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92화 (92/273)

92화

조작PD의 계략을 헤쳐나갈 계획을 세운 성현이었지만 당장 멤버들에게 이 사실을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성현은 결국 다른 이유를 들먹였다.

“어차피 경연 주까진 1주일이란 준비 기간이 있잖아요. 괜히 기다리고 있다가 급하게 두 번 경연을 치를 바에는 먼저 경연 신청을 해서 여유 있게 텀을 두고 다음 경연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성현의 말은 충분한 설명이 되기엔 부족했다.

지금까지 성현이 이런 식으로 이유 없이 서두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팀원들이 성현의 말에 반기를 들기도 애매했다.

지금 성현은 나름대로 팀의 입장을 위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적지 않게 당황한 멤버들은 많은 생각에 휩싸여 누구 하나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들 실력 있잖아요. 일주일이면 준비 기간 충분할 거라고 보는 데 아닌가요?”

성현은 조은별을 비롯한 서지현, 임하나 등 멤버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말했다.

팀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이게 성현의 최선이었다.

여기서 선수를 치지 않으면 이번 3라운드 2차전의 결과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대답을 한 건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찬성입니다. 하루빨리 무대에 서고 싶기도 하고. 다들 뭐가 걱정인진 알겠지만, 저도 2주 동안 그냥 쉬고만 있던 건 아닙니다. 나름 무대랑 편곡 구상까지 해놨으니 저 때문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멤버들이 그의 실력을 의심해서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란 걸 천소울 또한 잘 알았지만, 일부러 자신을 낮추며 말을 하였다.

멤버들 또한 천소울의 믿음직한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다졌다.

“저도 찬성이에요. 공연 두 번 하면 더 많은 노래 들려줄 수 있고 좋잖아요.”

역시 천소울의 말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주선아였다.

주선아는 부쩍 친해진 팀원들의 표정이 아까보다 나아진 것을 확인하고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팀원들은 주선아까지 연달아서 말하자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는지 다들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럼 이번에도 전승 가는 건가요?”

“하나 언닌 왜 매번 승리에 집착하는 거예요?”

“이기는 게 좋으니까?”

“이기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이왕 하는 거 이번에도 즐기면서 해요, 우리.”

임하나의 말에 서지현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현이 임하나가 걱정돼서 말하자 투지를 활활 불태우던 임하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은 그 모습을 보고 씨익 웃으며 모두를 둘러봤다.

“그럼 프로듀서 회의 먼저 진행할 테니까 가수 참가자분들께선 각자 개인 연습하고 계시면 될 것 같아요.”

성현의 말에 멤버들 모두 파이팅을 외치고 곧장 경연 준비를 시작했고, 이성현, 조은별, 서자명, 주영준, 네 명의 프로듀서들 간 회의가 진행됐다.

***

프로듀서 참가자들은 가장 먼저 경연의 기본적인 뼈대부터 잡아가기 시작했다.

성현은 둘러앉은 프로듀서들과 한 사람씩 눈을 맞추며 그들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말을 꺼냈다.

이미 모두가 이 팀의 중추적인 리더가 성현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정해야 하는 건 2차 경연 공연자 명단과 각 프로듀서와 가수 매칭이에요.”

“하나씨랑 지현이는 바로 저번 경연에 섰으니 이번 무대는 쉬게 하는 게 어떨까요?”

조은별의 제안에 성현은 바로 수긍했다.

홍대팀에는 두 사람 말고도 믿음직한 팀원들이 많았고, 성현 역시 다양한 가수들의 재량을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다.

“그럼 두 사람을 제외한 남은 가수 참가자들로 무대를 세워야 하는데 은별씨가 요하랑 주선아씨를 데리고 첫 번째 무대를 준비하는 게 어때요? 곡은 J.KIM의 썸머가 좋을 것 같은데.”

썸머는 J.KIM의 노래 중 남녀가 함께 부른 듀엣곡이었다.

성현은 ‘더 넥스트 슈퍼스타’ 무대에서 보기 힘든 십 대의 풋풋한 사랑 노래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 말은 들은 조은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야 좋죠. 안 그래도 요하랑 선아 같이 무대에 세워보고 싶었는데.”

“둘이 비주얼도 잘 어울리고 벌써부터 느낌 좋네요.”

서자명 또한 성현의 제안에 전에 떠올렸던 무대가 생각나는지 둘의 무대를 반가워했다.

이제 남은 가수 참가자는 천소울과 릴리였다.

“그럼 두 번째 무대는 천소울씨랑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두 번째 무대는 압구정의 리빙 레전드 가수 허윤의 곡으로 준비해야 했다.

성현은 천소울을 위해 준비한 곡 리스트를 떠올리며 프로듀서들에게 말했다.

“허윤이면 천소울씨 고음도 잘 살 수 있고 괜찮을 것 같아요.”

“성현씨 드디어 꿈을 이루는 거네요.”

조은별은 이미 벅찬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성현을 보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벌써 천소울과의 무대를 꿈꾸고 있는지 성현의 시선이 저 먼 허공을 향해 있었다.

조은별은 평소답지 않은 성현이 재밌는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예전부터 천소울씨랑 무대 만들고 싶어 했잖아요.”

“네. 기다려온 만큼 정말 끝내주는 무대 만들고 싶어요.”

평소와 달리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말하는 성현을 서자명과 주영준 역시 놀라서 바라봤다.

성현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두 사람이었다.

천소울과 처음 작업하는 성현은 이번 무대에 상당히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마PD의 조작 문제를 잊을 만큼이나.

‘얼마나 재밌을까. 꿈의 그리던 가수랑 첫 무대를 하는 거잖아.’

성현은 당장 천소울과 무대를 꾸밀 생각에 설렘을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딴 세상에 가 있는 성현을 눈치챈 조은별이 헛기침을 하며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흠흠. 그럼 혹시 모르니까 세 번째 무대도 짜볼까요? 성현씨?”

“네? 아, 세 번째 무대는 주영준씨한테 맡길까 하는데.”

주영준은 조금 놀라서 성현을 봤다.

당연히 서자명을 세 번째 무대를 준비시킬 거라 생각했다.

이제 홍대팀에 굴러들어온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세 번째 무대를 제가 맡아도 될까요......?”

주영준이 조금 걱정이 돼서 성현에게 물었다.

세 번째 무대까진 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지만, 무승부로 끝날 경우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무대인 만큼 다른 무대 못지않게 중요한 무대였다.

주영준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인 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희 중에 주영준씨만큼 릴리씨랑 호흡을 맞춘 프로듀서도 없잖아요. 주영준씨는 릴리씨가 유일하게 마음을 연 프로듀서기도 하고요.”

프로듀서가 무대를 준비하는 건 단순히 편곡을 잘하고 무대 컨셉을 잘 짜는 걸 떠나서 가수와의 호흡이 중요했다.

이 사실은 성현이 서지현과의 무대를 준비하면서 배운 커다란 교훈이었다.

프로듀서와 가수 사이의 신뢰와 믿음.

거기다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는 음악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보이지 않지만 큰 작용을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렇긴 하지만......”

주영준은 성현이 방금 말한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불안함을 숨길 수 없었다.

이번 경연의 세번째 무대를 맡는다는 것에 대한 중압감은 엄청났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삐끗하는 순간 팀 전체가 떨어지는 자리였다.

“저도 도와줄 거니까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요. 프로듀서인 주영준씨가 불안해하면 릴리씨는 더 불안해할 거예요.”

릴리가 불안해할 거라는 말에 주영준은 결심했는지 이내 주먹을 쥐면서 성현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맡겨주셨으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주영준을 보고 성현은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이 기회에 주영준의 진면목을 파헤쳐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기본적인 경연 무대 구성 회의가 끝이 났다.

***

회의가 끝난 직후, 성현은 자신과 함께 무대를 꾸밀 천소울에게 향하기 전에 서지현과 임하나를 먼저 찾았다.

“이번 경연에서 두 사람은 무대에 서지 않게 됐어요.”

서지현과 임하나 역시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마지막 공연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상황이기도 했고 천소울과 릴리라는 새로운 가수가 들어왔기에 그들에게 무대를 맡길 거라 예상했었다.

“대신 두 사람 중 한 명은 다음 경연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에 서게 될 거예요.”

이어지는 성현의 말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서지현과 임하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무대에선 지금까지 그 어떤 무대보다 가장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만 해요.”

성현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이 선곡한 곡 목록을 손수 적은 종이를 전해줬다.

종이를 건네는 성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마PD의 조작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필수야.’

성현의 진지한 표정을 본 임하나와 서지현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종이를 받았고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성현이 말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종이를 확인하고 성현에게 걱정말라는 듯이 웃었다.

성현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

이성현은 서지현 임하나와 헤어진 후 곧바로 홍대 아지트 내 스튜디오로 천소울과 함께 들어섰다.

성현과 천소울은 스튜디오 한가운데 앉아서 모두 말없이 성현이 지난밤에 생각해 온 경연곡 후보를 듣는 중이었다.

압구정 측과 경연을 하면, 천소울이 지정받게 될 가수는 허윤.

초고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저음에서도 안정된 가창력 안에서 특유의 미성을 잘 보여주는 가수로서 외모가 아닌 오직 가창력으로만 승부하는 보컬리스트였다.

이미 지난 십여 년간 남성 솔로 가수로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가수인만큼 허윤의 노래를 커버하는 데는 많은 위험이 따르기도 했다.

단순히 고음만 따라 했다가는 노래에 감정이 실리지 않고, 너무 감정에 치중해서 노래를 불렀다가는 고음에서 실수를 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 따윈 천소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소울은 고음도, 감정전달도, 뭐 하나 뒤지지 않는 올라운더 참가자였다.

성현이 그를 위한 선택한 곡은 총 세 개.

모두 천소울과 잘 어울리면서, 무대에서 폭발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곡이었다.

‘곡이 별론가? 왜 아무 말이 없지.’

오랜만에 성현은 긴장 상태였다.

천소울과의 무대를 꾸민다는 생각에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서 곡을 선정하고 편곡을 해왔다.

큰 기대는 그만큼 커다란 긴장으로 돌아왔다.

성현은 자신이 편곡한 곡의 재생이 끝나갈수록 더욱 초조하게 천소울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곡을 듣는 내내 천소울이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성현으로서는 천소울과 처음으로 같이 무대를 하는 입장이었기에 천소울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싫다 좋다란 말없이 그저 무표정으로 노래를 들었고 그럴수록 성현의 속은 타들어갔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수와 처음 작업을 하는 거였고 자신의 가수에게 최고의 곡을 주고 싶단 집념 하나로 밤을 새워가며 준비한 곡이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초조하게 천소울을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준비한 세 곡이 끝이 났다.

천소울의 반응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키는데 긴 기다림 끝에 천소울이 입을 뗐다.

“좋네요.”

심플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더 넥스트 슈퍼스타’가 시작되기 2년 전부터 성현이 꼭 한번 프로듀싱하고 싶었던 목소리.

그 목소리로 뱉어진, 그토록 간절하게 듣고 싶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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