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미안해요.”
줄줄 흐르는 눈물이 멈출 생각이 없자 성현은 말없이 서지현에게 티슈를 건넸다.
눈물을 닦으며 감정을 추스르려 했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도무지 멈출지 몰랐다.
“진짜 미안해요.”
서지현은 아무리 닦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자 억지로 눈물을 참아보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성현은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다.
평소에 맏언니 같고 팀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던 서지현이기에 원래 성격이 단단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스스로 감정을 참고 참아왔던 거다.
“괜찮아요. 편하게 울어도 돼요.”
성현의 말에도 서지현은 편하게 울지 못했고 끝까지 눈물을 참으려 들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 하자 더 흘러넘치는지 눈물은 쉴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성현은 조용히 티슈곽을 건네주며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봤다.
‘언니라는 말에도 이렇게 무너질 정도로 묻어둔 게 많구나.’
서지현은 언니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개로 언니에 대한 미안함이 너무나 커서 늘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가슴 깊이 묻어두고 있던 것 같았다.
임하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터라 연습실에서는 항상 두 사람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곤 했다.
그런데도 서지현이 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성현은 어렴풋이 이번 경연곡에 부족한 2프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녀의 무의식이 전에 시도한 적 없었던 잔잔한 노래에서 드러나 자신도 모르게 그와 비슷한 감정을 꺼내기 두려웠기에 서지현의 노래가 정점에 다다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이 감정을 서지현씨가 음악에 담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부족한 2퍼센트도 채워질 것 같은데.’
냉정해 보일 수 있지만, 성현은 이번 일을 계기로 서지현이 가수로서 성장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프로듀서로서 가수가 무대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을 끌어내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자신이 냉정해 보일지라도, 자기 가수가 더 좋은 노래, 무대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결국 우리 삶의 언어는 음악이니까.’
서지현이 이번에 드러낸 마음 깊숙한 곳에 고여있는 아픔이 음악으로 분출되기를 원했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그건 성현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단순히 슬픔으로 끝내선 안 됐다.
성현이 생각하기에 프로듀서든 가수든 작곡가든 결국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아픔을 대중들에게 음악으로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비슷한 아픔,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스타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현씨.”
서지현의 눈물이 조금씩 멈춰갈 때쯤 성현은 그녀의 이름을 담담하게 불렀다.
서지현은 빨갛게 부은 눈을 깜빡이며 성현을 바라봤다.
“지현씨가 지금 얼마나 슬플지 저는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지금의 슬픔과 아픔을 마주했으면 해요. 아니 마주해야 해요.”
성현의 단호한 말에 서지현은 조금 놀랐다.
성현이 건네는 말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하지만 서지현에게는 어쭙잖은 위로보다 이 말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무심결에 이번 경연곡이 떠올랐다.
꾹꾹 담아두었던 감정을 차분하게 읊조리는 듯한 가사와 그에 맞춰 차분하게 가수를 감싸는 선율.
“서지현씨 음악으로 사람들 마음 보듬어줄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면서요. 아니에요?”
“......맞아요.”
“그러기 위해선 서지현씨가 먼저 스스로 감정에 솔직해져야 해요.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데 어떻게 남에게 진심을 전할 수 있겠어요.”
“…….”
성현은 서지현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가수의 길을 담담하게 제시했다.
여기까지 말한 성현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마주 앉은 서지현은 생각에 잠긴 듯 술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성현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솔직히 저도 많이 반성했어요. 당연히 서지현씨를 원래 씩씩하고 단단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보니 서지현씨는 무너져선 안 되는 사람이었던 것 같네요. 혼자서 버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성현씨......”
이어지는 성현의 사과에 서지현이 더욱 놀랐다.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반성하고 미안해하고 있단 것이 서지현에게도 느껴졌다.
“제 앞에선 무너져도 돼요. 전 서지현씨 프로듀서잖아요. 그러니까 언니에 대한 지현씨의 감정,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성현은 진심을 다해서 서지현에게 말했다.
더 이상 그녀 혼자서 마음속에 응어리를 품고 억지로 웃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서지현은 성현의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성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기다렸다.
서지현은 어느새 눈물을 멈춘 채였다.
다른 사람이 지금까지 건넸던 어떤 위로보다 지금 성현이 해준 진심 어린 말이 효과가 좋은 거 같아서 우습기도 했다.
서지현은 말없이 성현의 술잔을 채워줬다.
그뒤로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행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우리 언니는요......”
마침내 성현에게 언니와 관련된 얘기를 꺼낸 서지현은 그 감정을 마주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서지현은 종종 이유 없이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고 웃기도 했다.
그동안 성현은 말없이 앉아서 서지현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지루했죠? 생각보다 별거 없고.”
마침내 대화가 마무리됐을 때 서지현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고 코를 너무 푸는 바람에 코도 빨개져 있었다.
“서지현씨는 방금 가수 인생에서 가장 큰 장애물을 넘었어요. 분명 좋은 가수가 될 거예요.”
성현의 진지한 말에 서지현은 조금 놀라다가 이내 살짝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정말이지 이 사람은 일과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우스운 건 방금 그 말에 내내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거였다.
“성현씨도 좋은 프로듀서가 될 거예요. 방금 평생 함께 갈 좋은 가수를 얻었잖아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서지현은 짓궂게 말했다.
앞으로의 가수 인생 역시 책임지라는 말에 성현도 함께 웃고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졌다.
“지금의 감정을 잘 기억해서 이번 무대 준비하면 될 것 같아요. 사랑하는 동생만큼은 하고 싶을 걸 했으면 하는 언니의 심정. 그걸 서지현씨는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그 마음을 릴리씨한테 전달해달란 거죠?”
“네. 할 수 있겠어요?”
찰떡같이 알아듣고 성현이 하고 싶은 말까지 대신해주는 서지현에게 성현이 눈을 빛냈다.
“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그게 뭐냐는 듯 궁금해서 쳐다보자 서지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소주에 닭발 추가해주세요!”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한 두 잔이 들어가고 옛날이야기까지 꺼내놓고 보니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영 아쉬웠다.
반짝이는 눈으로 성현을 보는데 성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 상해서 안 돼요. 이만 일어나시죠.”
“제발! 아까부터 냄새 때문에 죽겠단 말이에요!”
성현이 갑자기 일어날 줄은 몰랐는지 서지현은 성현을 붙잡고 애원해 봤지만, 성현은 단호했다.
“안 돼요. 지금 이 감정 잊기 전에 연습해야죠.”
서지현의 감정도 잡혔겠다 가차 없는 프로듀서 정신이 깨어난 성현은 자신을 붙잡고 애원하는 서지현을 강제로 일으키고 누구보다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너무해.”
괜히 말 한번 잘못 꺼냈다가 시켜놓은 우동도 제대로 먹지 못한 서지현은 후회막급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먼저 포장마차 나가버리는 성현을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본선 3라운드가 시작되고서 정확히 열흘째 되는 날.
을지로 지역과의 경연이 끝나고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성현과 천소울은 함께 병원에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소울이 진료를 받으러 간다는 소식을 입수한 성현이 일방적으로 따라붙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애도 아니고. 대체 뭐가 걱정돼서 따라온 겁니까.”
천소울은 성현과 동반하는 것이 영 마뜩잖은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새였다.
“그러게 거짓말은 왜 해서 신뢰를 무너뜨려요. 제 귀로 직접 의사 선생님한테 천소울씨 목 상태 괜찮다는 말 듣기 전까진 천소울씨 말은 이제 못 믿어요.”
성현은 돌아가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겠다는 듯이 미리 선수를 치듯 말했다.
저번에 거짓말을 친 환자는 못 믿겠으니 직접 진료 결과를 듣겠다는 말이었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성현의 발언에 천소울은 기가 차서 말했다.
“당신이 내 보호자도 아니고 믿고 말고가 어딨습니까?”
“프로듀서면 보호자 맞죠.”
“이성현씨가 언제부터 내 프로듀서입니까?”
“병원 같이 갈 사이면 프로듀서 맞죠.”
“그니까 당신이 왜 나랑 병원을 같이 가냐고.”
“보호자니까?”
되돌아왔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화에 천소울은 슬슬 진심으로 짜증이 나는지 큰소리를 내려다가 병원 복도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악물고 천천히 말했다.
“아깐 프로듀서라더니 이젠 보호잡니까?”
“싫어요? 그럼 둘 다 할게요. 프로듀서랑 보호자.”
“허.”
이상한 논리에 빠져버린 천소울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는데 때마침 간호사가 천소울의 이름을 불렀다.
“천소울 환자. 들어오세요.”
“뭐해요? 안 가고?”
성현은 천소울의 이름을 듣고 자신이 먼저 나서서 진료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어이없어 성현을 노려보느라 대기실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천소울 끌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열흘은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괜찮아졌다고 무리했다간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어요.”
건조한 의사의 말에 천소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금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천소울을 놀리던 성현의 표정도 함께 어두워졌다.
“아니 두 분 표정만 보면 시한부 선고라도 내린 줄 알겠어요. 열흘만 약 먹고 쉬면 푹 나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둘의 분위가 너무 가라앉자 의사는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천소울은 낙담한 표정으로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가버렸다.
의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천소울이 나간 문을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당황해하는 의사에게 사과한 성현은 급히 천소울을 따라 나갔다.
성현이 진료실 밖으로 나가니 천소울은 낙담한 표정으로 대기실 구석에 앉아있었다.
성현은 그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둘은 계속 말이 없었다.
성현은 앞으로 천소울 없이 어디까지 무대가 가능할지 가늠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천소울이 무대에 서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어떻게 회유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내 카운터에서 처방전 발급을 위해 천소울의 이름을 외쳤다.
천소울 말없이 계산을 하고 둘은 복도로 나갔다.
말 없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천소울이 먼저 입을 뗐다.
“열흘만 더 기다려줄 수 있습니까?”
천소울 말에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보던 성현이 놀라 천소울을 돌아봤다.
천소울 성격상 먼저 이런 말을 뱉을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성현은 천소울의 얼굴을 마주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