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통화를 끝낸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현의 작업실에 주선아가 찾아왔다.
예상대로 성현의 작업실로 찾아온 주선아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녀가 다짜고짜 까칠하게 대했던 성현의 작업실로 찾아온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천소울.
그에게 분명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게 확실했다.
“천소울 씨 때문이에요?”
단번에 짚어낸 요건에 주선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선 2라운드 끝나고 1주일 정도까진 연락이 잘 됐어요. 그런데 며칠 전부터 갑자기 연락이 두절 됐어요. 개인 스튜디오로 찾아가도 묵묵 부답이고…….”
“자기 작업하느라 연락이 안 될 걸 수도 있지 않나요? 워낙 한 번 빠지면 거기에만 몰두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데 걸리는 게 있어서요.”
천소울에게 음악 말고도 다른 일이 있기라도 한 건가?
뭐, 워낙 게임 속 캐릭터들도 각자 가지고 있던 이야기가 있으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현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주선아를 쳐다봤다.
주선아도 그와 조심스럽게 눈을 마주치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선생님 목소리가… 취해 있었던 것 같아요.”
“천소울 씨가 술에 취해 있었다구요? 확실해요?”
사람이라면 가끔 술 먹고 취할 수도 있는 건데, 성현은 이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물었다.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은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 되물은 성현의 되물음에 주선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발음을 제대로 못 하시더라구요……. 그땐 저도 무대 준비를 하느라 경황이 없어 신경 쓰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확실히 취해있었던 것 같아요.”
‘천소울이 술을 마셨다고…?’
주선아 말을 들은 성현의 표정은 계속 좋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그땐 무슨 얘기 했어요?”
“음악 작업 때문에 바쁘다고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하시고 끊었어요.”
그녀가 가져온 정보를 듣고 성현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건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진지한 모습에 주선아는 머뭇거리더니 다시 어떤 얘기를 꺼냈다.
“사실 제가 며칠 전에 스폰서한테 제안받은 게 있는데 아무래도 그거랑 관련돼있는 것 같아요.”
“자세히 말해봐요.”
“어제 스폰서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갑자기 이번 3라운드만 왜 준비기간이 이렇게 긴 줄 아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요?”
“그냥 그동안 참가자들한테 휴식 기간도 주고 쉬어가는 기간 같은 거 아니냐고 했더니 그게 다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실 이번 라운드에 시크릿 스테이지가 있다고 말했어요.”
‘시크릿 스테이지?’
시크릿 스테이지에 대한 건 이미 게임을 통해 성현도 알고 있었다.
줄곧 성현도 게임 속 천소울을 키워나가며 자주 경험을 했기에 어떤 식으로 작업이 되는지 파악됐다.
말 그대로 라운드 사이 사이에 껴있는 비밀 오디션이다.
일반 참가자들에겐 공개가 안 되며 주최 측에서 엄선한 상위 점수를 받은 참가자들만이 비밀리에 참가할 수가 있었다.
이미 저번 라운드에서부터 남들과 다른 실력을 보여준 천소울이기에 연락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터다.
거기에 당시 우연인 건지 화제가 된 일도 떠올랐다.
‘역시 모건과 관련된 건가.’
시크릿 스테이지라면 소수의 엄선된 참가자들만 참가하는 오디션인 만큼 항상 유명인들과 함께 콜라보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 성현이 시크릿 스테이지에 참가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 유명인은 모건뿐이었다.
“혹시 모건과 관련된 건가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생각처럼 흘러가는 상황에 성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뒷 내용도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 없이 모건이 한국에 올 이유는 없으니까요.”
모든 상황을 눈여겨본 듯 성현의 표정은 전보다 더욱 좋지 못했다.
그럴게, 게임 속에서 천소울이 모건과 엮였을 때는 어째선지 좋은 결말을 맺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시크릿 스테이지엔 아무나 참가할 수 없는데 갑자기 자리가 하나 빈다고 저한테 참가를 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누가 나간 거냐고 물었더니 천소울 참가자가 나갔다고…….”
천소울을 가장 우선하고 걱정하던 그녀이기에 말끝을 흐리며 슬퍼했다.
성현 역시 일이 이렇게 흘러 가버리는 바람에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주선아 말 대로라면, 천소울은 이번에도 모건과 엮여서 무대를 펼친 건 분명했다.
뒤이어 이번에도 처음 겪어본 큰 충격에 의해 모습을 감추고 어딘가에서 웅크려 든 것이 틀림없었다.
“제가 아는 선생님께선 그런 자리에서 쉽게 빠질 분이 아니세요. 갑자기 무슨 이유 때문에 나가려 하신 건지 왜 술에 취한 건지 연락이 안 되니까 너무 답답해요. 마지막 통화했을 때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가수로서 천소울을 동경하며 어떤 맹목적인 충성심마저 가지고 있던 주선아였다.
그러다 보니 이번 일로 스스로를 더욱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 달라고 하셨잖아요. 혹시 뭔가 아는 게 있는 건가요?”
아무런 이유 없이 성현이 그런 부탁을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하기야 평소 음악에만 몰두해 있는 그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런 일을 할 리는 없지.
하지만 성현의 표정에서 보이듯 그도 이번 일 만큼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던 모양이었다.
성현은 주선아의 다급한 질문에도 알고 있는 진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기에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이랑 친분이 있던 건 맞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평소 자존심이 센 주선아지만 이번만큼은 고개를 숙여 가며 성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당장 성현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일이 최악으로 흘러갔어.’
상황은 대부분 게임 스토리 상으로 흘러갔다.
게임 내에서, 천소울이 본선 2라운드를 조기 합격했을 때 선택지가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모건과 관련된 일이었다.
더욱이 모건과 관련되면, 열에 아홉은 엔딩이 좋지 못했다.
그리고 그중 최악의 엔딩은 ‘술’과 관련된 배드 엔딩.
이전 성현이 우려했던 모든 상황 중 가장 안 좋은 상황이 분명했다.
‘확실히 게임 속 천소울은 초반 멘탈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아니길 바랐는데.’
천소울은 상처를 많이 받고 온 듯 항상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 오디션에서 성현이 봤을 땐 천소울을 딱히 그렇게 좋지 않은 상황은 없었다.
조진석과의 마찰도 피했고, 주선아도 만날 수 있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최악의 상황에 빠진 천소울을 보며 왜 그런 일을 맞닥뜨리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선, 그것을 알아내기 전에 일단 천소울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천소울 씨 개인 스튜디오 안다고 했죠?”
“네!”
“안내하세요. 일단 가봅시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만나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에 성현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 뒤로 주선아도 성현의 뒤를 따라나섰다.
***
쾅쾅쾅
“천소울 씨!”
쾅쾅쾅.
“대답 좀 하세요, 천소울 씨!”
쾅쾅쾅.
차갑게 식어버린 철문은 천소울을 보호하는 성벽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성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철문을 두들겼지만,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봐요!”
“안에 없는 거 같으니까 그만 해요.”
답답함에 소리 지르는 성현을 뒤에서 지켜보던 주선아가 말리려 나섰다.
주선아 역시 천소울이 나오길 바라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작업실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조금만 더 해봅시다.”
쾅쾅쾅
“여긴 없다니까요? 불도 꺼져 있잖아요.”
답답하단 표정으로 주선아는 불이 꺼져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항상 음악에 빠져 곡만 만들어내는 그이기에 불이 꺼져 있는 일은 잘 때 빼고는 없을 거다.
하지만 성현의 생각은 다른 듯 계속 문을 두드렸다.
‘안에 있는 거 아니까 나와라. 제발.’
성현은 게임을 통해 천소울이 멘탈이 나가거나 고통을 겪을 때 하는 행동에 대해 전부 알고 있었다.
천소울은 멘탈이 나가는 그 순간부터 작업실에 처박혀 술에 찌들어 살았다.
그 상태로 며칠, 몇 주, 몇 달을 있을 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정신을 차릴 때까진 연습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은둔 생활만 하는 것 그나마 다행이었다.
게임 내에서 가장 최악의 엔딩은 은둔 생활을 하며 알콜 중독자로 끝나는 경우였다.
그런데 지금 그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으니 그 말은 이번엔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뜻했다.
당시 성현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뭐 이딴 엔딩이 다 있나 했더니 실제 일어날 줄이야.’
이번엔 자신이 직접 나서 천소울의 정신을 차리도록 하겠단 생각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그러니 성현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고 천소울의 문을 두들겼다.
범죄만 아니었으면 당장에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를 내질렀다.
“이봐요!”
벼락과 같은 큰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계단을 거세게 내려오면서 성현에게 향했다.
얼굴을 보니 이미 짜증이 한가득 뿌려진 여자는 성현에게 화를 쏟아냈다.
“한 시간이면 된다면서요. 지금 몇 시간 지났는지 알아요? 네 시간 지났어요, 네 시간!”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곧 나올 것 같으니까-”
“네 시간 째 문을 두들겨대는데 제정신인 사람이면 시끄러워서라도 나오겠죠. 안에 사람 없는 거라니까? 저, 이번엔 진짜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가세요.”
여자도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이대로면 천소울의 상황은 더 악화될 수 있도록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서고 싶은 성현이기에 낮게 한숨을 쉬더니 정중히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다시 해볼게요.”
“미친다 진짜.”
이번 기회가 아니면 천소울을 만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그와 함께 하고 싶던 음악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될 터.
한편 여자는 머리를 한 손으로 쥐어 잡고는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그러더니 성현을 밀쳐내고 문 앞에 섰다.
“304호. 안에 있으면 나오라고! 사람 미치게 하지 말고!”
여자는 건물 전체가 떠나가라 소릴 질렀다.
성격 있어 보이는 꽤나 젊어 보이던 여자가 쏟아낸 고성은 철문 소리보다 더 우렁찼다.
그 찢어질 듯한 고성 때문에 성현과 주선아는 옆에서 귀를 막아댔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 후.
끼익.
견고했던 천소울의 작업실 문이 열렸다.
“어머. 진짜 사람이…….”
여자는 정말 나올 줄 몰랐다는 듯 눈이 커졌다.
옆에 있던 주선아도 당황하긴 매한가지.
“서, 선생님……!”
이전까지 천소울이 보여주던 모습과 달리 술에 쩔어 폐인이 된 놀란 것이다.
“감사합니다.”
성현이 윗층 여자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들어갑시다.”
천소울을 안으로 들이밀며 자연스레 그의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선아 역시 얼른 그들을 뒤따라 작업실 안으로 향했고, 이내 문이 굳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