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무슨 배짱으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녹화본은 저도 못 구해드려요. 권한이 없다구요.”
김인호의 말에 성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 물었다.
“권한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데요?”
“뭐, 제일 확실한 건 우리 채널 참가자 중 하나가 시크릿 스테이지에 참가하는 거겠죠. 이미 자리 다 차서 불가능하겠지만.”
‘천소울이 나간 걸 모르는구나.’
김인호 AD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정말 시크릿 스테이지 내부 사정은 아예 모르는 듯했다.
아마도 그럴 테지.
시크릿 스테이지는 웬만한 스텝들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을 터였다.
철없는 말단 사원이 내부 사정을 몰래 찍어 밖으로 유출시키면, 시청률은 대폭 줄어들게 뻔했다.
꽁꽁 감싼 만큼 화제성은 오르기 마련이기에 그만큼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행동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더는 그와 대화를 길게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럼 일단 참가하면 녹화본 구할 수 있는 거죠? 시크릿 스테이지 참가하면 그때 다시 연락드릴게요.”
성현은 이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그러자 김인호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 아까랑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아깐 거기 참가하려고 녹화본 필요하다며.”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성현도 시크릿 스테이지에 도전할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김인호는 안된다고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성현에겐 다 계획이 있다.
성현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카페를 나갔다.
지금까지 보인 이성현의 특성상,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걸 잘 알던 김인호였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
다만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며 생각에 잠겼다.
‘스폰서도 없이 무슨 수로 없는 자릴 만들겠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김인호도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이내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돌아가면 다시 해야 하는 편집작업에 머리 아파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카페에서 나온 성현은 곧장 주선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소울 상태 괜찮아요?”
“네. 지금 자고 있어요. 술병도 전부 치웠고.”
“이후에 스케쥴 있어요?”
“아니요. 지금 작업실 가는 중이에요.”
“잘됐네요. 나 좀 봐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그는 택시를 잡으며 주선아와 통화를 이어갔다.
곧 주선아가 말해준 주소로 곧바로 향했고, 두 사람은 주선아의 작업실에서 다시 만났다.
주선아 또한 천소울 일로 마음이 급했는지 그의 부탁에 무엇이든 도우려 했다.
상태가 말이 아닌지라 그녀 혼자 감당하기는 매우 힘들어 보였다.
이윽고 성현이 그녀의 작업실에 도착하자 주선아는 곧장 문을 열며 기다렸다는 모습을 보였다.
다급한 건 성현도 마찬가지였기에 바로 본론부터 들어갔다.
“천소울 멘탈 나간 건 느꼈죠.”
“네......”
주선아는 한숨을 쉬며 힘없이 대답했다.
천소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에게 있어 가히 충격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천소울이 음악을 관두겠다 했으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녀는 어떻게든 다시 천소울을 일으켜 세우며 다시 함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성현도 똑같았다.
“걱정 마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으니까.”
“어떻게요?”
좋은 방안이라도 있는 걸까? 주선아는 다급함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천소울만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뭐라도 할 기색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천소울이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저한테 그랬죠. 스폰서한테 시크릿 스테이지 자리 제안받았다고.”
“네. 그게 왜요?”
“그 제안 받아들이세요. 대신 조건은 저도 함께 참가해야 합니다.”
뜬금없는 성현의 말에 주선아는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천소울의 멘탈을 되돌리는 것이 시크릿 스테이지에 참가하는 것과 무슨 연관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시크릿 스테이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상태.
더욱이 자기 얘기를 전혀 안 하는 천소울이기에 그녀에게 그곳에 참가하게 됐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성현은 주선아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려줘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천소울 저렇게 된 이유는 시크릿 스테이지 말고 없어요. 우리가 거기 참가해서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알아내서 저 녀석 멘탈 되돌리는 수밖엔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스테이지에 참가해 녹화본을 구해 모건과 천소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아보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당장 주선아에게 할 수 있는 설명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주선아는 천소울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이다 보니 성현의 말에 토를 달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당장 성현의 제안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성현의 제안을 수락했다.
헌데, 그녀는 이내 난처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대표님이 이미 저랑 같이 참가할 프로듀서를 따로 구해 놓은 것 같더라구요,”
심각한 표정을 짓는 주선아에 비해 성현은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주선아가 말하는 대표님이란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기획사 ‘메가히트 엔터테이먼트’의 김성민 대표였다.
그는 주선아를 시크릿 스테이지의 빈자리에 넣을 정도로 엔터계에선 파워가 막강한 인물이었다.
김성민 대표 정도 되는 스폰서가 주선아를 시크릿 스테이지에 참가할 마음을 먹었다?
거기서 이미 프로듀서까지 점찍어 놨을 거란 건 성현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주선아의 말이 놀랍진 않았다.
물론 주선아만 들어가서 안의 상황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주선아는 어느 부분이 천소울을 몰락시켰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더욱이 김인호 AD와 연이 없는 그녀이기에 녹화본을 구하기란 불가능.
결국, 성현도 같이 들어가야 천소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거였다.
“대표님이랑 저랑 연결 좀 해줄 수 있을까요? 제가 직접 말씀드려볼게요.”
주선아는 곧장 성현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선아와 함께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선아는 스폰서인 김성민 대표와 전화가 연결되었다.
먼저 전화를 받은 주선아가 단호하게 말을 시작했다.
“대표님. 저 시크릿 스테이지 참가할게요.”
그동안 깜깜무소식이었던 그녀의 말 한마디에 수화기 너머에서 흥분에 쌓인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시크릿 스테이지를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다 마쳐놓은 상태 같았다.
한편 주선아는 성현과 눈빛을 교환한 뒤에 조건을 덧붙였다.
“대신 저 혼자 말고 다른 참가자와 함께 동반 참가를 하고 싶습니다.”
주선아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들려와서 그런지 이번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내 침묵을 깨고 그가 물었다.
“다른 참가자, 누구요?”
김성민 대표는 까다로운 그녀가 고른 참가자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뭐, 항상 같이 다니는 천소울에 대한 소식은 들렸겠으니 마땅한 참가자가 없다 생각했겠지.
주선아는 곧장 휴대폰을 성현에게 건넸고 바로 소개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오디션 프로듀서로 참가한 이성현이라고 합니다.”
“아아.”
성현이 있는 채널에서 성현을 모르는 스폰서는 없었다.
그만한 행동과 업적을 남겼으니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김성민 대표 또한 성현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후한 반응을 보이더니 곧장 서론 없이 물음을 제시했다.
“왜 주선아 씨랑 시크릿 스테이지를 함께하고 싶은 겁니까?”
곧장 천소울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각 스폰서들은 자신이 스폰하고 있는 참가자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게다가 천소울은 그의 스폰서에 있는 참가자도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 김성민 대표가 그런 목적을 가진 참가자를 도와줄 리는 없었다.
성현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그의 마음에 드는 답을 생각해내 끼워 맞췄다.
“주선아 씨를 이번 시크릿 무대에 올리려는 이유는 당장 1등을 노린다기보다 해외 스폰서들한테 얼굴을 알리기 위한 것이 크지 않나요?”
스폰서로부터 딱 원하는 답은 이것 말고는 없을 거다.
모든 스폰서들은 자신의 가수를 높게 띄워 위상을 세우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일 테니.
김성민에게서는 답변이 오지 않았다.
대답이 없다는 건 성현의 말이 들어맞았단 의미이기도 했다.
김성민 대표 역시 이번 무대에서 그녀의 실력과 얼굴, 이름을 알려 해외 진출에 경쟁력을 높이려고 했다.
이에 성현은 확실하게 매듭을 묶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제 생각엔 1등보다 더 강렬하게 눈도장 찍을 방법도 없을 것 같아서요. 제가 주선아씨 1등 시켜 드리겠습니다.”
“1등이 쉬워 보이나 본데 거긴 날고 기는 참가자들만 참가하는 스테이지입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거기서 1등 할 수 있단 거죠?”
역시 생각처럼 쉽사리 넘어오지 않았다.
허나 성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주선아를 슬쩍 보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대표님 가수가 워낙 뛰어나잖아요. 제 프로듀싱 실력만 조금 보태면 지금의 주선아 씨보다 몇 배는 더 빛나게 해드릴 수 있다 자부할 수 있어요.”
이보다 스폰서의 마음에 드는 말은 없을 테다.
김성민 대표는 다시 침묵에 빠지며 고민했다.
자신의 손으로 택한 주선아의 실력이야 부정할 수 없었지만, 성현의 실력에 대해선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성현의 실력이야 한국 스폰서들 사이에서 이미 알려진 상태였다.
매 라운드 마다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특히 ‘더 비기너’의 재결합을 주도했다는 것이 스폰서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이슈였다.
그러나 이것과 주선아를 맡기는 건 다른 문제의 일이었다.
시크릿 스테이지에 모건이라는 유명 프로듀서가 오는 만큼 더 완벽한 프로듀서를 붙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현은 뒤를 밀어줄 스폰서도 없는 상태.
그를 사용하는 건 득이 될지 독이 될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고민되는 일인 건 알지만 다시 한번 제 실력을 보고 결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김성민 대표는 한 마디를 남긴 채 곧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원래 붙이려 했던 프로듀서 참가자와 비교할 생각인 것 같았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일단 기다려 보시죠.”
그들은 초조하게 스폰서의 결정을 기다렸다.
여기서 통과가 안 된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 속절없는 시간이 흐르더니, 마침내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재빠르게 전화를 받은 주선아는 짧은 대답과 함께 전화기를 성현에게 넘겼다.
“1등 시키겠단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성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김성민이 물어왔다.
성현은 입에 미소를 걸치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네. 그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좋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시크릿 스테이지에 참가할 기회를 만들어주겠습니다. 단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오디션은 따로 치러야 할 겁니다.”
경쟁 정도는 이미 성현도 각오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천소울을 구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