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과거는 흘러가지만, 기억은 오랫동안 남기 마련이다.
심훈영은 성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회상으로 빠져들었다.
허나 과거의 일을 떠올려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과거의 일을 억지로 지우기 위해 술잔을 비우며 툭 던지듯 말했다.
“넌 그냥 음악쟁이구나.”
“사장님도 음악쟁이잖아요.”
“응? 날 알아?”
“네. 심훈영 작곡가님.”
“날 어떻게 알아?”
“저깄는 앨범들 전부 사장님이 작사 작곡한 곡들이잖아요.”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입구에 전시되어 있던 수많은 LP와 앨범들.
성현은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저 신기하게 바라만 보던 LP였는데 성현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어쩐지, 이렇게 많은 곡들을 가게에 단지 장식처럼 둘 리가 없겠지.
“처음 작곡 공부할 때 사장님 곡으로 시작했어요. 여기서 공연한 이유 중 하나도 사장님 앞에서 공연하고 싶어서였어요. 정말 존경하거든요.”
심훈영의 전성기는 예전에 지나갔던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알아보는 성현에게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고 괜스레 뿌듯해졌다.
옛날 기억이 살포시 그려진 심훈영의 머릿속 상황에,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정말 좋아하거든요. 사장님이 만드신 곡들. 특히 이문섭 선배님의 ‘아직 알지 못했다.’나, 김원석 선백님의 ‘세월이 지나는 것에 관하여’, 또…….”
“다 지난 일이지.”
성현의 말을 황급히 끊던 심훈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선 달콤한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맴돌지 않았다.
그런 표정을 본 성현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무대 위에는 여전히 공허하게 놓여져 있는 악기들을 성현은 정감있게 바라봤다.
“지난 일이라 하기엔 아직도 애정이 느껴져요.”
심훈영은 성현을 보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악기들이랑 LP판들 전부 잘 정리돼 있잖아요.”
오아시스 바 안은 각종 취객들의 난동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LP판과 악기들만이 멀쩡하게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심지어 LP판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바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어 함부로 손도 못 대게 했다.
또한 성현의 말대로 오아시스 바에 있는 오래된 악기들과 LP 그리고 무대 장치들 모두 먼지 하나 쌓이지 않고 깨끗하게 잘 정리가 돼 있었다.
단지 오디션에서 무대로 선정한 곳이라 해도 보통 주인 같으면 이렇게 깔끔히 정리도 하지 않을 거다.
그야 당연하다.
정이 안 가는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직도 음악 사랑하시는 거 아니에요?”
잔에 가득 담긴 쓰디쓴 술을 심훈영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럼 뭐해. 내 가수를 잃었는데.”
여전히 표정에 드리워진 씁쓸한 표정.
심훈영은 비어있는 잔을 다시 빈 잔에 채우려 했다.
이에 성현이 술병을 먼저 잡고 대신 술을 따라줬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심훈영은 긴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던 사람은 없었다는 듯 그동안 묵혀두었던 기억들을 서서히 꺼내 들었다.
“널 보면 옛날 일이 생각나. 나도 음악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즐겁고 음악을 통해 위로받던 때가 있었거든. 보금자리. 그래, 나한테도 음악이 보금자리였던 때가 있었어.”
그는 술기운이 더 들게 하려고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의 말에선 과거에 대한 회한이 여실히 묻어나왔다.
맨정신으로 말하기엔 너무나 아픈 과거라는 걸 눈치챈 성현은 말없이 그의 빈 잔을 채워줬다.
“그러다 스타 작곡가 되고 나니까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고 점점 음악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어서 곡을 썼어. 그러다가......”
웃음이 서리던 입가에 미세한 떨림이 일어나더니 점차 그 웃음이 지워졌다.
무거운 공기가 침묵을 만들어냈다.
“죽었어. 내가 아끼던 가수가.”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성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 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다그치기만 했어. 사람 속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사장님 잘못 아니에요. 사장님도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하셨잖아요.”
그의 말대로 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자고로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때마다 결단 내린 일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성현은 애써 그를 위로해줬다.
하지만 그때의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잘못이야. 프로듀서인 내가 내 가수를 챙기지 못했으니까. 앨범만 잘 되고 인기만 얻으면 그게 다인 줄 알았던 거지.”
공기는 무겁다 못해 우주에 있듯이 숨이 안 쉬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성현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이 가게 차린 것도 그 친구 때문이야. 언젠가 누구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가게를 차리자고 약속했었거든. 물론 지금은 하루하루 살기 힘들어서 그런 생각할 여유도 없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를 내뱉다가 성현의 어두워진 표정을 발견했다.
그제야 심훈영은 어두워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그는 이윽고 사무실 안으로 향했다.
잠시 후 심훈영은 한 손에 LP더미들을 가득히 들고 돌아왔다.
어찌나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이렇게 따로 보관해둘 정도일까.
성현은 심훈영이 가져온 LP들을 구경했다.
진열장에 있던 LP들에 비해 훨씬 구하기 힘들고 희소성이 높은 앨범들이 가득했다.
딱 봐도 그 당시에 한정판매로 인해 얼마 만들지도 않았던 LP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본 심훈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거 너 줄 테니까 나랑 약속 하나만 해줘라.”
“무슨 약속이요?”
이런 소중한 보물들을 주면서 성현에게 부탁하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성현은 눈을 반짝이며 심훈영의 말하는 약속을 궁금해했다.
그는 당장 여기 있는 앨범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약속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듀서로서 곡을 만드는 능력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뭔데요?”
“가수. 프로듀서한테 곡보다 더 중요한 건 가수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가수는 네가 지켜. 그것만 지켜준다면 LP는 그냥 줄 수 있어.”
“그런 이유로 주는 거라면 안 받을래요.”
“뭐?”
성현의 표정에서 반짝이던 빛은 별똥별처럼 타올라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성현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고, 심훈영도 크게 당황했다.
“대가를 받고 제 가수를 지키기 싫어요.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거 안 받아도 되니까 그냥 믿고 지켜봐 주세요. 꼭 좋은 프로듀서가 될게요.”
그런 의미에서 거절을 한 거였나, 심훈영은 드디어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성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꼭 지켜본다. 그 말 반드시 지켜.”
이곳에서 바라본 성현의 행동이나 모습에선 어떤 거짓도 없었다.
그걸 바로 옆에서 바라본 심훈영은 그저 꿀 발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본 성현은 다른 방면에선 모르겠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언제나 진심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믿음이 곧장 갈 수 있었다.
심훈영의 웃음에 성현도 그제서야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조명이 해가 뜨듯 새로이 밝아져 오는 것 같았다.
시간도 어느덧 가게 오픈 시간이 다 됐는지 심훈영이 자리에서 슬슬 일어났다.
“미션 통과 축하하고 항상 응원하고 있을게.”
“네. 건강 조심하세요.”
그렇게 어둡고 침침하게만 느껴졌던 오아시스 바에서 다시 온정이 피어났다.
그 속에서 심훈영과 인사를 마친 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했다.
그때, 심훈영이 성현을 불렀다.
“이건 그냥 내 선물.”
아까 자신이 가져온 LP 더미들을 성현에게 건네줬다.
“어떤 대가도 없고 내 마음이니까 그냥 받아.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웠다.”
즐거운 무대도 만들 수 있었던 것에도 좋았는데 이런 물건까지 건네주다니.
성현은 그저 단순한 선물이 아닌 대가 없는 그의 마음이라는 걸 알았기에 환히 웃으며 LP더미들을 받아들였다.
“또 올게요.”
마지막 인사를 남긴 성현은 심훈영에게 한줄기의 소망을 남긴 채 오아시스 바를 나갔다.
***
본선 2라운드가 끝난 지도 5일이 지났다.
편히 휴식을 취하라는 진행요원의 말이 있었음에도 성현은 5일 동안 작업실에 박혀서 곡 작업에만 매진했다.
이후 오디션에 사용될 곡들을 미리 작업해놓기 위함이었다.
매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미션 라운드 또한 올라가기 때문에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곡 작업을 끝내놓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5일이란 시간 동안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각자 역량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산책이나 하고 올까.”
아침부터 곡 작업을 했던 성현은 뻐근한 몸을 이끌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잠시 갖기로 한 휴식시간을 이용해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들 역시 아침부터 메시지방에서 활발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나 언니. 저 춤 좀 늘었죠?
-올. 봐봐.
[서지현님께서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쫌 늘었네.
-완전 늘었는데.
-ㄴㄴ. 강약조절이 부족.
- 다들 열심히네요. 저도 이번에 곡 쓴 거 피드백 좀 해주세요!
멤버들은 모두 각자 연습한 동영상을 보내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다들 그새 성장했네.’
멤버들의 연습 영상을 본 성현에게도 그녀들의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게 보였다.
그녀들은 스스로 각자의 부족한 점들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의 멤버들을 본 성현은 흐뭇하기만 했다.
그때, 성현에게 못 보던 번호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 김인호 PD인데요, 다음 라운드 준비 잘하고 있죠?
MTT 클럽 사건이 터졌을 무렵.
김인호AD는 성현과 번호를 교환했었다.
오디션은 변수가 너무 많다며,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자신한테 바로 연락 주길 바라는 뜻으로 번호를 준 것이다.
성현이 자기 채널 최고의 화제 인물인 만큼 직접 챙기려는 모양새 같았다.
‘저장한다는 걸 깜빡했구나.’
음악에 열중하고 있던 일에 뒤늦게야 김인호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답장을 보냈다.
-네.
짧은 답장을 보낸 지 몇 초 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또 휴대폰이 울렸다.
‘오늘따라 연락이 많이 오네.’
울리는 휴대폰에 그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보는데,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선아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곧장 덮쳐 들어왔다.
주저 없이 전화를 받자 주선아가 다짜고짜 시간이 있는지부터 물음을 던져왔다.
“무슨 일인데요?”
“만나서 설명할게요. 작업실 어디예요?”
곧장 성현의 작업실로 찾아올 정도로 긴급상황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