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87화 (87/273)

87화

준비했던 음악이 무대에 흘러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릴리를 주목했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잡은 채 모자 밖으로 얼굴 드러내지 않은 릴리는 무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제자리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성현은 잠자코 릴리의 노래에 집중했다.

‘엄청 떨리겠지. 처음으로 틀을 깨부순 거니까. 긴장을 넘어선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 거야.’

릴리로써는 처음으로 대중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닌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무대에 선 것이다.

이건 분명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너튜브 스타에서부터 릴리는 방송에 익숙한 스타였다.

한순간에 자신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채 실력으로만 승부하겠다는 것은 당장 100프로 실력 발휘를 하냐 못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대를 무사히 마칠 수 있는지조차 불투명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백스테이지의 스탭들의 반응을 살폈을 때 예정된 일탈도 아닌 듯했다.

서지현의 무대를 보고 돌발적으로 이런 무대를 꾸몄을 것이 분명한데, 릴리가 과연 이 중압감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역시나 성현의 예상대로 릴리의 목소리는 떨렸고 마이크를 든 손조차 떨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습에 성현은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하셔야 합니다.’

릴리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자 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릴리는 곧 주저앉을 것처럼 몸을 떨어대면서도 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릴리는 떨리는 목소리로도 노래를 끝까지 해냈고, 노래를 마친 릴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바로 퇴장해버렸다.

릴리가 사라지고, 당황한 객석에선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 릴리의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 탓에 완성도 있는 무대라고 할 수 없었다.

-???

-???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 릴리 맞음???

댓글 창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물음표가 댓글창을 장악했고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갑작스러운 릴리의 돌발 행동에 다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듯했다.

스탭들 역시 릴리의 돌발행동에 어떻게 처리할지 우왕좌왕했고 릴리는 무대 뒤에서 대기하는 곳으로 내려갔다.

“너 미쳤어?”

김태구는 릴리가 내려오는 길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를 지켜보던 김태구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풀 세팅을 하고 있던 가수가 갑자기 일반인보다도 못한 모습으로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봤을 때 자신의 심경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릴리가 무대에 내려오자마자 김태구는 잔뜩 화가 나서 릴리에게 소리치려다가 멈췄다.

지나가던 스탭들과 카메라를 의식하고는 이내 화를 억누른 김태구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두고 보자.”

김태구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대기실로 향했고 릴리는 그를 눈으로 쫓다가 성현과 눈이 마주쳤다.

릴리는 성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릴리의 등은 꼿꼿이 펴져 있었고 그녀의 강단을 느낄 수 있었다.

무대에서 그녀의 행동만으로도 성현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고 어떤 선택을 내렸다는 걸.

‘이런 게 바로 음악의 힘인 건가.’

성현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역시 음악의 힘은 대단했다.

성현 또한 릴리가 어떤 결단을 내려주길 바란 건 맞지만, 무대 위에서 그 결단을 펼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저 결심이 실패로 끝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당황한 객석들과 라이브 방송의 시청자들은 혼란스러움에 가득 차서 투표를 바로 하지 못했다.

주최 측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관객을 진정시키고 시청자들에게 투표 방법을 재공지하느라 이번 투표 집계는 조금 늦어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휘유, 다들 당황하신 거 같은데 이제야 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 첫 번째 무대 결과 >

홍대 팀 : 98063표

잠실 팀 : 57265표

“첫 번째 경연의 승자는 홍대팀! 축하드립니다!”

엠씨의 말에 환호성을 지르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릴리의 무대의 충격이 가시질 않았는지 웅성거림이 더 컸다.

성현은 씁쓸하게 그 결과를 바라봤다.

***

릴리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김태구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릴리의 무대를 대기실 모니터로 보고 있던 스탭들은 김태구가 들어오자 재빠르게 내뺀 상태였다.

“너 제정신이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대에서 그딴 행동을 한 거냐?”

김태구의 고함소리에 릴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대기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너 진짜 팬들한테 버림받고 무너지고 싶어서 안달 났지? 인기 좀 있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

김태구의 가시 돋친 물음에도 릴리는 묵묵히 휴대폰만 봤다.

변명을 늘어놓아도 시원찮은 판국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는 릴리를 보고 김태구는 화를 주체 못 하고 테이블에 있던 티슈곽를 집어 던지며 몸부림쳤다.

바로 옆에서 악을 쓰자 너무 시끄러운지 릴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귀 아파.”

“뭐?”

이 정도 말하면 항상 자신에게 설설 기던 릴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김태구는 당황했다.

릴리가 자신의 말에도 전혀 겁을 안 내자 오히려 벙쪄 되물을 정도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반응 괜찮던데.”

릴리의 말에 김태구가 의아해서 자신의 휴대폰으로 너튜브 반응을 보는데 물음표로 가득 찼던 댓글창은 어느새 변해 있었다.

잘했다고 할 수 없는 오늘의 무대 후에 쉴새없이 올라오는 댓글들은 생각보다 나쁜 반응들이 아니었다.

-언니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 떨리는 거 봐….

-오늘 무대 개인적으로 누나 무대 중에 제일 좋았어요! 앞으로도 이런 솔직한 무대 보여주면 좋겠어요!

-요즘 얼굴색 안 좋아보이더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기죽지 마세요. 항상 응원합니다.

-힘들면 하지 마요! 그래도 우리는 릴리 좋아할 거니까! 우리 릴리 하고 싶은 거 다 해~

릴리는 김태구가 악을 쓰는 동안에도 휴대폰으로 팬들의 반응을 계속 확인하면서 두려움을 없애고 있던 것이다.

김태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너튜브의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는데 릴리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별거 아니었네. 속이 다 시원하다.”

팬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김태구를 두고 대기실 나가려는데 김태구가 릴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앉아.”

“네가 뭔데? 매니저여도 이렇게 사사건건 트집 잡진 않아. 잘 들어 당신, 너랑 나랑 둘 다 오디션 참가자야. 뭣도 아닌 게 이래라 저래라야.”

릴리는 대기실을 나서기 전에 김태구를 돌아보며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그리고 이제 둘 다 탈락자네. 다신 볼 일 없었으면 좋겠어.”

릴리가 떠난 대기실에서 김태구는 모든 걸 잃은 채로 털썩 주저앉았다.

***

한편, 같은 시각 무대 뒤 홍대 측 참가자 대기실은 돌아온 서지현을 맞으며 파티 분위기였다.

“지현아 수고했어!”

조은별은 서지현이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안아주며 호들갑 떨기 바빴다.

뒤를 이어 임하나도 툭 던지는 칭찬을 건넸다.

“너 오늘 좀 잘했더라.”

시크한 척 툭 내뱉는 임하나가 어이가 없었는지 방금 전까지 임하나가 앉아 있던 소파를 가리키며 서자명이 폭로했다.

“좀이요? 펑펑 울었으면서.”

“아 진짜! 말하지 말랬잖아요!”

말하지 않았어도 누구나 눈치챌 정도로 눈시울이 붉어져 있던 임하나가 서자명을 퍽 치고, 서지현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좀 무대가 끝난 실감이 났다.

뒤를 이어 들어온 성현이 서지현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지현씨 고마워요. 덕분에 릴리씨 마음을 돌릴 수 있었어요.”

“제가 더 고맙죠. 이번 기회로 제 감정에 더 솔직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서지현은 성현의 감사인사에 되레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이번 무대는 자신이 느끼기에도 한층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바로 뒤에 공연을 펼친 릴리가 그렇게 영향을 받은 것도 납득이 갈만큼.

그리고 이 모든 건 성현의 공이었다.

자신 혼자서 연습을 했다가는 짧은 기간에 이 정도 성과를 못 냈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서지현이 잘 알았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지현이 무대 평소보다 감정선이 더 풍부하더라구요. 대체 뭘 시킨 거예요?”

조은별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성현에게 묻자 서지현과 성현은 서로 얼굴을 보며 웃을 뿐이었다.

눈빛교환으로 확실히 했다. 포장마차에서의 일은 모두에게 비밀이었다.

“음. 키위주스로 시작해서 소주로 끝났죠, 그날?”

“뭐야? 둘이만 술 마셨어요?”

서지현 말에 조은별은 놀랍고 억울하다는 듯 묻고 성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조은별의 말에 다 같이 달려들어 우리 회식은 언제 하냐고 매달리자 성현은 그런 거 아니었다고 일행들을 달랬다.

엄밀히 말하자면 연습의 일환이었으니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재밌다. 연습 과정도 포장마차도 오늘 무대도. 음악 하길 참 잘한 것 같아.’

일행들과 장난치고 웃는 와중에 성현이 생각했다.

그저 프로듀서로 정점에 서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는데 이런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일행 속에서 서지현의 환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예선장에서 처음 서지현을 봤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엔 게임 속 캐릭터가 튀어나와 당황했지만 이제 진짜 가수와 프로듀서로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았다.

성현과 서지현을 보고 있던 임하나가 갑자기 목을 풀기 시작했다.

흠흠, 하는 소리에 모두가 임하나 쪽을 바라봤다.

서자명은 바로 알아챘다는 듯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하나씨 또 승부욕 발동됐나 보네.”

어느새 팀원들 성향을 파악했는지 그는 하나가 목을 푸는 것만 보고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지현이가 이렇게 잘해놨는데 제가 망칠 순 없잖아요.”

임하나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진지하게 목을 풀기 시작하는데 이내 대기실로 진행 스탭이 들어왔다.

“다음 무대 준비해주세요.”

스텝의 말에 임하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팀원들에게 외쳤다.

“파이팅!”

그 힘 있는 말에 팀원들 다 같이 파이팅을 외치고 임하나는 대기실을 나가 무대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완벽했다.

모든 일이 해피엔딩을 맞으려면 임하나의 말대로 마지막으로 그녀가 이겨줘야 했지만 성현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질 수가 없는 무대니까.’

임하나가 준비한 무대는 서지현 무대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릴리의 무대를 보면서 마음을 졸였던 성현은 이제 마음 놓고 공연을 감상할 준비를 마쳤다.

***

“두 번째 무대를 꾸밀 잠실 팀 리빙 레전드 가수 확인하겠습니다.”

엠씨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확인하더니 이내 가슴을 부여잡고 떨리는 표정을 지었다.

객석과 댓글창에서 누구냐는 반응이 폭발했다.

엠씨는 적당히 그런 반응을 즐기다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발표했다.

“세상에,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여성 가수예요. 남친한테 차이고 노래방에서 어찌나 이분 노래를 많이 불렀는지. 여성분들은 다 이해할 거야, 이거. 잠실 팀 리빙 레전드는 라라스윗입니다!”

엠씨의 말과 동시에 공연장 암전됐고 얼마 안 있어 임하나가 무대에 올라왔다.

순간 환하게 무대가 밝혀지고 임하나는 통통 튀는 반주에 맞춰 가벼운 안무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전주가 끝나자 임하나의 리듬감이 살아있는 보컬이 시작됐다.

그녀의 특기인 춤이 이전 무대처럼 도드라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흥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여러 번의 무대를 거친 임하나는 노련하게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그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며 무대를 진행해나갔다.

종종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며 웃어 주는 무대 매너까지 보여주자 그때마다 채팅창도 함께 폭발했다.

-눈웃음 녹는다.

-춤선 개예쁘다.

-안무 쉬워보이는 데 원래 저런 포인트 주는 게 더려움. 저분 빡센 춤도 잘 출 듯.

-음색 끈적하다. 내 스타일.

릴리의 등장에 이어 임하나의 무대까지 이어지면서 어느덧 시청자 수는 20만을 돌파했고 객석에 있는 사람들은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임하나의 무대를 지켜봤다.

저런 사람이 지금까지 무명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무대였다.

‘확실히 임하나씨는 실전이 강하다니까.’

무대를 지켜보는 성현은 서지현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완벽하게 객석을 사로잡은 임하나의 무대 매너와 여유로움을 보고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성현의 얼굴에는 완벽하게 여유로운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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