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성현이 건물 앞에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진행요원이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사람이 먼저 도착해서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을지로 대표 박성훈입니다.”
호탕하게 생긴 남자가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홍대 대표 이성현입니다. 반갑습니다.”
성현은 남자와 악수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성현의 이름을 들은 박성훈은 조금 의아하단 표정으로 살짝 인상을 썼다.
성현은 그런 박성훈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쪽을 유심히 바라보던 박성훈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홍대엔 천소울이라고… 가수 참가자가 있지 않나요?”
박성훈 입에서 갑자기 천소울의 이름이 나오자 이번엔 성현이 의아해서 그를 쳐다봤다.
“천소울 참가자는 왜요?”
성현의 물음에 박성훈은 아차 싶었는지 다급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그 참가자를 인상 깊게 봐서요. 그, 뭐냐, 맞아. 버스킹 무대! 그게 너튜브에서 화제였잖아요. 실력이 상당해서 당연히 홍대 대표일 거라 생각했는데......”
박성훈은 말끝을 흐리며 성현의 얼굴을 살피며 눈치를 봤다.
천소울이 홍대팀 대표로 오길 기대했나?
성현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게임 플레이대로라면 주인공인 천소울이 대표가 되곤 했으니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은근슬쩍 뭔가를 더 물어오기까지 했다.
“흠흠, 그… 천소울 참가자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박성훈은 뭔가 떠보려는 듯이 성현의 얼굴을 살피며 물어왔다.
안 그래도 껄끄러웠는데 이 질문으로 성현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소울에 대한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해야 했다.
물론 정말 천소울이란 아티스트에게 관심이 있어 묻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천소울이 대표가 아닌 것만으로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추측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성현은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가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의중을 살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일단 박성훈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기에 당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박성훈에게 괜한 힌트를 줄 필요는 없었다.
“아니요. 천소울 참가자가 저한테 양보했어요. 개인적으로 신세 진 게 있어서.”
“그렇군요. 그럼 뭐 문제없는 거죠?”
“네. 지금도 홍대 아지트에서 연습 중인데 궁금하시면 영상통화라도 하실래요? 노래 듣고 싶으신 거죠?”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문제없다니 다행이네요.”
이쪽에서 먼저 강하게 나가자 박성훈은 손을 막 내저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표정이 뭔가 묘했다.
성현이 뭔가 말을 더 던지면서 그의 표정을 살피려고 하는데 이내 문이 열리더니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성현은 재빠르게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잠실 대표, ‘그녀’를 만날 차례였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잠실 대표 김태구입니다.”
낮은 목소리와 함께 수더분하게 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방금 방에 들어선 남자, 김태구는 먼저 도착한 성현과 박성훈에게 사과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성현의 눈이 커졌다.
‘잠실 대표라고?’
이건 예상 밖이었다. 성현이 알던 게임 속 잠실 대표는 김태구가 아니었다.
잠실 측 대표는 분명 ‘그녀’였어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그녀.
그런데 지금 자신이 생각했던 그녀가 아니라 웬 남자가 잠실 대표라고 툭 튀어나왔다.
‘게임 시나리오가 바뀌었어.’
의아함도 잠시 성현은 냉철하게 지금 상황을 판단했다.
게임 속 알고 있던 상황이 달라진 것이니까.
지금까지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 말고는 성현이 예측한 대로 흘러온 오디션이었다.
변수가 생기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당장 현재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일단 상황을 더 지켜봐야겠어.’
성현이 다짐하는데 방에 진행요원이 들어왔다.
이 대기실에도 카메라는 설치되어 있다.
실시간으로 대표들이 방 안에 모인 것을 확인한 주최 측이 공지를 전달하려고 보낸 것이다.
“각 지역 대표분들 모두 모였으니 추가 공지사항 말씀드리겠습니다.”
진행요원 말과 동시에 프로젝터가 켜지더니 경연이 벌어질 장소와 경연 구도가 떴다.
[ 홍대 홈 공연장 경연 : 홍대 지역 vs 을지로 지역 ]
[ 잠실 홈 공연장 경연 : 잠실 지역 vs 홍대 지역 ]
[ 을지로 홈 공연장 경연 : 을지로 지역 vs 잠실 지역 ]
“경연 구도는 보시다시피 이미 주최 측에서 정해놨습니다.”
덤덤한 진행요원의 말에 성현을 비롯한 각 지역 대표들이 프로젝터를 확인했다.
‘홍대는 을지로구나.’
성현은 을지로 대표인 박성훈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저쪽은 비슷한 생각 중일 것이 분명했다.
홍대 홈 공연장에선 을지로 측과 경연을 해야 한다.
즉 성현의 홍대팀에 대결 신청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을지로 지역이란 뜻이었다.
반대로 성현의 홍대 지역이 대결 신청을 할 수 있는 지역은 잠실 지역이었다.
“경연 순서는 따로 없으며 먼저 경연 신청을 하는 팀부터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먼저 경연 신청을 하는 각 지역 팀원들에겐 1000캐시의 보상이 지급됩니다.”
‘결국 여기서부턴 눈치 싸움인 건가.’
먼저 대결 신청을 갈지 홈팀에 기다리고 있을지 그건 어디까지나 대표들의 선택이었다.
여기서부터 대표의 권한이 드러난다.
단순히 하나의 팀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팀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앞으로도 성현에게 주어질 것이다.
성현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천 캐시를 받고 두 번 대결을 할지 기다리고 있다가 한 번의 승리로 2차 대결로 올라갈지.
“만약 2주간 어떤 대결 신청도 없을 경우 주최 측에서 첫 경연 지역을 결정하게 되니 이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어서 각각 세 지역에 배정된 가수를 발표하겠습니다.”
요원의 말에 이번엔 프로젝터에 세 지역에 배정된 가수들이 한 번에 발표됐다.
[ 홍대 측 가수 : J. KIM ]
[ 잠실 측 가수 : 라라스윗 ]
[ 을지로 측 가수 : 윤진서 ]
‘역시 J.KIM이 맞네. 정보가 틀린 건 아니었어.’
박성훈은 프로젝터를 확인하고 남몰래 미소 짓고 있었다.
***
모든 공지사항을 듣고 돌아가는 차 안.
성현은 고급스러운 차 내부에는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른 지역들의 대표들을 만나고 온 다음부터 한 가지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분명 천소울 상태를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박성훈이라는 을지로 대표의 반응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같은 지역도 아닌 참가자가 천소울의 상태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양새였다.
단순히 유력한 우승후보라서?
그러기에는 박성훈의 어투나 행동거지가 다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잠실 대표란 김태구란 남자도 수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잠실 지역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설마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이유로 ‘그녀’가 아니라 김태구가 대표가 되었을까?
홍대에서도 천소울 대신 자신이 대표가 되었던 것처럼 잠실 지역에도 무언가 변수가 더 생겼을 수도 있었다.
둘에 대해 생각하던 성현은 다시금 처음의 고민으로 돌아왔다.
결국 박성훈이 무언가 짐작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천소울의 상태.
성현은 아무래도 천소울의 목 상태가 걱정됐다.
“김인호 AD님.”
성현의 물음에 잠시 쪽잠을 자고 있던 김인호가 벌떡 일어난다.
성현이 공지사항을 듣고 오는 동안 비는 시간에 따듯한 차 안에서 노곤해진 탓이었다.
“왜. 왜요. 또.”
성현과는 다르게 전혀 긴장감 없는 모습이었다.
성현은 김인호 역시 앞으로 함께 갈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예선전에서부터 성현과 동료들을 지켜본 사람이고, 김인호와 유대를 쌓아 방송에 좋게 나오는 것이 앞으로 오디션을 진행해나가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아까 말씀드렸던 거요. 천소울씨 목 상태. 만약 진짜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맞다. 그거 진짜예요? 진짜 문제 있는 거 맞아?”
김인호는 성현이 다시 꺼낸 ‘천소울’이라는 이름에 잠이 확 깬 듯 다급하게 성현을 붙잡고 물었다.
성현은 슬쩍 몸을 비틀어 그런 김인호를 피하며 대꾸했다.
“확실한 건 아닌데 확인차 물으려는 거예요.”
성현의 말에 김인호는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한숨을 내뱉는다.
오디션에서 중간에 가수의 상태가 안 좋아진다?
그걸 감안하고 봐줄 심사위원은 없었다.
더욱이 그걸 다 이해해줄 시청자들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냉정하게 볼 때 천소울은 아직 데뷔를 가진 가수도 아닌 한낱 가수 지망생일 뿐이었다.
방송이 시작된 것도 아니기에 한국에서 힘이 실리는 팬덤도 아직 형성되기 전이다.
“아무래도 빠지게 되겠지.”
자신이 말하면서도 아쉬워 죽겠다는 김인호 말에 성현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빠지게 될 거란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현의 얼굴이 너무 심각해지자 김인호가 애써 그를 위로해 줬다.
“에이, 표정풀어. 나도 확실한 건 아니야. 아마 홍대 담당 PD님이랑 조율을 해봐야 알 것 같아요.”
김인호 말에 성현은 낮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성현은 시크릿 스테이지 때에도 천소울의 녹화분을 따로 요청해서 달라고 할 정도였다.
둘이 많이 친한가?
김인호는 예선전에서 성현이 천소울이 있던 채널에 침입했었던 일까지 기억해내고 더 말을 덧붙였다.
아쉽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홍대팀에서 이성현, 천소울 구도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할지 뻔한데,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진짜 목에 문제 있는 거면 일단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은근히 흘리는 김인호 말에 성현은 무언가 돌파구 있지 않을까 생각에 잠겼다.
본선 3라운드는 곧 시작된다.
하지만 경연의 기간은 넉넉하다.
지금 승부수를 던져볼 만했다.
천소울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성현은 그를 위해 해놓을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놓을 생각이었다.
보험을 들어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최흥철 담당 PD님 만나 뵙고 싶어요.”
성현은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
아지트에 도착한 성현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곧장 김인호AD의 안내로 최흥철 PD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김인호는 설마 설마 했지만 성현이 냅다 메인 PD를 만나게 해달라고 할지는 몰랐다.
자신이 뱉어놓은 말이 있어서 최흥철에게 전화를 하긴 했지만 받아들여져서 천만다행이었다.
“대충 면담 신청이라고 말씀은 드려놨으니까 바로 들어가면 돼요.”
“감사합니다.”
김인호는 그렇게 말하며 내심 성현이 안에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눈치였다.
성현은 김인호의 기색을 무시하고, 고개 한번 끄덕이고는 최흥철 PD가 있는 방에 노크를 했다.
문이 열리자 책상에 앉아 있던 최흥철 PD는 성현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손짓했다.
“참가자가 면담 신청을 다하고.”
원래 같았으면 당연히 거절했을 사안이었다.
오디션 중간에 메인 PD를 찾아오는 참가자가 있을 리 없으니까, 있어서도 안 됐다.
그에게 있어서도 성현은 흥미로운 참가자였기에 김인호에게 한번 데려오라고 한 것이었다.
최근엔 시크릿 스테이지에서 1등을 했단 소식을 듣고 더욱 관심이 가기도 했고.
다른 지역과 경연을 앞두고 성현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슬쩍 들을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성현은 자리에 앉으며 최흥철 PD에게 지체 없이 곧장 물었다.
“참가자 중에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참가자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건 왜 묻는 겁니까?”
“팀 에이스한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에이스?
밑도 끝도 없는 성현의 말에 최흥철은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홍대팀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을 때 성현이 말하는 팀의 에이스가 누군진 자명했기 때문이다.
천소울이구나.
저 말은 지금 당장 홍대팀을 이끌어나갈 성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채널을 담당하는 최흥철한테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단 뜻이기도 했다.
천소울은 채널에서 가장 밀어주고 있는 참가자였다.
최흥철은 성현의 면담 요청을 승락한 자신에게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본선 3라운드가 시작되고 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 더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참가자에 관한 권한은 각 지역 대표한테 있습니다. 3라운드가 진행되는 동안 한 번 이상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는 규칙만 지키세요. 규칙을 어길 시 자동 탈락처리 되니까.”
최흥철은 더 이상의 부연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계산을 마친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성현에게 전했다.
성현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당장 시간은 벌었어.’
혹시라도 천소울에게 문제가 생겼다 해도 당장 탈락이 아닌 건 확실해졌다.
제대로 된 보험이 생겼다.
“감사합니다.”
성현 역시 긴말은 하지 않고 꾸벅 인사했다.
PD의 방을 나가는 성현의 발걸음은 전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천소울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