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반갑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서바이벌 ‘더 넥스트 슈퍼스타’ 3라운드 잠실 대 홍대 경연 진행을 맡게 된 박나연입니다. 반가워요. 반가워.”
이번 홍대와 잠실 지역의 경연은 유명 여자 엠씨가 3라운드 무대 진행을 맡았다.
경연이 시작되기도 전 인기 엠씨의 등장에 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개그우먼 출신인 그녀는 최근 안 나오는 방송이 없을 정도로 고공행진 중이었다.
최근엔 과로로 쓰러져 활동을 잠시 쉰다고 했는데 진행을 보러 온 것을 보니 릴리와 성현의 팀이 붙는 만큼 주최 측에서도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첫 번째 경연 ‘리빙 레전드’ 가수는 홍대 지역의 J.KIM입니다. 먼저 무대에 오를 팀은 홍대팀! 박수 부탁드려요!”
엠씨 말에 객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환호를 했다.
저번 홍대팀의 저력을 확인한 시청자들이 방청객으로 온 것이기에 홍대팀 언급에 더 큰 환호가 터져 나오는 것도 있었다.
백스테이지에 있던 서지현은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성현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지현은 말없이 웃어 보이며 무대에 오르려다, 백스테이지에 함께 있던 릴리와 눈이 마주쳤다.
릴리는 이미 메이크업을 마친 상태로 무대의상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서지현을 바라보는 릴리는 평소보다 더욱 굳은 표정이었다.
서지현은 그런 릴리를 향해 따뜻한 눈빛으로 웃어 주었다.
릴리는 경쟁자인 자신에게 보내는 미소를 보고 당황했지만, 서지현은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오르자 그제야 자신이 공연장에 있다는 걸 실감한 서지현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잠실 공연장은 홍대 홈 공연장보다 넓었고 그곳엔 서지현 혼자 서있었다.
모든 조명은 꺼졌고 오로지 하나의 조명이 서지현을 비추었다.
리허설과는 달랐다.
지금 어두운 저 앞에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수십의 관객이 있었다.
완전한 어둠 속 무대 위 서지현만이 빛났고 곧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성현과 서지현이 준비한 무대는 릴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곡이었다. 각자가 받는 어떠한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필요했던 건 한 줄기 구원이었던 거야 음악은 내 작은 방에 햇살처럼 왔고 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지.”
서지현은 힘 있는 가성으로 읊조리듯 첫소절을 불렀고 성현은 자연스럽게 미소가 피었다.
‘서지현씨보다 이 곡에 더 어울리는 보컬리스트가 있을까.’
첫 소절만으로도 성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노래는 서지현의 노래고 서지현을 위한 노래라고.
그리고 관객들 또한 이를 느꼈는지 숨을 죽이고 서지현의 노래를 감상했다.
화려한 고음이 있는 노래만이 주목받는 것은 아니었다.
서지현은 담담한 발라드 한 소절만으로 온 관객의 주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난 이제 더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을 거야 나만의 길 나만의 음악으로 살아갈 거야.”
노래가 진행될수록 점차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등 오케스트라 연주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원래 기타 반주만으로 진행됐던 J.KIM의 원곡과 다르게 더욱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케스트라에 전혀 밀리지 않고 있네.’
밑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성현의 얼굴에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었다.
서지현은 장엄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전혀 묻히지 않으며 무대를 꽉 채웠는데 이는 단순히 서지현이 가지고 있는 가창력 때문이 아니었다.
‘완전히 몰입하고 있어. 진심으로 부르고 있구나. 서지현씨.’
서지현은 가사 하나하나 진심을 다해 불렀다.
이는 처음 연습할 때와는 완벽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서지현은 감정에 노래를 잘 담았지만, 지금의 서지현은 그것을 넘어서 관객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서지현이 가진 상처를 밖으로 끄집어내면서 받은 위로를 되돌려주려는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이 진심은 객석까지 전달이 됐는지 객석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무대 밑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릴리.
그녀 또한 객석에 있는 사람들처럼 살짝 눈물이 고인 채로 서지현의 무대를 지켜봤다.
그러다 뭔가를 결심한 듯 백스테이지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내가 그랬듯 내 음악이 널 구원할 수 있기를 지쳐 쓰러진 널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너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게......”
스스로도 느낄 만큼 완벽하게 몰입한 4분 남짓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지현의 노래가 끝났을 땐 객석에 있던 사람들도, 무대를 찍던 스탭들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보던 사람들도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실력을 떠나 서지현이 주는 메시지와 그 진심에 압도당한 홀은 곡이 주는 여운에 취해 있었다.
짝짝짝.
이내 객석 한 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고, 곧이어 앉아있던 사람들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너튜브로 생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나 5년째 임용준비 중인데 진심 위로받음 너의 길을 가라는 말이 왜 이렇게 마음을 찌르냐
-ㅇㅇ 진심 음원나오면 좋겠다
-생긴 거 보고 비쥬얼 가수인줄 알았는데 반전이군.
-가성 저렇게 잘 쓰는 사람 첨 봄
-자유롭게 꿈을 펼치라는 가사를 통한 메시지가 너무 좋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하지. 그런 의미로 오늘 다이어트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 나도 이번 기말고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럼 10분 후에 두 번째 무대 시작하겠습니다.”
릴리의 무대까지 10분 남짓이 주어졌고 스탭 한 명이 릴리를 준비시키기 위해 백스테이지에서 그녀를 찾아다니는데 이내 그의 표정이 절망감으로 바뀌더니 무전을 친다.
“릴리가 안 보입니다......”
***
인이어를 쓴 스탭들이 정신없이 백스테이지를 오가며 릴리를 찾았다.
무대에 있던 박나연 엠씨 또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인이어로 상황을 전해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가 무대인 것을 깨닫고 바로 풀었다.
“저, 여러분 아쉽게 됐지만-”
10분이 지나고 박나연은 이대로 공연을 취소하려 했다.
그때 무대 구석으로 올라온 스탭이 급하게 엑스자를 만들어 박나연에게 신호했다.
“아쉽게 됐지만 쉬는 시간이 끝이 났습니다. 두 번째 무대 바로 시작할게요. 잠실팀 참가자입니다.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박나연은 그 신호를 바로 알아채고 재치로 상황을 모면했다.
이어지는 말에 이내 객석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릴리! 릴리!
여기저기서 릴리를 아는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외쳤고 실시간 채팅창 또한 폭발했다.
-릴리 등판!
-이 순간만 기다렸다.
-오늘은 또 얼마나 예쁠까 매일 리즈 갱신하는 릴리님
-릴리 실물 본 사람?
-나. 실물도 존예임. 보는 순간 서 있는 곳을 천당으로 만들어 버림. 그냥 천사 그 자체임.
-릴리 우승 가즈아!
여기저기서 릴리를 응원하는 메시지들이 오갔다.
릴리의 영향력은 다른 참가자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관객들의 함성에 무대 밑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성현도 오랜만에 손에 땀이 고였다.
‘진심이 통했으면 좋겠는데.’
당장이라도 릴리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과 서지현이 준비한 진심이 담긴 무대를 릴리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성현은 이미 무대에서 자신의 진심을 전했고 이제 선택은 릴리의 몫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마침내 릴리가 무대에 오르자, 객석뿐만 아니라 채팅창 그리고 현장 관계자들 또한 조용해졌다.
릴리는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정면을 바라보지도 않고 약간 고개를 숙인 채로 시선은 무대 바닥을 향하고 있기까지 했다.
“야, 릴리 옷 왜 저래? 드레스 리허설 안 했어?”
“네? 분명 아까까지 풀세팅하고 있었는데.....”
“근데 지금 꼬라지가 왜 저 모양이냐고!”
“죄, 죄송합니다.”
PD가 급작스러운 상황에 옆에 앉은 스탭에게 화를 냈다.
릴리의 무대로 이번화 최고 시청률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릴리가 하고 나온 모습을 보니 이건 방송사고급이었다.
라이브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녹화를 중지하고 릴리를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스탭도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백스테이지 바로 직전에 있는 스탭에게 무선을 보냈지만 그쪽도 당황하며 시간에 맞춰 내보낼 수 없었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당황하기는 라이브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릴리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리던 팬들이기에 더욱 격한 반응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기행 같은 릴리의 행동이 퍼져 시청자 수가 늘고 있었지만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은 현상이었다.
-뭐야? 이거 드라이 리허설임? 옷이 왜 저래?
-메이크업도 안 받은 거 같은데. 이거 라이브 맞음?
-대박. 방송사고야?
이를 직접 목격한 객석도 크게 술렁였다.
뒤늦게 스탭들이 객석을 돌며 관객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릴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무대를 지켜보던 성현의 표정도 당혹감이 묻어 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릴리를 지켜보던 성현은 바로 전 무대가 서지현의 무대였기에 생각나는 게 있는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무슨 생각인 걸까요.”
성현의 옆에서 함께 릴리의 무대를 지켜보던 서지현도 당황해서 물어왔다.
성현 역시 릴리의 심정을 다 짐작할 수 없어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데 드디어 릴리가 움직였다.
엠씨도 섣부르게 무대로 올라오지 못하는 찰나, 천천히 마이크를 들어 올린 릴리는 무언가 결심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은 감더니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부디 음악으로만 평가해주세요. 제 팬이라면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릴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릴리의 말을 들은 성현은 자신의 예감이 맞다는 것을 깨닫고 이마를 짚었다.
설마 했는데 릴리는 스타로서의 틀을 깨부수기 위해 메이크업을 지우고 무대에 선 것이다.
‘진심이 통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할 거라곤......’
성현은 서지현의 무대로 자신과 서지현의 진심이 릴리에게도 전해졌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너튜브 스타인 그녀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무대에 오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항상 소속사가 시키는 대로 이미지를 지켜왔던 그녀가 모자를 쓴 채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채 무대에 오른다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성현은 릴리가 마이크를 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지켜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진심이었구나.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단 말이.’
릴리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관객들이 조용해졌다.
성현은 마이크를 꼭 쥔 손의 떨림을 보면서 충분히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진심이 관객들에게도 통했는지 객석은 조용해졌고 댓글창 역시 아까보다는 그 수가 줄어들어 모두가 조용히 릴리의 무대를 기다렸다.
성현이 서지현을 통해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면 릴리는 지금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현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해주려 하고 있었다.
잠시 마이크를 내려두고 숨을 고르던 릴리가 다시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고 첫 소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