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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81화 (81/273)

81화

자신을 찾는 사람이 릴리와 관련 있다는 말에 성현은 빠르게 아지트를 나갔다.

‘그 사람이 왜 날 찾아온 걸까.’

릴리에 관한 얘기를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잠실 공연장에서 마주쳤을 때, 몇 마디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대화를 나눈 것이 다였다.

아지트 맞은편 카페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성현이 나온 걸 보고 담뱃불을 끄고는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카페로 들어가는 남자를 보고 성현은 카페로 따라 들어갔다.

“커피 뭐 드실래요?”

“괜찮습니다. 연습 중에 나온 거라 금방 가봐야 해서.”

릴리의 소식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 남자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팀원들에게 아직 제대로 브리핑을 해주지도 못했다.

최대한 빠르게 이야기를 듣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라떼 괜찮죠?”

“네?”

성현의 금방 가봐야 한다는 말에도 남자는 태연하게 라떼를 두 잔 시켰다.

남자의 태도에 당황해서 성현이 묻자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주문하고 결제를 마친 후 대답했다.

“얘기가 길어질 거 같아서요.”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정면으로 본 남자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프로듀서 참가자 주영준입니다.”

“이성현입니다.”

짧게 통성명을 한 둘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거죠?”

성현의 질문에 주영준은 쉽게 입을 떼지 못하며 연거푸 커피만 들이켰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는 건가.’

성현은 그런 그를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가 말하기 어려운 일이란 것이 혹시나 릴리와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재촉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습니다.”

성현의 진심 어린 말에 주영준은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입을 뗐다.

“릴리에 관한 이야기에요.”

‘역시 릴리한테 뭔가 일이 생긴 거구나.’

성현의 짐작이 맞았다.

저번 잠실 공연장에서 본 릴리의 어두운 표정.

성현이 알고 있는 릴리는 원래 그런 가수가 아니었다.

성현은 주영준의 표정을 보고 릴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눈치챘고, 진지하게 주영준의 말을 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영준은 성현의 태도를 보고 결심했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자세히 알진 못해요. 이것도 김태구 대표랑 다니면서 주워들은 이야기입니다.”

주영준은 조금 망설이면서 릴리의 상황에 대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릴리네 소속사 아시죠? DAU.”

“들어보긴 했습니다.”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하고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설정이었다.

DAU는 주로 인터넷 방송을 하는 1인 크리에이티브들의 소속사로 릴리 말고도 유명 스트리머들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었다.

“거기가 MCN 치고 소속 아티스트 관리가 빡세거든요. 릴리도 그중 하나고. 오디션 내내 소속사에서 이것저것 간섭을 했나 봐요. 음악은 물론이고 의상, 헤어, 무대 구성, 멘트까지.”

MCN. 다중 채널 네트워크.

주로 인터넷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방송활동을 지원해주지만, 연예인 기획사와 다르게 관리가 심하진 않았다.

그런데 멘트까지 관리한다는 것은 보통 MCN과는 확실히 달랐다.

사방을 조여오는 극심한 간섭 속에서 릴리는 점차 입을 닫게 됐을 것이다.

성현은 릴리의 속내를 짐작해보려 노력하다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MCN이면 이번 오디션에 스폰서 자격이 안 되지 않나요?”

일반 연예 기획사도 아닌 곳에서, 쟁쟁한 스폰서한테만 공개되는 더 넥스트 슈퍼스타 영상을 접하지 못했을 텐데, 릴리를 이 정도까지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릴리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소속 스트리머를 관리한다는 거지?

이 질문에 주영준은 조금 고민하다가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저희 잠실 대표, 김태구 참가자요. 그 사람이 릴리를 관리하고 있어요.”

더 이상 경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주영준은 지금까지 우선 자신이 이 서바이벌 오디션에서 올라가는 것에만 급급해서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 이상 릴리의 상황을 모른 척하고 있기는 힘들었다.

한 가수를 이 정도까지 몰아붙이는 것을 옆에서 보고 가만히 있기에는 프로듀서로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주영준이 성현을 찾아오려고 결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관리라면 김태구 대표가 릴리를 통제하고 있단 뜻인가요?”

“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고 본선 2라운드 때부터 계속 릴리 주위를 맴돌았어요.”

본선 2라운드부터?

성현은 생각보다 오래된 기간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우리 팀을 이끌고 본선에 오를 생각만 하느라 게임 속 다른 캐릭터들은 성현이 원래 알고 있는 시나리오대로 순조롭게 올라오고 있을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또 다른 변수가 있었다.

“김태구 그 사람도 DAU 소속사인가요?”

“그건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는 건 확실해요.”

주영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말해놓고도 딱히 성현에게 보여줄 증거가 없기 때문인지 말하고 나서 바로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성현에게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서 표정이 어두웠던 건가.’

이제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김태구가 릴리가 하는 행동과 음악 모두를 사사건건 통제하고 관리하려 들었기에 그녀의 표정이 밝지 못했던 거다.

주영준이 깨닫고 성현을 찾아올 정도라면 성현이 혼자 넘겨짚은 것이 아닐 것이다.

“김태구 대표 그 사람 때문에 릴리가 점점 오디션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려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고. 솔직히 지금 여기서 이런 얘길 하는 게 맞는지도 아직 모르겠어요. 어쨌든 둘 중 한 지역은 탈락되는 경연 상황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길 온건,”

주영준은 여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들어 성현을 똑바로 보며 그때의 일을 다시 회상하며 말했다.

“이성현씨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릴 맴돌았어요. 음악 할 때 행복한 건 당연한 게 아니냐는 말이요.”

음악 할 때 행복한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행복하기 위해 음악을 해야 한다.

주영준이 짚어주듯 일러주는 말에 성현은 그제야 자신이 그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자신에겐 너무 당연한 말이라 기억에서 잠시 지웠던 말이었다.

“지금까지 음악을 해오면서 항상 스스로한테 물어왔어요. 음악을 왜 하고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그런데 어제 이성현씨 말을 듣고 진짜 제 속마음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전 프로듀서로서 제가 좋아하는 가수가 행복한 음악을 하게 만들고 싶어요. 꼭 제 곡이 아니더라도 음악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주영준이 토해내는 열변을, 성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음악을 하는 동안은 모두가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기에 지금 주영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릴리가 가수로서 행복한 음악을 하면 좋겠어서.”

마지막 말에 음악을 대하는 주영준의 진심이 느껴졌다.

주영준의 이 말은 성현의 마음과 흡사한 구석이 많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성현은 릴리도 주영준도 모두 도와주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사연을 안 이상 릴리가 망가지는 걸 보고만 있기 싫었다.

그녀의 음악을 현실에서도 제대로 듣고 싶었다.

“혹시 릴리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아서요.”

성현의 말에 주영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솔직히 주영준은 도박을 건 셈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자리였다.

어쨌든 경쟁 지역인데 성현이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설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자릴 마련해보겠습니다.”

주영준은 기뻐서 바로 대답했다.

자신으로서는 망가져 가는 릴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희망이 생긴 것이다.

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영준의 연락처를 물어왔고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은 둘은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 오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한 골목길의 작은 카페에 주영진이 릴리를 데리고 나왔다.

릴리는 주영준에게 잠시 바람도 쐴 겸 본격적으로 무대를 준비하기에 앞서 여유를 갖자며 그녀를 끌고 나온 참이었다.

주영준의 연락을 받고 성현이 카페로 들어왔다.

성현은 바로 릴리를 알아보고 주저 없이 그 테이블로 향했다.

“반가워요. 홍대 대표 이성현입니다.”

게임에서만 보던 릴리를 현실에서 만나자 반가운 마음이 앞선 성현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성현을 전혀 알지 못하는 릴리는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와 타지역 대표라고 소개하는 성현을 경계했다.

“홍대 팀 대표가 절 왜 보자고 한 거죠?”

릴리는 성현이 아니라 옆에 앉아있던 주영준에게 뾰족하게 물었다.

평소 자신에게 친절했던 주영준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따라나온 건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는 듣지 못했다.

“며칠 전에 대화를 좀 나눴는데 음악에 대한 생각도 깊고 얘기가 잘 통할 거 같아서요.”

주영준의 말에도 릴리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성현을 탐색하듯 바라봤다.

자연스레 릴리의 앞에 자리한 성현은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버스킹 영상 잘 봤어요. 스타성이 엄청나던데요?”

“좋게 봐줬다니 고마워요.”

릴리는 성현의 칭찬에 고맙단 말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요즘 제일 인기가 많은 그녀의 영상을 언급했음에도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조회수 300만 넘는 거 쉬운 일 아니에요. 그런 대단한 일을 한 사람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요?”

릴리를 떠보듯 묻자 릴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버스킹 영상에서 릴리는 어딘가 음악을 즐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에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릴리의 모습을 본 성현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하고 말을 이었다.

“대단한 게 맞는 건지 모르겠네요.”

“하긴. 릴리씨 정도 되는 사랑받는 스타는 조회수 1000만은 넘겨야 만족스러운 거겠죠?”

“그 뜻이 아니에요.”

“그럼요?”

일부러 모르는 척 되묻자 릴리는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툭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릴리라는 만들어진 스타예요. 제 진짜 모습이 아니라. 전 그냥 스타라는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랑 다를 바 없어요.”

“그럼 틀을 깨면 되잖아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쏟아지는 릴리의 말에 성현은 단순하게 대꾸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는 듯한 성현의 말에 릴리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거세게 반발했다.

“그게 쉬운 줄 아세요? 사람들은 제 진짜 모습이 아니라 방송에서 보여주는 릴리라는 스타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깼을 때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겠죠.”

“아닐 수도 있죠. 그러다 전부 절 떠나가면 진짜 제 모습마저 잃게 될 거고.”

성현은 지금 릴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을 알아챘다.

릴리는 지금 구석에 몰린 연약한 동물처럼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성현은 릴리의 두려움이 뭔지 알았고 그런 두려움을 가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당장 릴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이것만 해결된다면 본래 음악을 사랑하던 릴리는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릴리가 현재 음악에 대한 열정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럼 릴리 씨는 어떤 음악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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