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88화 (88/273)

88화

임하나의 완벽한 무대 뒤로 이어지는 잠실 측의 무대는 주영준이 편곡한 곡으로 꾸며졌다.

강렬한 비트로 멜로디 라인이 전개되는 트렌디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참가자인 가수보다 곡이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비트 찍는 실력은 괜찮은데 멋을 너무 부린 거 아닌가.’

무대를 비켜보는 성현은 비트메이커로서 주영준의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다만 편곡 자체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변주하는 곡의 구성에 가수들은 노련하게 곡을 소화한다기보다 주어진 숙제를 다 마친다는 느낌으로 무대를 해나가고 있었다.

‘부담을 많이 느낀 것 같은데. 오히려 곡이 난잡해졌어.’

주영준은 원곡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완전히 지우고 자신의 색으로 새롭게 편곡을 한 것은 좋은 시도였다.

다만 짧은 곡 안에 너무 많은 걸 보여주려다 보니 오히려 곡이 더 난잡해진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경연이 주는 부담감 때문에 자신을 최대한 표현하려다 보니 이렇게 된듯싶었다.

‘부담감만 좀 내려놓으면 될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편곡이었다.

성현이 보기에 주영준의 편곡 실력은 확실했다.

부담감을 조금 내려놓고 노련미만 조금 생긴다면 훌륭한 프로듀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는 냉혹한 경연의 장.

미래를 보고 뽑는 곳이 아니었다.

두 번째 무대까지 모두 끝나고 투표가 시작되었다.

객석은 신중한 투표를 위해 잠시 적막이 감돌았고 댓글창 역시 잠잠했다.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마지막 결과 발표를 위해 잠실팀과 홍대팀 참가 가수들은 무대 위에 올라 엠씨를 사이에 두고 도열했다.

긴장감 가득한 표정의 서지현과는 다르게 임하나는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실팀의 첫 번째 무대를 꾸민 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올라온 잠실 팀의 두 번째 가수 참가자는 릴리 없이 혼자서 조용히 무대 바닥만 보고 서 있었다.

투표시간 내내 릴리를 기다리던 엠씨는 투표 종료라는 스탭의 안내를 듣고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그럼 투표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엠씨의 말과 동시에 스크린 뒤로 홍대와 잠실팀의 투표수가 공개됐다.

< 두 번째 무대 결과 >

홍대 팀 : 10789표

잠실 팀 : 3892표

“홍대팀 축하드립니다!”

결과는 홍대 팀의 승리였다.

그것도 몇 배나 되는 많은 수의 득표수 차이를 보인 승리였고 이를 본 김태구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었다.

이변은 없었다.

릴리의 말처럼 김태구는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일단 무대를 준비한 홍대팀의 두 여성 참가자들 말부터 듣고 싶어요.”

엠씨는 서지현과 임하나를 무대 가운데로 부르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지현과 임하나는 결과를 보자마자 기뻐서 둘이 무대 위에서 포옹하며 방방 뛰고 있었다.

그러다가 엠씨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두 사람은 무대 가운데로 이동했지만 둘의 얼굴은 이미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참가자분들 승리 축하드려요. 저도 엠씨를 보러 온 건지 콘서트장에 온 건지 모를 정도로 정말 완벽한 무대 보여주신 것 같아요.”

엠씨의 말과 함께 두 사람에게 마이크가 쥐어졌다.

서지현과 임하나는 처음으로 무대에서 소감을 말하는 거라 어색하여 감사합니다, 라며 짧게 대답하며 무대 구석으로 가려고 했다.

엠씨는 노련하게 그들을 조금 더 무대 가운데로 불렀다.

아까 그 파워풀한 무대 장악력은 어디가고 일반인들처럼 수줍어하는 그들에게 조금 더 인터뷰를 끌어내야했다.

“아니 아까 무대에선 다 잡아먹을 것처럼 하더니 왜 갑자기 이렇게 조신해졌어요.”

엠씨의 말에 임하나는 조금 눈치를 보다 마이크를 쥐었다.

후, 하고 한차례 심호흡을 한 임하나는 이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렇게 생중계로 무대를 한 것도 처음이고, 언니 너무 팬이에요! 저 진짜 언니 별스타 팔로우도 하고 오늘도 좋아요 누르고 왔어요!”

임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박나연 엠씨에 대한 팬심을 드러내고 객석에 있는 사람들 박수를 치며 웃었다.

엠씨는 방금 전에 멋지게 마친 무대에 대한 감상을 듣고자 던진 질문에 팬심이 되돌아오자 장난스럽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

“듣기론 이렇게 큰 무대에서 공연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준비하면서 어땠어요? 많이 떨렸어요?”

엠씨의 물음에 임하나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듯이 마이크를 서지현에게 넘겼다.

서지현은 무대 아래 성현을 한 차례 보더니 입을 뗐다.

“사실 준비 기간도 짧았고 곡 자체가 감정선이 중요해서 그걸 잡느라 고생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프로듀서님께서 너무 잘 리드해주시고 좋은 무대 만들어주셔서 제 스스로도 이번 무대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됐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이 무대를 빌려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서지현이 성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말하고 임하나 또한 성현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사실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가수지만 가수를 빛나게 하는 건 프로듀서분들이거든요. 항상 뒤에서 고생하시고 묵묵히 일해주시는 프로듀서님들 사랑합니다.”

서지현과 임하나 인터뷰에 프로듀서가 모두 등장하자 엠씨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성현에게 손짓을 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현을 무대 가운데로 부른 엠씨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이 성현에게 마이크를 쥐여주었다.

“아니 방금 가수 참가자분들께서 하나같이 고맙단 말을 그렇게 하는데 프로듀싱 일이 그렇게 힘든가요?”

엠씨의 말에 성현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힘든 게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런 고충보단 당장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 더 커요. 프로듀서로서 대중들한테 더 좋은 음악, 더 멋진 무대 보여줄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성현의 말에 엠씨가 솔선수범해서 박수를 치고 객석에서도 여기저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임하나와 서지현 역시 진심을 담아 성현에게 박수를 건넸다.

“이번 경연은 사실 시청자들 반응이 역대급으로 뜨거웠다고 그래요. 반응을 다 같이 한 번 보실까요?”

엠씨의 말과 동시에 무대 뒤에 위치한 스크린에 시청자들 반응이 몇 개 떠올랐다.

-음악으로 감동이란 걸 처음 받은 50대 아재입니다. 최근 일이 안 풀려서 힘들었는데 많은 위로 얻고 갑니다.

-이번 무대를 통해 좋은 에너지 받고 내년엔 꼭 원하는 대학 합격하고 싶어요! 더 넥스트 서바이벌 파이팅!

-너튜브로 실시간 공연 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요즘 사는 게 팍팍한데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그랬나 봐요. 진심이 담긴 노래 고맙습니다!

반응에는 확실히 서지현의 무대에 대한 언급이 많았고 객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맞아, 맞아 하면서 반응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훈훈하게 인터뷰가 끝나가려는 그때, 누군가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릴리였다.

엠씨는 갑자기 무대에 올라온 릴리를 보고 당황해 스탭과 PD를 쳐다보는데 뭔가 흥미로운 요소라고 판단한 PD가 MC에게 마이크 주라고 신호를 줬다.

그렇게 찾으러 돌아다닐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엠씨는 당황한 티를 감추며 릴리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우리 참가자분께서 꼭 하실 말씀이 있어서 무대에 갑자기 올라오신 것 같네요. 맞나요?”

“네.”

릴리는 급하게 무대로 올라오느라 숨이 찬지 숨을 몰아쉬다가 엠씨한테 마이크를 받고는 성현을 쳐다봤다.

서지현은 갑자기 무대로 난입한 릴리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임하나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임하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릴리가 무대 위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기에 걱정하고 있었는데 등장한 릴리는 절망하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운하다는 듯이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릴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위에 있는 성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카메라는 릴리의 시선이 향하는 성현과 릴리를 번갈아 보여주기 바빴다.

“고마워요. 이성현 프로듀서님이 아니었으면 전 오늘도 남들이 시키는 대로 남들이 원하는 음악만 했을 거예요. 이번 무대를 통해 많은 걸 깨달았고 어쩌면 틀을 만들었던 건 남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비록 전 여기서 떨어졌지만, 지금까지 응원해준 팬분들 너무 고맙고 여기 계시는 홍대 팀원들 많이 사랑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릴리는 그렇게 속사포처럼 자기 할 말을 하고 바로 내려갔다.

올라왔던 것처럼 급작스러운 퇴장이었다.

댓글창은 갑자기 등장한 릴리의 모습에 환호하다가 릴리의 말을 듣고는 여러가지 추측을 내놓기 바빴다.

성현은 당황해서 굳어있고 마찬가지로 당황한 엠씨는 급하게 방송을 수습했다.

“정말 할 말만 하고 가셨네요. 아무튼 우리 홍대팀 승리 축하드리고 다음 2차 경연도 기대하겠습니다.”

엠씨의 마무리 멘트로 1차 경연 끝이 났다.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1차 경연이 끝이 나자 PD와 스탭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성현과 멤버들이 무대를 내려가는 내내 관객석에는 뜨거운 환호성과 박수가 울려 퍼졌다.

그 반응만 보더라도 오늘의 승리가 성현의 팀에 압승이라는 사실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

잠실과의 경연이 있었던 그 날 밤.

오랜만에 자신의 반지하 작업실에서 편한 시간을 보내던 성현이 커넥트 앱을 켰다.

이번에도 경연 승리로 인해 구원권 3장 얻게 되었다.

지난번에는 살릴만한 사람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잠실 측 명단을 확인한 성현은 가장 먼저 릴리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릴리는 과연 어떤 음악을 하고 싶어 할까.’

저번에 물어봐 놓고 아직 듣지 못한 대답이었다.

성현은 가급적이면 릴리에게 직접 그 답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답이 담긴 음악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자신이 게임 속에서 보고 느낀 모두에게 사랑받는 음악인으로 커나가는 릴리를 이대로 잃을 수는 없었다.

게임과는 다르게 현실에서 그 빛을 잃을 뻔한 경험은 지금의 릴리에게 더 큰 자산이 되었을 거라 믿었다.

릴리는 이번 무대를 통해 큰 결심을 보여줬던 그 결단력에 걸어보고 싶었다.

성현은 뒤늦게 틀을 깨고 나온 릴리가 어떤 성장을 보일지 기대가 됐다.

‘다음은 주영준씨.’

성현이 릴리 다음으로 관심을 보인 참가자는 주영준이었다.

실력은 떠나서 그가 음악에 관해 가지고 있는 진지한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분명 앞으로 더 좋은 프로듀서로서 거듭날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는 탈락을 각오하면서까지 성현에게 릴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러 달려왔다.

잠실팀에서 아무도 그렇게 나선 프로듀서는 없었다.

이번 행동으로 주영준이 음악과 가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성현은 같은 프로듀서로서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

‘적당히 힘 빼는 법만 알려준다면 인디 팝을 강점으로 하는 프로듀서로서 유니크한 장점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이번 무대는 그 실력을 과도하게 보여주려고 했기에 과하게 느껴졌지만, 그런 점만 조금 더 보완한다면 그의 실력 또한 밀리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을 마친 성현은 곧장 자신의 생각을 홍대 팀원들 메시지방에 올렸다.

이들의 동의 없이 구원권을 써서 다른 참가자들을 살릴 생각은 없었다.

이미 한 배를 탄 동료들의 생각 역시 자신의 결심만큼 중요했다.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다들 성현이 결정한 거라면 좋다는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천소울의 답장만 빼고.

-천소울: 그런 건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이 시간에 일일이 연락하지 말고.

천소울의 답장은 언뜻 보면 틱틱거리고 있었지만 그 속내는 성현을 믿고 있는 듯했다.

지난날을 생각해본다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변화였다.

그 답장을 보고 성현은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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