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65화 (65/273)

65화

이곳이 오디션 안인지, 냉동고 안인지.

분위기가 살얼음판 그 자체였다.

주선아는 추위를 타는 것처럼 몸을 덜덜 떠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 역시 진동이 울리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임하나 역시 긴장하긴 마찬가지.

그녀들 앞에 앉은 세계적인 프로듀서, 모건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모건은 우선 주선아부터 관찰했다.

그녀는 살짝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거기에 주선아와 임하나는 모두 춤을 선보이려는 듯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또 군무야? 아무리 K-POP 군무가 대단하다지만.’

앞선 참가자들은 거의 대부분 팀을 이루어 K-POP 특유의 칼군무를 보여줬다.

허나 그것이 끝이었다.

전혀 신선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너무 많이 본 탓에 식상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노래에 집중하려 하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쇳소리가 퍼졌다.

이러니 마지막은 제발 다른 장르를 해줬으면 했는데.

모건이 K-POP에 질색을 하는 사이, 주선아와 임하나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가뜩이나 모건의 심기가 좋지 않은데 실수 한 번이라고 하게 되면 그대로 끝.

주선아와 임하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내, 그녀들은 마음을 다잡았는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성현이 곡을 틀며 무대가 시작됐다.

‘눈빛 봐라.’

방금까지 발을 삐끗하며 얼어있던 주선아, 그리고 옆에서 함께 굳어있던 임하나.

표정만 봐서는 이미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무대가 시작되자 180도 바뀐 둘의 눈빛.

덕분에 모건은 그녀들이 춤을 추기도 전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었다.

“난 네가 보란 듯 무너졌어. 바닥까지 떨어진 내가 널 붙잡겠다고 손을 뻗어봐도 다시 캄캄한 어둠 속에.”

노래의 첫 소절을 담당한 임하나의 보컬이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임하나 특유의 끈적임 있는 음색에 심사위원들 모두 절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잠이 솔솔 느껴지던 모건도 그녀들의 공연에 점차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음색이 내 스타일인데.’

모건은 다른 참가자들에게서 느낄 수 없던 음색에 흥미가 생겼다.

그녀의 보컬은 미국 가수 빌리 아일리시가 떠오를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모건은 외국적인 음색에 흥미가 생기는지 몸을 조금 앞으로 당기며 노래를 들었다.

짧았던 임하나의 파트가 끝나자 주선아의 보컬이 뒤를 이었다.

“네가 아무리 비웃어도 난 웃으며 이곳에.”

그루브가 있는 끈적한 임하나의 보컬과 상반되는 깨끗하고 힘 있는 보컬이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모건은 묘한 조화를 느끼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귀를 능글맞게 간지럽히며 그 맛에 중독되게 했다가 시원하게 씻겨주는 느낌이 정신을 더욱 빠져들게 했다.

그녀들은 각자 한 소절씩 노래를 주고받으며 무대를 꾸며나갔다.

음악은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심사위원들에게도 이미 알려진 곡이었지만, 전혀 다른 느낌으로 해석이 되었다.

무대는 어느덧 중반을 향해 달려갔다.

그때, 흘러나오던 반주 소리가 점차 줄어들면서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는 듯했다.

또 다시 분위기가 전환되자 심사위원들은 더욱 집중하며 무대를 지켜봤다.

그 순간, 주선아가 앞으로 치고 나오더니 독무를 추기 시작했다.

‘군무일 줄 알았더니. 재밌네.’

주선아는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군무를 선보일 것이란 걸 눈치채고 독무를 따로 만들었었다.

그녀는 사랑에 배신당한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연약함이 느껴지면서 감정에 얽매어있는 그녀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허나 모건은 다른 곳에 더욱 시선이 갔다.

무대 시작 전에 180도 바뀐 눈빛에서부터 알아봤다.

모건은 눈빛에서 나오는 주선아의 표정 연기에 그대로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선아의 독무가 끝나자 곧바로 임하나의 독무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주선아가 표현력을 강조했다면 임하나는 본연의 춤꾼 기질을 선보였다.

힙합과 어우러지는 힘이 넘치는 안무에 유연성까지 뛰어났다.

거기에 쉬워 보이면서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고난도의 댄스 스킬까지 사용했다.

그러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게 강약 조절까지 완벽히 해냈다.

‘저 참가자는 당장 미국 데려가서 댄스 오디션 참가시켜도 되겠는데.’

전까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모건은 자기도 모르게 턱을 괴던 손을 풀었다.

주선아와 임하나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것이다.

같으면서 다른, 그녀들만의 파워풀함과 부드러운 모습을 전부 한 곡 안에 그대로 녹아들게 했다.

각자의 능력을 모두 보여준 독무가 끝이 나고, 이내 원래의 멜로디라인으로 돌아왔다.

군무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전 참가자들도 합이 잘 맞는 군무를 보여줬지만, 이 둘의 군무는 달랐다.

어찌나 전개 방식이 새로웠는지, 더 이상 군무를 보기 싫다던 모건마저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노림수가 있는 친구네.’

만약 앞선 독무가 없었다면, 모건이 극도로 혐오한 뻔한 무대가 되었을 거다.

그러나 전혀 다른 느낌의 독무들을 보고 하나로 뭉쳐진 군무를 보니 무척이나 색달랐다.

다른 색깔의 물감을 섞어서 완전히 다른 색을 만들어낸 것과 같았다.

그녀들의 독무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뿐만 아니었다.

모건이 댄스 다음으로 집중한 것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편곡된 곡이었다.

인트로 때까지 모건은 알지 못했다.

독무 이후 원곡의 멜로디라인이 흘러나오자 그때서야 모건도 지금의 곡이 어떤 곡을 편곡한 건지 눈치챌 수 있었다.

‘구성을 완전히 바꿨어.’

원곡은 빌보드에도 올랐던 곡인 만큼, 모건 역시 아는 노래였다.

성현은 그것을 기존의 곡과 완전히 다르게 구성해냈다.

둘의 군무가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구성 순서의 바뀜 덕이 컸다.

또한, 힙합적인 베이스에 EDM을 섞어 기존에 알고 있던 흐름에 새로운 느낌을 준 것이다.

성현은 구성을 새롭게 하여 곡에 새로운 매력을 추가하면서 원곡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더욱 잘 표현해냈다.

물론 이건 성현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었다.

주선아와 임하나의 눈을 사로잡는 실력 또한 한몫 똑똑히 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준비한 무대를 100%, 아니 120% 쏟아붓고 있었다.

‘연습 때보다 더 좋아진 것 같네.’

두 사람의 무대를 지켜보던 성현은 그제서야 안도를 할 수 있었다.

주선아가 발을 삐끗할 때까지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막상 무대가 시작되니 믿었던 만큼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둘이다.

‘두 사람 다 무대 체질이구나.’

성현은 완벽하게 곡에 몰입한 두 사람의 무대를 지켜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이윽고 대망의 클라이맥스 부분이 다가왔다.

임하나와 주선아는 박자를 맞추듯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화음을 이루었다.

두 사람의 절묘한 보컬이 오디션장을 가득 메웠다.

주선아의 맑은 고음에 임하나의 끈적한 중저음이 묘한 매력을 솟구치게 했다.

보통 남자와 여자 듀엣이 보여줄 수 없는 색다른 매력을 선사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방금 그렇게 춤을 췄는데 저런 소리를 낸다고?’

모건은 라이브로 보고 있으면서도 지금 저것이 라이브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럴게, 두 사람은 보이그룹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격렬한 춤을 완벽히 소화해 낸 뒤였다.

그런 격렬함을 지난 후에도 흔들림 없는 호흡을 보여주고 있으니 놀랄 뿐이었다.

‘원석이다. 춤, 노래는 기본이고 목소리도 개성 있고 무엇보다 트랜디하잖아.’

지루해서 하품을 하던 때는 언제고, 모건은 임하나와 주선아 두 참가자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를 보여주듯 그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몰랐다.

***

두 사람의 무대가 끝나고 흔치 않게 심사위원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오디션이 아니라 공연을 본 것 같아요.”

“원래 듀오로 활동하던 그룹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두 사람의 호흡이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심사위원들의 이어지는 호평에 임하나와 주선아는 허릴 숙여 감사 인사를 보냈다.

그녀들은 그제서야 한시름 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모건이 마이크를 들었다.

참가자들은 물론 그녀들도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모건이라면,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혹평을 날릴지 모르니까.

“이성현 참가자.”

그러던 중, 모건이 부른 건 임하나와 주선아가 아닌 성현의 이름이었다.

“이번 곡 직접 편곡하고 구성까지 맡으신 겁니까?”

“네. 제가 프로듀서니까요.”

당당한 성현의 태도에서 나온 대답에 모건은 심사평을 하며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의 독무도 인상 깊었지만, 개인적으로 이성현 씨의 트렌디한 편곡이 가장 인상 깊어서 물어봤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모건은 성현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물었다.

“왜 이 곡을 택했습니까?”

질문의 의도는 명백했다.

오디션 프로에서 유명한 곡을 선택하게 되면 받는 페널티가 있다.

심사위원들의 기대치가 높아져서 원곡을 뛰어넘지 않는 이상 리스크를 동반한다는 문제였다.

이에 성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이 노래보다 두 사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노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곡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모건의 짓궂은 질문이 오디션장을 다시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을 이성현이었다.

그는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판단은 심사위원분들께서 하시겠지만, 원곡을 떠나 저만의 색을 분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성현의 말에 심사위원들 모두가 고갤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확실히 성현은 원곡과 달리 초반에 독무를 배치했다.

그 덕에 처음부터 긴장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어서 뒤의 군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확실히 이성현 참가자의 색을 느낄 수 있는 무대였습니다. 마지막 후렴구를 두 참가자의 듀엣으로 구성한 건 원곡보다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고.”

성현은 마지막 후렴구 부분을 강한 베이스 소리와 함께 서로 다른 고음역대에서 섞어내는 편곡을 했다.

이것이 모건에게 인상 깊게 다가갔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칭찬에 임하나와 주선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빌보드 차트에 올랐던 원곡보다 더 낫다는 말은 엄청난 극찬이었다.

그것도 그것이 모건의 입에서 나왔단 사실에 다른 심사위원들 또한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진실된 호평이었다.

“물론 이런 편곡을 위해선 두 사람의 실력이 뒷받침돼야겠지만 프로듀서가 가수의 재능을 파악하고 그 재능을 마음껏 살릴 수 있는 곡을 만드는 것 또한 프로듀서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이라 봅니다. 그런 점에서 이성현 참가자는 앞날이 기대되는 프로듀서군요.”

모건의 이어지는 칭찬에 주선아와 임하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반대로 나머지 기다리고 있던 참가자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쯤 되면 승패가 결정 났다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축하드립니다. 최종 평가전에서 보면 좋겠군요.”

모건의 말에 임하나와 주선아는 성현을 껴안으며 소릴 질렀다.

마침내 세 사람이 천소울을 대신할 ‘시크릿 스테이지’의 참가자로 결정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