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오아시스 라이브바.
시끄러운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워낙 오아시스에 오는 사람들은 술에 만취해있는 상태라 또 난리를 피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소란도 들려왔다.
심훈영의 사무실로 들어간 서자명이 그에게 거의 애원하다시피 매달리고 있었다.
MTT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에 힘을 주고 참가자를 바라보던 거만스러웠던 모습은 어디 가고, 모든 게 미역 줄기 마냥 축 처졌다.
“저 실력 하난 진짜 끝내줍니다. 저번 주보다 두 배는 더 많은 관객 끌고 올 수 있습니다.
제발 계약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글쎄 그냥은 안된다니까요. 저번 주에 공연했던 친구들도 전부 무대 보고 계약한 건데 학생만 무작정 무대도 안 보고 계약해주면 불공평하지.”
“제가 참가자들 중엔 실력 제일 좋다니까? 걔들보다 훨씬 잘할 자신 있습니다.”
탈락이 눈앞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못 할까.
서자명은 확실히 실력이 좋고 감각이 뛰어나긴 했다.
그런다 해도 심훈영에겐 알 바 아니었다.
애초에 이성현마저도 무대에 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였다.
그런 그이기에 자리가 남았단 이유로 서자명을 순순히 올려줄 사람은 아니었다.
이성현처럼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한.
심훈영의 이런 생각도 모르고 서자명은 마음만 급해 자신의 목적에만 눈이 향하고 있었다.
MTT에 있을 때는 자신이 꼭대기에 있겠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밖으로 나온 이상 그도 단지 무대를 구해야 하는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무대를 계약하기 위해선 무언가 보여줘야 한다.
물결을 일렁이게 하기 위해선 돌이든 나뭇잎이든 던져봐야 하는 것이다.
허나, 그것도 하지 않는 서자명이 결과를 받아낼 수가 있겠나.
그의 아니꼬운 행동에 심훈영의 표정은 단호하기만 했다.
“안 됩니다. 그리고 이미 여기서 1주일 동안 합 맞추고 무대 한 친구들도 있는데 걔들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걔들이 누군데요?”
서자명의 질문과 동시에 때마침 성현이 심훈영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때마침 잘 왔네. 저 친구가 우리가 계약한 프로듀서니까 일단 저 친구랑 먼저 얘기해 봐요.
난 저녁 장사 준비 해야 돼서.”
심훈영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서자명은 곧바로 성현에게 다가가 다급하게 본론부터 꺼냈다.
“프로듀서 참가자 서자명이고 이곳과 계약하고 싶습니다.”
“들어올 때 봤겠지만 여긴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다른 공연장엔 가보셨나요?”
“......”
분위기는 이미 보는 대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서자명도 느꼈겠지만, 입구부터 일반 참가자들은 얼씬도 하지 말라는 기운이 맴돌았다.
이런 곳에 온 것 자체만으로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역시 전부 거절 당했나 보네.’
서자명의 침울한 표정이 성현의 질문에 답했다.
예상대로 어떤 곳에서도 안 받아준 모양.
그들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서자명의 태도에 대한 불만은 물론이고 그가 가진 재능에 대한 시기나 질투도 있었을 테니까.
어찌 보면 서자명이라는 실력 좋은 프로듀서를 이번에 떨어뜨리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협력도 필요하지만 여기는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이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 떨어트려야 살아남을 수 있단 뜻이었다.
“씽크홀 클럽에서도 안 받아줬나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현은 물었다.
그러자 서자명은 침묵을 이어가다가 변명하듯 입을 움직였다.
“딴 공연장은 필요 없습니다. 난 여기서 공연하고 싶은 거니까.”
프로듀서로서 프라이드가 엄청난 서자명은 거절당한 것에 자존심이 많이 상해 보였다.
특히나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수모에 잘 대처하지 못하는 듯했다.
암튼 이로써 요하와 주선아가 있는 공연장 역시 그를 안 받아준 것이 확실해 보였다.
다른 프로듀서와 손을 잡는 걸 꺼려하는 천소울이니까 서자명을 거절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성현도 서자명을 이대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공연을 하지도 못하고 탈락한다.
그의 행동에 비례한다면 업보 쌓인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성현은 평소와 다른 시각으로 서자명을 살폈다.
‘서자명이 가진 재능은 부정할 수 없어.’
그와 함께한다면 말 그대로 엄청난 음악적인 시너지를 뿜어댈 수가 있다.
확실히 무대 퍼포먼스나 무대장치를 적재적소에 사용해 무대 위 가수의 멋을 살려주는 데는 서자명 만한 참가자는 없었으니까.
성현과 조은별의 케미도 좋긴 하지만 무대에서 특수효과를 사용하거나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엔 무리였다.
그렇기에 서자명에게서 반드시 배우고 싶은 점이기도 했다.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배울 수만 있다면 성현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추구하지 못했던 무대를 꾸려나갈 수가 있다.
거기에 더 멀리 본다면 천소울과의 거리도 좁힐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라운드에서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고.’
게임 속에서 거쳤던 미션들을 생각해봤다.
확실히 그는 이번 라운드에서 떨쳐버리기 여러 방면으로 아까운 인물이었다.
비록 성격이 많이 오락가락했지만, 통제만 할 수 있다면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번 라운드 이후에도 서자명이 협조적으로 나와야지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 사람이 과연 이번 위기를 거친 후 잘 따라올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그렇게 성현의 고민이 길어지자 서자명은 더욱 간절해졌다.
“제발 무대만 같이 설 수 있게 해주세요. 부탁합니다.”
누구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다녔던 그가 성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 그의 성격상, 이 정도로 남에게 숙이고 들어가 부탁한 적은 없었을 거다.
서자명의 행동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어보지도 않고 생각대로 말을 뱉어냈다.
밑에서부터 일을 배워온 사람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보며 배려할 줄 아는 법.
이미 그 점에서부터 성현은 게임 속 그의 행동과 엮어봄으로써 파악이 끝났었다.
서자명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그는 자존심이 상당히 상한 듯 보였다.
‘이 사람도 나 못지않게 간절한 거구나.’
누군가에겐 고개 숙이는 일이 별일이 아닐지라도 서자명에게서 고개를 숙인다는 건 엄청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 점은 성현이 가장 잘 알기에 그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을 헤아렸을 때, 자신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더 잘하고 싶어서 참가한 건데 난 왜 누군가의 등락을 결정하려 하고 있지.’
서자명의 절박함을 보고 있자니 그의 모난 성격은 둘째치고 자신도 모르게 그의 등락을 결정지으려는 자신의 모습이 비친 것이다.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 했던 그였기에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느껴졌다.
이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 편견을 가졌던 사람들과 별 차이 없지 않은가.
성현은 곧바로 색안경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서자명과 다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이 무대가 간절한 이유가 있나요? 당신 스폰서 정도면 탈락해도 그쪽에서 품어줄 수 있을 텐데. 기회도 더 얻을 수 있을 거고.”
성현의 의견대로 이번에서 탈락한다 해도 서자명은 자신이 속해 있는 스폰서에 들어가면 된다.
이 물음에 서자명은 어떤 변명도 늘어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정할게요. 여기 떨어지더라도 기회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대로 떨어지긴 싫어요.
쪽팔립니다.”
“왜요? 일찍 떨어져서?”
“아니요. 음악으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공연장 못 구해서 떨어지는 게 쪽팔리는 겁니다.”
“그게 쪽팔리다면서 본인은 다른 참가자들한테 왜 그랬어요?”
서자명은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일이 머릿속에 그제야 제대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일이기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현을 바라보는 서자명의 눈빛이 혼란으로 뒤덮였다.
“그건......”
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막상 자신이 당해보니 이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뭐라 말하고 싶은 서자명은 입을 계속 움직여 보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성현은 멈추지 않고 서자명을 몰아붙였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해 보이는데 여기서 공연했다가 음악으로 인정 못 받고 떨어지는 게 더 쪽팔리지 않나요?”
“아니요. 그건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딱 잘라 대답했다.
이윽고 그 질문이 막혔던 구멍을 뚫은 듯 말이 줄줄 이어졌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건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인정을 못 받아 떨어진다 해도 후회 없을 만큼 노력했고 스스로한테 부끄러운 점 하나 없습니다. 부족한 만큼 더 노력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음악 외에 다른 변수로 떨어지다니, 억울하고 쪽팔립니다. 아직 보여줄 수 있는 게 더 많은데…….”
극도로 억울해하는 서자명은 뒷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대답을 들은 성현도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서자명이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런 진지한 태도는 게임을 할 땐 몰랐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진지하구나, 이 사람.’
분명 타고난 재능으로 아무런 노력 없이 탄탄대로를 걸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실체를 들여다보니 전혀 달랐다.
서자명의 성격은 다시 생각해봐도 싫었다.
그러나 무대에서 음악으로만 평가받으려 하는 그의 진지한 자세는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서자명이 스스로 부정행위를 한 것도 아니었다.
‘대단한 스폰서를 잡은 것도 서자명의 능력 덕분이고.’
그가 스폰서 빽을 통해 얻은 권한으로 공연장에 세울 가수를 선택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 또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뽑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순수히 자신의 음악적 잣대로 오디션을 봤다.
그건 MTT에서도 입증이 되었다.
‘답은 나왔네.’
성현은 잠시나마 눈을 감았다 떴다.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줄게요. 계약은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성현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서자명의 떨렸던 눈에선 광채가 생겨났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쉽지 않을 무대니 만만하게 봐선 안 될 겁니다. 뭐, 어쨌든 기회를 줬으니 한 번 최선을 다 해봐요.”
서자명은 연신 고맙단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오디션 자체를 포기하려 했던 것처럼 보였다.
이에 성현은 한 가지를 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지금 당신의 간절함은 당신이 단 몇 초만 듣고 판단해버린 참가자들이 품었던 간절함과 다를 바 없단 걸 아세요?”
서자명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성현은 그가 스스로 답을 내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솔직히 몰랐어요. 그러다 아까 그쪽이 한 말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쪽팔린 만큼 남들도 쪽팔렸겠구나. 억울했겠구나. 지금 너무 창피합니다.”
서자명의 솔직한 고백에 말이 없어졌다.
스스로 답변을 내린 것 자체가 이미 성장했단 증거였다.
‘지금 이 정도 말하는 거에 만족해야지.’
성현은 서자명에게 무대 위를 가리키는 눈빛을 보냈다.
“바로 무대에 설 수 있어요?”
“네? 네. 가능합니다.”
“준비하세요.”
서자명의 태도와 말이 모두 단순히 합격을 위한 말이 아닌, 진심이어야 하겠지만.
이것 또한 결국 무대와 관객이 증명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