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놀랍네요. 천소울씨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줄 몰랐는데.”
“팀원들 믿으라면서.”
성현이 너무 대놓고 놀란 티를 보이며 신기해하자 천소울은 변명하듯 한 마디 덧붙였다.
누구보다 이 서바이벌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천소울이 이런 말을 먼저 뱉는 것은 놀라운 성과였다.
항상 고고하게 혼자서 미션을 돌파해온 천소울이 이렇게 제안한다는 건 성현에 대한 믿음뿐만이 아니라 팀원들의 실력을 믿고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이죠. 천소울씨도 봤잖아요. 우리 팀 참가자들 전부 실력자들이에요.”
드디어 이제껏 쏟아부은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만 같아서 성현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성현 말에 천소울은 동의하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번 공연은 제가 메인 프로듀서로서 책임지고 준비하니까 천소울씨 없어도 이기고 남아요.”
“잘난 척은.”
천소울은 더 이상은 무리인지 성현의 호언장담에 태클을 걸었다.
그래도 좋았다.
성현은 천소울이 조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것 같아서 어떤 말을 들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잘난 척 아닌데. 저 진짜 잘하니까 천소울씨는 아지트 근처엔 얼씬도 마요. 알았죠?”
“모릅니다.”
무뚝뚝한 대답을 끝으로 엘리베이터 올라탄 천소울을 보고 성현은 피식 웃으며 뒤따라 탔다.
“못 믿겠으면 맛보기 영상 하나 보여줄까요?”
끈질기에 붙어서 묻는 성현에 천소울은 관심 없다는 듯 엘리베이터 층수만 올려다보는데 뒤이어 들리는 음악에 성현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어쩌면 내가 필요했던 건 한 줄기 구원이었던 거야 음악은 내 작은 방에 햇살처럼 왔고 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어
무시하기에는 성현의 휴대폰에서 나오는 노래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어느새 성현 옆에 바짝 붙은 천소울은 성현의 휴대폰 속 영상을 확인했다.
그곳엔 J.KIM의 노래를 연습 중인 서지현이 있었다.
“오늘 오전에 촬영한 거예요. 잘하죠?”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지금 이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성현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곧 고개를 멀찍이 떨어뜨리며 툴툴거리며 말했다.
“프로듀서는 별론데 가수가 알아서 잘하네.”
끝까지 성현을 칭찬해주긴 싫었다는 천소울의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서지현의 칭찬만 하고 입을 꾹 닫는 천소울을 보고 성현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천소울씨는 항상 솔직하지 못하네요. 우리도 포장마차 한 번 가야 되나.”
“내가 이성현씨랑 포장마차를 왜 갑니까?”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러?”
성현은 천소울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그 말에 천소울은 징그럽다는 듯이 재빠르게 엘리베이터를 나간다.
“천소울씨! 제가 아무리 좋아도 열흘간은 제 근처엔 얼씬도 마세요!”
마지막을 장식하는 성현의 말에 천소울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먼저 가버렸다.
성급하게 사라지는 그 뒷모습은 피식 웃음만 나왔다.
게임 속 캐릭터로는 미처 몰랐는데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진짜 엄청난 무대 선물해줄 테니까.”
성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
기다리던 잠실팀과의 공연 날이 되었다.
성현과 서지현은 최종 리허설을 하기 위해 일찍 공연장에 도착했다.
잠실 측은 홈 공연장인만큼 오전 일찍부터 이미 최종 리허설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오늘뿐만 아니라, 이미 며칠 전부터 계속 리허설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었다. 홈팀의 메리트라는 건 이럴 때 빛을 발했다.
덕분에 홍대 측은 잠실팀이 어떤 공연을 준비했는지 알 수 없었다.
“홍대 팀 드라이 리허설 시작할게요!”
스탭의 말에 서지현은 곧장 무대에 올라 리허설을 시작했다.
성현이 객석에서 무대를 확인하려는데 김태구가 성현 옆에 와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준비는 잘했어요?”
“공연 보시면 알겠죠.”
성현은 서지현의 무대에 집중해야 하는데 말을 거는 김태구가 거추장스러워 짧게 답했다.
그리고 지금 김태구의 얼굴을 보면 릴리가 했던 사연이 떠올라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것 같았다.
“경연이 코앞이라 그런가 조금 예민해진 것 같네요.”
“그런가요. 잠을 못 잤더니.”
김태구는 성현의 딱딱한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능청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현은 옆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무대에 집중하며 대꾸했다.
성현은 이제 릴리에 대한 사연을 알기에 김태구의 말에 대꾸도 해주기 싫었다.
그렇다고 딱히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티 낼 필요는 없었다.
결국 이 정도로 적당히 받아주는 것이 성현의 최선이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도 천소울 참가자는 안 보이던데 아쉽게 됐어요.”
홍대 팀과 잠실 팀 모두 서로 경연 순서표와 무대에 서는 가수들까지 아는 상태였는데 김태구는 천소울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적당히 김태구의 말에 대꾸를 해주던 성현은 그의 입에서 천소울이란 이름이 나오자 무대를 향해있던 시선이 처음으로 김태구를 향했다.
“천소울 참가자한테 관심이 많나 봐요.”
성현이 이전보다 더욱 싸늘해진 표정으로 묻자 김태구는 눈치 없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천소울 정도 되는 실력자를 누가 마다합니까. 우리가 이기면 천소울 가질 수도 있는 건데 미리 인사라도 해두면 좋잖아요.”
김태구는 천소울을 구원권으로 살릴 생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선 당연히 성현의 팀을 이길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자신감과 오만함이 뚝뚝 흐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장 성현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김태구의 말에서 느껴지는 오만함이 아니었다.
“천소울이 물건입니까? 갖고 싶다고 갖게?”
“아니, 말이 그렇단 거지, 진짜 오늘 예민하시네.”
김태구는 생각보다 훨씬 격한 성현의 반응에 조금 당황해서 달래듯 말을 이었지만, 성현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말 한마디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요. 방금 그 말을 듣고 나니 김태구씨가 가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겠군요.”
성현은 방금 김태구가 내뱉은 말에 천소울뿐만 아니라 릴리한테 했던 짓들까지 연상되면서 더욱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성현씨 말이 좀 심하네. 지금 질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적당히 하세요. 예?”
이런 성현의 속을 알 리가 없는 김태구는 지금 성현이 단순하게 조급해한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성현을 깔보면서 김태구가 언성을 높이자 성현은 더 이상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자 김태구는 화가 덜 풀렸는지 성현의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계속해댔다.
“이야, 천소울에 릴리까지 있으면 이번 라운드 진짜 우승도 가능한 거 아니야?”
결국 김태구의 계속되는 혼잣말에 성현은 결국 서지현의 리허설을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천소울 참가자랑 릴리씨가 있다면 최고의 무대를 만들 수 있겠네요. 그럼 전 둘을 위해서라도 미리 최고의 곡을 준비해놔야겠군요.”
“그럼, 그럼. 둘이 함께 최고의 무대를 만들 수 있지- 잠깐.”
김태구 성현의 말을 들으며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뭔가 거슬렸다.
결국 지는 건 당신이라는 성현의 소리를 뒤늦게 깨달은 김태구가 뭐라 한 마디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성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건방진 새끼. ”
김태구는 저 멀리 객석을 내려가는 성현을 향해 이를 부득 갈았다.
아니, 상관없었다.
저렇게 시건방을 떠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김태구는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에서 퇴장하는 서지현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 나쁘게 웃음을 흘렸다.
***
경연 시작 1시간 전, 잠실 측 참가자들은 무대의상, 헤어 메이크업 등을 최종 점검하며 경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잠실팀 쪽 백스테이지에서는 장비를 최종적으로 체크하고 있는 스탭들이 빠르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프로듀서인 김태구 역시 이것저것 지시하며 마지막으로 빠트린 부분이 없는지 점검에 한창이었다.
그 곁에는 주영준이 서서 조명 기사와 마지막 조정에 한창이었다.
잠실 측 첫 번째 무대는 프로듀서 김태구, 가수 참가자 릴리가 맡았다.
두 번째 무대는 주영준이 프로듀싱한 곡으로 무대를 구성했다.
주영준은 이번 오디션에 프로듀서 참가자로 지원했는데 코지한 느낌의 인디팝 그루브를 생성하는 데 강점이 있는 프로듀서였다.
한편 릴리는 안쪽 대기실에서 홀로 메이크업 받고 있는데 김태구가 들어왔다.
눈을 감고 메이크업을 받던 릴리는 거울 너머 김태구를 발견하고 눈에 띄게 표정이 굳었다.
김태구는 릴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익숙하다는 듯 그녀를 무시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다른 스탭들에게 여전히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은 연기를 하고 있는 김태구는 메이크업을 해주는 여자에게 괜히 한 번 더 부탁했다.
여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메이크업을 계속 했다.
준비 중인 릴리를 살피던 김태구가 릴리가 입고 있는 무대의상을 보더니 혀를 한번 찼다.
“옷이 이게 뭐야. 더 짧은 거 없어요?”
“네? 이것도 충분히 짧은데......”
김태구가 릴리의 옷을 보고 더 노출이 있는 옷을 찾으니 스탭들은 당황했다.
안 그래도 오늘 릴리의 무대의상이 노출이 심하다고 스탭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었다.
굳이 저렇게 입히지 않아도 충분히 비주얼로 노릴 수 있는 참가자인데 왜 저런 컨셉으로 갈까 의아해했는데 원흉은 이 사람인 듯했다.
릴리는 자신의 뒤에 들리는 실랑이에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없냐니까?”
“냅둬요. 입을 생각 없으니까.”
우물쭈물하며 도통 움직일 줄 모르는 스탭들에 답답해서 소리 지르는 김태구에게 릴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김태구는 한숨을 쉬더니 스탭들을 모두 밖으로 쫓아냈다.
대기실에 둘만 남게 되자 김태구 언제나처럼 릴리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오늘도 팬들한테 투표 부탁하는 거 잊지 말고. 알았어?”
당연하듯이 떨어지는 명령 같은 당부에 릴리는 말없이 거울만 쳐다봤다.
김태구는 살 떨릴 것 같은 릴리의 차가운 반응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런 냉소적인 태도였으니까.
김태구는 마지막으로 항상 하던 응원을 불어넣었다.
“명심해. 네가 네 할 일 제대로 안 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너 때문에 떨어지는 거야. 네가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면 팬들이 좋아할 거 같아?”
김태구는 공연을 위해 길게 늘어뜨린 릴리의 머리칼을 두터운 손으로 쓸어내리며 릴리 옆에 바짝 붙었다.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하는 김태구의 협박 같은 말에 릴리는 발끝부터 소름이 끼쳐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거울로 확인한 김태구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통했다.
아무리 고고한 척 차가운 척 자신을 쳐내려고 해도 팬들 이야기만 나오면 속수무책이었다.
거기다 소속사까지 구워삶아 놓았으니 자신이 요리하기에 이보다 쉬운 재료는 없었다.
“회사에서 여태껏 포장해준 대로 이번에도 잘하라고.”
가수를 공연 직전에 파들파들 떨리도록 만들어 놓은 김태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대기실을 나섰다.
‘지까짓 게 뭘 어쩌겠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릴리는 그렇게 길들어져 있으니까.
김태구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나간 대기실 안.
릴리는 파들거리는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움켜쥐었다.
길게 다듬은 손톱 끝이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들어 자국을 남겼지만 릴리는 그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오늘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