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성현이 서자명을 돕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더 좋은 무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성현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었다.
그는 AD를 보며 한 가지만을 제시했다.
“서자명 참가자가 엇나갈 경우 확실히 잡아줄 수 있냐고 물어봐 주세요.”
“엇나가다뇨?”
“서자명 씨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고집은 다른 아티스트의 음악 스타일을 무시할 정도로 강해요. 전 그가 자신의 음악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음악도 함께 존중했으면 합니다. 이것만 지켜질 수 있다면 서자명 씨와 함께 무대에 서는 걸 고려해보겠습니다.”
곡을 잘 만드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팀원들 간의 협동성이다.
성현은 이미 게임을 통해 서자명이 자신의 음악성을 고집하면서 팀원들 간 불화를 만드는 걸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자명이 자신의 팀에 합류하게 될 경우,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필요했다.
만약 엇나가는 참가자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큰 존재가 있다면, 단연 그 참가자의 스폰서일 터.
특정 참가자와 계약한 스폰서는 그 참가자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 게 당연하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종의 고리들로 묶여 있다.
고리를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는 말은 곧바로 잘라내고 다른 말로 교체한다.
이는 반항해도 깰 수 없는 관계이자 처음부터 정해진 법이다.
서자명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게 성현이 어떤 스폰서와도 계약하지 않은 이유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성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기다리세요.”
잠시 후 AD 역시 서자명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성현의 조건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문정석 대표한테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과 성현의 조건도 빠짐없이 전부 이야기했다.
이미 성현의 활약상은 다른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스폰서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그러니 결코 성현을 얕잡아 볼 수 없었고 제안을 손쉽게 거절할 수도 없을 것이다.
뭐, 거절한다 해도 다른 곳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긴 하겠지만.
생각보다 통화는 짧게 마무리됐고, AD는 다시 성현에게 돌아왔다.
“약속하시겠답니다.”
AD의 말에 성현은 고갤 끄덕인 뒤 이번엔 자신의 일행들에게 향했다.
“서자명 씨,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들은 모두 무대 위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공연을 하고 있는 서자명을 바라봤다.
이윽고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니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음을 확인하고 입을 뗐다.
***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들이 굵게 맺혀 서자명의 얼굴을 씻겨주고 있었다.
모든 신경을 피아노에만 쏟아부으며 건반을 눌러대었다.
허나 이미 크게 흔들린 탓에 심해 속에서 건반을 누르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야유와 불만만을 표출하던 관객석에서 호응이 뱉어졌다.
무슨 일이 난거지, 싶은 서자명이 고개를 들어보니 성현이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성현이 무대에 오르자 눈 깜작할 새 정반대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제야 제대로 된 노래를 하려나 보네.”
“저거 듣느라 귀에서 피 나오는 줄 알았다고!”
손님들은 성현의 등장을 반기며 환호했다.
그 모습을 본 서자명은 피아노 연주를 멈추었다.
서자명과 남다른 아우라를 뽐내던 성현은 그의 뒤를 받쳐주듯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제대로 된 노래 뽑아드릴게요.”
“천천히 혀.”
“그럼, 그럼. 한 곡 뽑는다는데 기다려줘야지.”
이성현은 이미 오아시스의 단골 손님들에게 인정을 받은 베테랑 뮤지션이었다.
그러니 잠시 기다려달란 그의 부탁에 모두 큰 소란 없이 기다렸다.
이러한 상태도 모르고 지켜만 보던 서자명의 얼굴엔 놀라움만이 가득했다.
서자명은 성현이 대체 저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은 건가 궁금했던 것이다.
‘무대 오르기 전에도 느꼈지만 사람을 잡아끄는 뭔가 있는 게 확실해.’
여기 있는 손님들은 다른 관객들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솔직하고 과격했다.
서자명이 잠시나마 공연을 했음에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단숨에 휘어잡는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거지?’
서자명은 성현이 가지고 있는 그 힘, 사람을 잡아끄는 그 힘이 뭔지 궁금했다.
프로듀서한테서 음악적 능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추가로 그에 못지않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또한 굉장히 중요했다.
결국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한 명의 사람이고, 노래를 듣는 이들 역시 한 명의 사람이다.
그들을 모두 이끌 수 있는 건 최종적으로 프로듀서가 안고 가야 할 문제였다.
그 문제를 성현은 너무나도 잘 해결하고 있었기에 그 방안이 궁금해졌다.
‘질투 날 정도로 부러운데.’
웬만하면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 서자명이 성현에게만큼은 부러움과 질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서자명은 스스로 프로듀서가 되기 위한 많은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다.
가수들을 어떻게 하면 더 빛나게 해줄지, 관객의 호응을 이끌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일지 모두 짚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성현에게는 있고 서자명에겐 없는 능력이 있었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항상 자신의 재능만을 믿었던 서자명이기에 그 힘은 갖지 못할 능력에 속해 있었다.
허나 성현에게는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떤 음악을 할까.’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같은 업종을 하는 사람을 보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면 마음은 더욱 쉽게 움직인다.
서자명은 평소 남에게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성현에게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허나 이번 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성현에게 호기심과 동시에 묘한 동경심이 생긴 것이다.
그때,
[ ‘서자명’의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성현의 앞으로 홀로그램 하나가 나타났다.
드디어 서자명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된 성현은 서지현에게 무대에 올라오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무대에 올라오기 전, 그녀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서자명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그녀들은 모두 그의 간절함이 안타까웠는지 한 번만 기회를 주기로 정했다.
“안녕하세요. 서지현입니다.”
“인사도 잘하네! 오늘은 한 열 곡은 뽑고 가야 해!”
서지현의 짧은 인사만으로도 바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를 했다.
서지현 역시 성현과 마찬가지로 오아시스 단골 손님들에게 인정을 받은 상태였다.
이성현에 이어 서지현도 등장만으로 이 거친 사람들의 호응을 얻자 서자명은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서자명의 눈에는 이들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게만 비쳤다.
“서자명 씨, 인사하세요. 서지현 씨라고 제가 아끼는 가수 참가자 중 한 명입니다.”
서지현은 객석에 인사 후 성현 곁으로 오자 성현은 그녀를 서자명에게 소개했다.
“프로듀서 서자명입니다.”
서자명과 서지현은 서로 짧게 인사를 나눴다.
이후 성현은 그녀들과 약속한 것처럼 서자명에게 마지막 기회를 건네줬다.
“서지현 씨를 무대에서 빛나게 해주세요. 이것이 서자명 씨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서자명의 치명적 약점은 노래.
성현은 프로듀서인 그가 노래가 아닌 프로듀싱과 무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의 능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이었다.
“시간은 10분 드릴게요.”
단 10분.
성현은 서지현과 관련된 정보조차 주지 않았다.
즉, 서자명에게 10분 안에 서지현의 특징을 잡아내서 그녀에게 맞는 선곡을 하라는 말이었다.
그에게 있어 성현에게 온전한 프로듀싱 능력을 보여주라는 일종의 작은 미션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수도, 도망칠 곳도 없다.
게다가 그의 제안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서자명에게 들었다.
미션 내용을 들은 서자명은 결연한 표정으로 곧바로 고갤 끄덕였다.
“10분. 좋네요.”
노래는 몰라도 프로듀싱 능력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성현의 미션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서지현 씨 자신 있는 곡 한 소절만 짧게 불러줄 수 있을까요?”
프로듀서답게 서자명은 곧장 서지현의 음색과 보컬 특징을 먼저 파악하려 했다.
서지현이 어떤 보컬리스트인지 알아야 그에 맞는 선곡을 하고 무대 구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거만하고 허세가 넘친 눈매는 어느새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눈망울로 바뀌어있었다.
이를 본 성현은 마이크를 잡고 다시 무대 앞으로 나아갔다.
“기다리시느라 힘드셨죠? 정확히 10분 후에 무대 시작할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현이 관객들에게 대신 사과를 한 뒤 무대를 내려갔다.
이윽고 마저 확인하지 못했던 서자명의 정보창을 확인했다.
[ 서자명 ]
나이 : 26살
키/몸무게 : 175cm/ 68kg.
포지션 : 프로듀서
특성 : [무대의 이해]. [화려함의 권위자], [구성의 미학], [까다로운 안목], [아낌없는 독설]
‘화려함의 권위자까지? 무대 연출력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서자명의 무대 퍼포먼스에 대한 재능은 확실히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좋았다.
‘과연 어떤 무대를 만들어낼까.’
성현은 서자명이 10분이란 짧은 시간 내에 어떤 무대를 만들어낼지 무척 궁금해졌다.
***
심훈영의 사무실.
“자, 여기에 싸인만 하면 계약 완료.”
심훈영이 건넨 계약서에 서자명은 재빠르게 사인을 했다.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엄청 좋아하는 게 굳이 말 안 해도 다 티 났다.
“그럼 본무대에도 기대할게요.”
“믿고 맡겨 주십쇼!”
게임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그의 의욕 넘치는 모습에 성현은 또 한 번 신기했다.
그의 옆에 있던 심훈영은 웃으면서 테이블에 펼쳐놓은 계약서를 정리했다.
이것으로 서자명도 계약을 무사히 마쳤다.
그러자 서자명은 힐끗거리며 성현의 눈치를 살폈다.
“왜요?”
“예? 아니 그, 고, 고맙다구요.”
평소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잘 표현하지 않던 서자명이 어색하게 입을 뗐다.
“저한테 고마울 거 없으니까 앞으로도 지금의 간절함을 잘 기억하세요. 본인의 간절함도 다른 사람들의 간절함도 모두 소중하단 것도요.”
“네. 제가 참...... 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성현을 향한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확실히 처음 찾아왔을 때보다 훨씬 공손해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성현이 자신을 무대에 세워줘서가 아니라 성현이 오늘 무대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을 사로잡은 걸까.’
서자명은 성현이 사람들을 매료시킨 매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현은 어떤 음악을 하는 건지, 성현에 대한 모든 것들이 궁금해졌다.
게다가 어느 틈에 마음 한구석으로 성현과 함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좋은 음악 부탁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서자명은 어쩐지 음악을 처음 했을 때의 설렘이 다시 찾아온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