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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82화 (82/273)

82화

-릴리씨는 어떤 음악이 하고 싶어요?

성현의 질문에 릴리는 무언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어떤 음악…?

내가 하고 싶은 음악?

이런 말을 들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니, 누군가가 해준 말 말고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언제였는지 그것조차 까마득했다.

“말해주세요. 지금 저한텐 릴리씨 답변이 가장 중요하니까.”

성현은 릴리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은 건지, 틀을 깰 정도의 절박함이 있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성현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었다.

본인의 선택이 중요한 거니까.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라.”

릴리는 중얼거리듯이 말을 흘리곤 생각에 잠겼다.

성현은 혼란에 가득 찬 릴리의 얼굴을 살펴보며 차분하게 릴리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릴리가 마침내 입을 뗐다.

“모르겠어요.”

릴리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주영준이 더 당황해서 성현을 쳐다보는데 성현은 가만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애초에 성현이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물어본 이유는 그것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정말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은 지였으니까.

당장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쉽게 말해서 지금 릴리의 상태는 재활이 필요한 환자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정답을 찾아내서 당장 일어서라고 말할 냉혈한은 아니었다.

“노래를 할 때 가장 행복했고 내가 정말 원하는 음악이 뭘까 찾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찾고 계시는 중인가요?”

릴리는 아직도 혼란스럽다는 듯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더듬더듬 자신이 음악을 시작했을 때를 설명해줬다.

성현은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릴리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것도 실패했어요. 그걸 찾기도 전에 스타가 돼버렸거든요.”

릴리는 허탈하게 말하며 성현의 얼굴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성현씨도 궁금하지 않아요? 왜 스타 릴리가 이번 오디션에 참가했는지. 다들 궁금해하던데.”

이미 얼굴이 알려진 릴리가 오디션에 참가한다 했을 때 사람들이 의아해한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미 두터운 팬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이미지만 안 좋아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들도 많았다.

성현 역시 릴리의 입장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지만 일단 가장 무난한 대답을 전했다.

“글쎄요. 실력을 확인받고 싶어서요?”

성현의 물음에 릴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찾고 싶었어요. 오디션에선 소속사 간섭없이 자유로울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방금 전, 성현이 던진 물음에 그제야 자신이 음악을 왜 시작했었는지 기억났다.

그리고 이 오디션에 나온 계기도.

이어진 기억은 오디션에 나와서 얻은 자유도 릴리가 구하고자 했던 해답도 아니었다.

끝없는 억압과 통제.

그 속에서 릴리는 자신의 해답을 구할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고, 무얼 찾고자 했는지도 점차 잊어갔다.

릴리는 말을 멈추고 주영준을 쳐다봤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주영준을 잠시 본 릴리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김태구 대표가 절 관리하기 시작했어요. 소속사 대행이란 명분으로.”

“그럼 버스킹 공연도 김태구 대표의 압력에 의한 공연이었나요?”

성현은 방금 전 버스킹 영상을 언급했을 때 더 시니컬하게 변했던 릴리의 변화를 기억해내고 물었다.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속사는 제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저 절 이용해서 돈을 벌어들일 생각만 하고 있지. 김태구 대표도 똑같아요. 절 이용해서 오디션에 올라갈 생각만 하고 있지 제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진 중요하지 않아요.”

“왜 거절하지 못했던 거예요? 김태구 대표가 릴리씨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어요.”

밀려오는 답답한 마음과 함께 이제 성현이 더욱 화가 나서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 대답한 건 릴리가 아니라 주영준이었다.

“협박했어요.”

주영준 말에 성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협박이라니? 뭘 가지고?

“처음엔 싫다고 했어요. 이런 식이면 오디션에서 하차하겠다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저 때문에 참가자들이 전부 떨어질 거라고 협박했어요. 결국엔 사람들이 전부 절 미워하게 될 거라고......”

릴리의 말은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고 떨림이 느껴졌다.

그 말에 성현은 릴리가 왜 김태구의 말을 따라야 할 수밖에 없는지 간파할 수 있었다.

‘스타라는 틀. 그걸 깨지 못하고 있는 거야.’

스타가 공인이다 아니다는 아직도 논란 중에 있지만 확실한 건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일반인들에 비해 엄격한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받는다는 거다.

그리고 그건 릴리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에게 향할 손가락질이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는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릴리로 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을 터였다.

김태구는 오디션 내에서 릴리가 미움받는 것을 무서워하는, 착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사는 성향을 간파했고 그걸 이용해 압박했을 것이다.

“이젠 제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어떤 노랠 들려주고 싶은지 생각도 안 하게 됐어요.”

릴리는 말로 내뱉고 나니 자신의 처지가 더 생생하게 느껴진 듯 처음 성현을 경계하며 똑바로 쳐다봤을 때보다 어깨가 처져 있었다.

그런 안쓰러운 모습에 옆에 앉아있는 주영준도 마음이 좋지 않은지 안색이 흐려졌다.

‘가면을 쓴단 걸 알면서도 그 가면을 벗을 수 없었고 결국 지금의 릴리가 된 거겠지.’

성현은 릴리의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게임을 통해 릴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노래를 했는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현은 알고 있었다.

현실 속에서 그녀는 오디션을 통해 인기 스타가 아닌 아티스트로서 성장할 수 있음을.

‘게임 속 릴리처럼 행복한 음악을 하면 좋겠어.’

주영준의 말처럼 프로듀서로서 가수가 행복한 음악을 하게 하는 건 당연한 거였다.

성현은 릴리를 어떡해서든 도와주고 싶었다.

“도와줄게요. 릴리씨가 원하는 음악 할 수 있도록.”

성현의 말에도 릴리의 표정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릴리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방금 성현의 말에 체념한 듯한 표정에서 날카로움이 서리고 있었다.

이성현 역시 자신을 스타로 보고 접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경계를 아직 가지고 있는 듯했다.

“왜요? 이성현 대표도 저한테 원하는 게 있나 보죠?”

“네.”

이렇게 쉽게 인정할 줄 몰랐던 성현의 쌈박한 대답에 릴리는 역으로 당황했다.

성현은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릴리를 보고 싱긋 웃었다.

“노래요. 노래로 보답해주세요.”

“......노래요?”

“네. 이번 경연에서 아무 노래 말고 릴리씨가 진짜 하고 싶은 노래 불러주세요. 전 그거면 됩니다.”

성현의 제안에 릴리는 당황했다.

당장 하고 싶은 노래가 뭔지 갈피가 안 서기도 했지만, 경연 상대팀의 대표의 말이라고는 믿기 힘든 성현이 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저 말이 장난 같기엔 너무나 진심 어린 표정이었다.

정말로 경쟁 지역 참가자를 도와주겠다고? 그것도 원하는 것도 없이?

“진심이세요? 무슨 생각인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저 역시 이번 경연에 제 진심을 담은 음악을 할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의 진심은 무대를 통해 보여주는 걸로 해요. 저도 릴리씨도.”

릴리는 봐주지 않겠다는 성현의 말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릴리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성현은 시계를 봤다.

너무 지체했다. 성현은 급히 갈 채비를 했다.

“제 진심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건 릴리씨의 몫이겠죠.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성현은 거기까지 말하고 릴리와 주영준에게 인사를 건넨 후 카페를 나갔다.

이성현이 자리를 뜨고도 릴리는 넋이 나간 듯이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음악으로 진심을 보여주겠다고…?’

***

황급히 홍대 아지트로 돌아온 이성현은 곧장 서지현을 찾았다.

릴리에게 선전포고 아닌 선전포고를 한 이상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서지현은 연습실에서 경연곡 연습이 한창이었다.

성현은 서지현이 부르고 있는 곡을 확인하고 바로 재생되고 있던 곡을 중단시켰다.

갑자기 끊긴 반주에 놀란 서지현이 성현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폭탄 발언이 날아왔다.

“경연곡 변경할까 해요.”

“네? 갑자기 왜요?”

“그건 이따가 설명드릴게요. 일단 노래부터 들어볼래요?”

“네. 좋아요.”

서지현은 성현의 실력을 믿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하기에 곡을 변경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현은 서지현의 선선히 동의해주자 곧장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을 들려줬다.

곡은 J.KIM이 주로 하는 댄스곡이나 힙한 곡이 아니라 그의 수록곡 중, 진성 팬들만 아는 잔잔한 곡이었다.

그의 전 앨범 통틀어 거의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잔잔한 곡이었다.

성현은 이 곡이 주는 잔잔한 분위기와 함께 가사가 필요했다.

“경연인데 이런 곡을 불러도 돼요?”

서지현이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시청자 투표다 보니 임팩트가 중요했다.

괜히 경연 프로그램에 나온 가수들이 고음 위주의 노래를 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인상을 깊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고음파트였다.

고음이 인상적이라며 경연 순서상 불리하다는 앞 순서여도 메리트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서지현의 질문에 성현은 자세히는 아니지만 릴리의 사연을 들려줬다.

“아까 물어봤죠. 왜 갑자기 경연곡을 바꾸려 하는 건지. 개인 프라이버시라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지만 릴리씨는 이번 오디션에서 본인이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찾고자 했어요. 그런데 그게 실패하면서 현재 음악에 대한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 처음 듣는 얘기예요.”

서지현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버스킹 영상 속 릴리만 봐왔기에 그녀가 어떤 음악적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남몰래 응원하고 선망하던 릴리의 안타까운 사연이 서지현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서지현이 보던 화면 속 릴리는 언제나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무대는 릴리씨가 다시 음악에 대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목적이에요. 물론 승리하는 것도 당연한 거구요.”

성현의 말에 서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릴리의 상황이 안타까웠고 어차피 무대를 준비하는 김에 릴리를 위해 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오히려 서지현은 경영만 아니라면 릴리를 전적으로 응원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릴리와 자신의 경연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진심. 진심을 담은 무대를 해야겠네요.”

바로 튀어나온 서지현의 말에 성현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과 오래 합을 맞춰온 서지현은 이제 거창한 설명이 없어도 자신이 가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캐치할 수 있게 되었다.

성현은 뿌듯한 마음에 웃으며 파이팅 넘치게 말했다.

“역시 서지현씨네요. 바로 연습 시작할까요?”

“네!”

서지현은 굳은 각오로 빛나는 얼굴을 하고 헤드폰을 썼다.

성현은 울려 퍼지는 가사를 들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노래를 시작하는 서지현의 음성에 주목하는 성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성현 측에서 먼저 경연 신청을 하지 않는 한, 경연까지 남은 시간은 1주일.

그동안 릴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 경연에서도 이길 수 있는 무대를 완성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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