 보면 서지현에게 더 어울리는 곡이긴 했다.

그런데 막상 서지현과 함께한 노래를 들어보니 임하나의 파트에는 고음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파트배분을 했다는 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문제였다.

임하나의 속사정을 알아야 했다.

“고음 자신 없냐구요. 혹시 안 올라가요?”

성현은 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바로 임하나에게 고음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성현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임하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임하나는 성현의 질문에 적지 않게 당황을 했는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대답을 하지 못하자 계속해서 길어지는 침묵에 보다 못한 조은별이 나서서 그녀를 대변해줬다.

“하나씨 매력이 고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파트 배분도 깔끔하고.”

“그건 알지만 난 지금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고음을 안 내는 건지 못 내는 건지. 하나씨 생각은 어때요?”

성현이 감정이 제거된 건조한 목소리로 재차 묻자 당황했던 임하나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가 번쩍 고개를 든 그녀는 아까와 다르게 담담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못 내는 거예요.”

임하나의 단호한 대답에 옆에 있던 서지현이 놀라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꽤 단호하네. 하나씨 성격상 본인 입으로 못한다는 말이 나온 거면 뭔가 사연이 있는 건가.’

성현은 임하나의 대답에 생각에 잠겼다.

성현이 말을 하지 않자 다른 프로듀서들도 모두 먼저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터진 성현의 말에 다들 성현이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고음에 관해 물을 때는 화난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프로듀서들은 성현 모르게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지만, 이중에 성현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요하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다들 요하의 모습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요하는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대신 급하게 성현을 찾았다.

“성현이 형! 밖에 누가 찾아왔어요.”

“누가?”

“김 기자라고 하는 거 보니까 기자님 같은데요?”

요하의 말에 연습실에 있던 프로듀서들 모두 깜짝 놀랐다.

“성현씨 벌써 기자랑 인터뷰도 하는 거예요?”

“아지트까지 찾아온 거면 진짜 원해서 온 걸 텐데.”

조은별에 서자명까지 감탄하며 성현을 보는데 성현의 표정은 멤버들과 다르게 의아하기만 했다.

자신은 천소울처럼 너튜브에 영상이 올라가지도 않았고, 어느 한 곳과 스폰서 계약을 맺지도 않아 인지도도 낮았다.

‘김 기자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지?’

벌써 한참 기다린 것 같다는 요하의 말에 성현은 연습실 밖으로 나섰고 성현이 나간 후에도 연습실의 분위기는 싸했다.

임하나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런 임하나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옆에 있는 서지현이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며 눈치를 봤다.

“무슨 일 있어요?”

나중에 들어와서 이 상황을 잘 모르는 요하가 멤버들에게 묻는데 누구도 상황에 대한 얘길 해주지 못했다.

“요하, 잠시 나가 있을래? 지현이도.”

잠시 고민하던 조은별의 말에 요하와 서지현은 연습실을 나가고 프로듀서들과 임하나만 남았다.

“너무 주눅들 거 없어요. 가수한테 고음이 반드시 필수 요소도 아니고 연습하면 어느 정도 낼 수 있는 게 고음이에요.”

“그래요. 하나씨 매력은 고음이 아니라 소울풀한 음색이니까. 그리고 춤도 멋있게 잘 추고 무대 퍼포먼스도 좋잖아요.”

조은별과 서자명은 나름대로 하나를 열심히 위로하지만 임하나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다들 바쁘실 텐데 저 때문에 괜히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임하나는 프로듀서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을 느꼈는지 애써 웃으며 말하고는 연습실을 먼저 나갔다.

***

요하가 일러준 곳은 홍대 아지트 근처의 한 카페였다.

성현이 카페로 들어가자 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인가.’

성현은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가 기자라는 확신이 들었고 곧장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김 기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모자를 쓴 채 테이블에 올린 손을 까딱이고 있었다.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는 걸로 보아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김 기자, 맞아요?”

성현이 그의 옆에 서서 묻자 이내 그 사람이 이어폰을 빼고 성현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성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당신은......?”

김기자, 라고 자신을 칭한 그의 얼굴이 너무 낯이 익었다.

너튜브 영상에서 본 이태원 가수 참가자로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확실히 임팩트를 보여준 가수 참가자였기에 성현은 그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서울 지역 경연을 계속하다보면 꼭 만날 거라고 생각한 참가자 중 한명이기도 했다.

“문희진씨?”

성현의 물음에 그 사람은 모자를 벗더니 일어나 성현에게 악수를 내밀었다.

성현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별다르게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반가워요. 제가 김 기자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김기자란 말이 나왔을 때 성현은 어이가 없었다.

‘문희진씨가 김기자라고? 김 기자라면 김씨여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보다 참가자 중에 기자가 있었다고?’

성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짜 기자입니까?”

“설마요. 이성현씨한테 볼일이 있어서.”

기자라는 건 거짓말이라는 소리였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불러내야만 했지?

문희진의 대답에 성현은 혼란스러움에 가득 차 앉지도 않고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문희진은 그런 성현의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듯 먼저 자리에 앉았다.

“바쁜데 불러서 미안해요.”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문희진의 말에 성현은 곧장 그녀의 의도를 물었다.

거짓말을 해서까지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보면 그다지 좋은 의도의 용건은 아닐 거 같았다.

다소 공격적인 성현의 말에도 문희진은 피식 웃으며 여유를 보일 뿐 용건을 말하진 않았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문희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친절하게 자신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그 말에 성현은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서 곧장 다시 물었다.

“이태원 참가자가 왜 홍대까지 찾아온 거냐고 물었습니다.”

“뭐, 이것저것 말해줄 것도 있고 제안할 것도 있고. 직접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

문희진은 괜히 이런저런 이유를 댔지만 성현에게 당장 궁금한 건 하나였다.

“무슨 제안이요?”

그녀가 한가롭게 자신의 얼굴이나 보자고 홍대 아지트까지 올 리 없었다.

성현은 그걸 파악하고 문희진이 말한 제안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아마 핵심은 제안을 위해서일 것이 뻔했기에 성현은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재촉하듯이 캐물었다.

“마지막 경연 지역이 신촌이라 들었는데.”

“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겁니까?”

“신촌이 어떤 지역인진 알고 있어요?”

문희진 물음에 성현은 지금까지 빠르게 대화를 이어나가던 것과 다르게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신촌이 화두에 오른 탓이었다.

단순히 홍대팀이 이번에 붙게 될 지역이라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커넥트 앱만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뻔한 말을 하러 굳이 이곳까지 와서 자신을 찾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어떤 지역이냐는 문희진의 질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했다.

성현은 신중하게 문희진의 얼굴을 살피며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문희진은 신촌이라는 말을 언급해놓고는 심각해진 성현의 표정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신촌 마PD 투표 조작 사건을 미리 알고서 묻는 건가? 아니야. 그걸 아는 건 불가능해.’

성현 자신을 제외하고 ‘메이크 유어 스타’ 게임 속 내용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게임은 이 서바이벌 오디션이 시작되기 전에 서비스 종료가 되었으니까.

즉, 현시점에서 게임을 플레이 해본 적이 없는 일반인이 마PD와 관련된 미래를 아는 건 불가능하단 소리였다.

“잘 모릅니다.”

결국 성현이 택한 건 무난하게 모른척하는 대답이었다.

성현의 무뚝뚝한 답변에 문희진은 씨익 웃었다.

“신촌 지역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어지는 문희진의 느긋한 말에 성현은 다시 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 문희진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의뭉스럽게 말을 흐릴 뿐 구체적인 정보는 주지 않고 성현을 떠보는 듯한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마영진 PD를 알고 있는 건가?’

이번에 총괄 PD 자리에 신촌 메인 PD를 꿰차고 들어온 마PD가 됐다는 소문은 이미 서울지역 참가자라면 금세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일반 PD 자리에 있기에는 넘치는 사람이 왜 갑자기 총괄 PD가 되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었지만 그걸 신촌과의 경연과 묶어서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성현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마PD가 조작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것은 게임을 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접할 수 없는 정보다.

성현이 말없이 문희진의 얼굴을 살피는데 문희진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라...... 뭔가 이유가 있나요?”

성현은 문희진을 떠보기 위해 물었지만, 그녀는 이에 대한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결국 당신이 명심해야 할 건 하납니다. 홍대는 신촌을 이길 수 없다는 것.”

문희진의 말은 너무 단호했다.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으려는 말에 성현은 인상을 찌푸리고 반박했다.

“말을 이상하게 하시네요. 경연에서 절대 이길 수 없는 지역은 없습니다.”

“답답하네. 당신들이 아무리 좋은 무대를 보여도 결과는 똑같단 말입니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 두세요.”

문희진 말에 성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조작 PD에 대해 아는 게 있는 건가 긴가민가했지만, 여기서 더 그녀에게 이유를 물어봤자 대답해 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성현은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문희진이 굳이 다른 지역인 홍대까지 와서 자신을 불러낸 이유.

그 이유라도 제대로 알고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하려는 제안이 뭐죠?”

“저랑 같이 음악 하시죠. 제가 신촌 지역 대표랑 친한데 앞으로 저희와 함께한다면 구원권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문희진의 말에 성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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