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버스킹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이성현 일행의 공연에 만족해하며 자리를 떠났다.
이후 성현과 일행들은 마이크와 앰프를 정리했다.
서지현과 임하나는 곡이 바뀐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정리하고 있었다.
임하나는 당혹스러웠던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한 서지현에게 감사를 보냈다.
아마 서지현이 반주를 끊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겠지.
성현은 마이크와 선을 정리 중인 그녀들에게 다가가 미안하다는 듯 사과했다.
“미안해요. 요즘 곡 작업이 많아서 파일을 헷갈렸나 봐요.”
서지현과 임하나는 성현의 사과에 모두 별일 아니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성현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그녀들이기에 너그럽게 생각한 것이다.
“괜찮아요. 성현 씨 매일 밤새 작업하는 거 알고 있고 오히려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운 것도 있어요.”
임하나 또한 고갤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 모습에 성현은 조금은 의아하단 생각이 들어 하나에게 물었다.
“하나 씨는 1등하고 싶다 했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거야 으쌰으쌰하려고 한 말이고 무대 서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고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색다른 경험해서 더 즐거웠어요.”
하나는 정말로 무대 위를 즐겼다는 듯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서지현 역시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많은 듯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무대를 봐온 것 중에서 이번이 제일 행복해 보였다.
성현은 임하나에게 질문을 이었다.
“정말 하나도 안 아쉬워요? 괜찮은 것 맞죠?”
“네. 가사 절어서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것 빼고는 괜찮아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는 듯한 말투.
하나는 무대 사고가 나도 그것을 잘 이겨냈다는 생각과 함께, 당황한 탓에 실수한 모습이 동시에 몰려왔다.
이를 눈치챈 서지현은 곧장 임하나를 위로해줬다.
“가사 절었던 거 정말 티도 안 났다니까요? 전 하나 씨가 가사 실수 한지도 몰랐어요.”
“......진짜요?”
“그럼요. 그리고 그 앞에 무대는 완벽하게 했잖아요. 저랑 연습했던 고음도 잘 냈고. 하나 씨 진짜 보컬 트레이닝을 좀만 받으면 비욘세 뺨치는 가수 될 수 있다니까요?”
“에이, 제가 무슨 비욘세예요.”
임하나는 서지현의 칭찬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귀에 걸리며 부끄러워했다.
‘티나지 않게 배려해주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성현은 서지현을 보고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당황해서 가사까지 절었던 임하나를 잘 이끌고 갔던 것은 서지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 결과가 결코 자신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임하나를 칭찬해주며 실수를 덮어주고 있었다.
‘분명 좋은 가수가 될 재능은 충분해. 게임에서도 매번 최고의 여가수 중 하나로 꼽혀 왔으니까.’
게임을 통해 알고 있던 서지현의 가수로서의 재능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보다 성현은 게임에서는 알지 못했던 서지현의 다른 능력이 눈에 띄었다.
게임 속에서 서지현이 아무리 자주 등장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서브 캐릭터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서지현의 서사에 관해서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다.
허나 현실에서 같이 다니다 보니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항상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있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강하게 할 줄도 아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동안 같은 팀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서지현은 그저 순하고 분위기의 흐름에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성현은 단지 우유부단한 성격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게임 속에서도 조진석의 말에 따라 다른 길을 걸었었던 그녀였으니까.
그녀의 숨겨진 모습을 확인한 성현은 무언가 생각했다.
‘서지현만이 가지고 있는 무기.’
이후에 서지현이 솔로로 활동할지, 아니면 걸그룹으로 활동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활동을 하든 이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살아남기에 꼭 필요한 덕목은 있다.
리더십.
성현이 아는 서지현으로선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 점을 깨달음과 동시에, 성현은 서지현이 더욱 궁금해졌다.
돌발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판단을 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현 씨, 잠깐만.”
하나의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서지현을 성현이 따로 불렀다.
무슨 일로 부르는 건지 의아심을 가진 지현은 순순히 그의 부름에 응했다.
“버스킹 공연 때 어떻게 바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뭐가요?”
“무반주 노래요.”
“그냥 하나 씨도 많이 당황했고 관객들 기다리게 해서 무대 망치기도 싫고...... 그래서 그냥 껐어요. 그게 나을 것 같아서.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지현은 성현이 자신의 곡을 마음대로 꺼버린 것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자신이 만든 곡을 함부로 꺼버리면 기분이 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성현은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칭찬하는 분위기였다.
“아니요. 좋았어요, 정말.”
“네?”
뜻밖의 대답이 들려온 서지현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에 성현은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지현 씨는 항상 멤버들을 티 나지 않게 잘 챙겨주네요.”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는데......”
“네. 앞으로 남은 무대들도 지현 씨 덕분에 잘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항상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시니까요.”
“다행이다.”
계속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그녀가 안도하는 모습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현은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설명하듯 말했다.
“사실 너무 성현 씨한테만 기대는 것 같아 항상 미안했거든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지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닌 채 성현에게 대답했다.
성현 역시 그녀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훈훈한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다른 일행들도 어느새 서지현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모두 서지현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보냈다.
“지현 씨 덕분에 확실히 호흡도 좋아지고 고음도 자신감이 붙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지현 씨, 저번에 돌발 미션 때 저한테 장문으로 위로 메시지 보내줬잖아요. 저 그거 읽고 포기하려던 거 힘내서 일어날 수 있었어요.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요.”
임하나와 조은별의 칭찬이 부끄러운 건지 지현은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만은 활짝 웃으며 기쁨에 차 있었다.
***
“후우. 다들 준비는 됐죠?”
수요일 밤.
오아시스 라이브바 건물 앞에 선 조은별이 성현과 일행들에게 물었다.
저번과 같은 곳이지만, 그녀들은 모두 자신감을 힘껏 품은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마음 단단히 먹었어요.”
“저도요. 아저씨들 마음을 녹여버릴 거예요.”
“그런 자신감 좋아요. 그럼 들어갈까요?”
확 달라진 모습에 성현은 흡족해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주변은 여전히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딸랑-
문이 열리고 성현의 일행이 들어왔다.
종소리에 LP판을 정리하던 심훈영이 뒤를 돌아보며 그들을 맞이했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제때 왔구만.”
저번에 성현의 모습을 봤던 탓인지 심훈영은 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성현의 무대와 이들의 눈빛을 모두 봤었다.
하나같이 모두 음악에 몸을 맡긴 사람들 같았다.
그렇기에 심훈영은 당연히 올 것이라 예상을 했고, 자신의 무릎을 탁탁 털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준비는 많이 했어요?”
당연한 걸 물어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에 성현을 비롯한 일행들은 서로의 눈을 맞추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한마음이란 걸 깨달은 성현은 앞으로 나서며 모두를 대신해 답변했다.
“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요. 기대하라니까 기대해 줘야지. 준비되면 곧장 시작해요.”
이미 이들에게 호의적인 마음이 들었던 심훈영은 별말 하지 않고 미라 맡아둔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그 자리는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명당 자리.
그곳에 앉아서 성현 일행의 무대를 감상할 생각이었다.
***
오아시스 라이브바의 특성상 거의 매일 오는 단골 손님들이 많았다.
더욱이 그날 성현의 공연의 임팩트가 강했는지 성현이 무대에 올라가자 몇몇 성현을 기억하는 손님들이 아는 척을 했다.
그들의 등장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두 한마디씩 던졌다.
“저 녀석 또 왔네.”
“오늘도 개 짖는 거 들려줄 거야?”
“아니요. 오늘은 제대로 된 퍼포먼스를 보여드릴 거예요.”
자신있어 보이는 성현의 모습에 손님들은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윽고 성현이 어딘가로 손짓을 보내자 나머지 일행들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오늘은 저랑 함께 음악하는 친구들도 데려왔는데 잘 좀 부탁드려요.”
그들의 등장에 손님들은 모두 웅성거렸다.
허나 당황스러운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말을 마친 성현이 마이크를 조은별에게 넘기고 그대로 무대를 내려간 것이다.
그는 이번 무대는 온전히 멤버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조은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은별을 시작으로 서지현, 임하나가 차례로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입과 손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성현 덕분에 저번처럼 욕이 날아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응을 해주며 관심을 주지도 않은 것이다.
곧이어 손님들은 무대에 오른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그들끼리 이야기했다.
“지들이 잘 부를 생각은 안 하고 부탁은 무슨.”
“우리가 말이야 이래 봬도 쇼팡 듣는 사람들이야. 아무 노래나 안 듣는다고.”
“쇼팡이 아니라 쇼팽.”
“너 지금 나 무시하냐?”
“아이 씨. 내가 언제 또 무시했다 그래.”
“방금! 너 지금 나 고졸이라고 무시하는 거잖아. 맞아 아니야?”
손님들은 그 짧은 사이에 싸움이 났다.
그들은 다시 본래의 오아시스 바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잠시 잠잠했던 분위기는 다시 난장판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런 무대는 살아생전 처음인 멤버들이다.
그녀들은 갑자기 벌어진 싸움에 모두 당황하여 그대로 몸이 굳었다.
실제 무대에 오르니 성현의 무대를 볼 때보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소음과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이다.
“바로 시작할게요.”
조은별은 우선 멤버들을 살폈다.
모두 겁에 질려 입이 경직되어 있었다.
관객이야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의 노래를 들려주려는 마음가짐을 가졌지만, 실제로 본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다.
이대로 두면 노래 한 소절도 못 부르고 무대를 내려갈 판이었다.
이런 상태이기에 조은별은 멤버들이 더 긴장하기 전에 빨리 무대를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시작된 ‘오아시스’에서의 첫 공연.
무대 뒤편 이들 공연 도움을 위해 자리한 조은별이 준비한 곡 MR 틀고 서지현와 임하나가 듀엣을 시작했다.
성현 덕분에 노래를 듣는 이들이 있었지만, 한 번 크게 일어난 싸움 탓인지 여기저기서 고함과 욕설이 들려왔다.
지난번 가게에 없었던 손님들도 적지 않았고, 그로 인한 사고가 기어코 벌어지고 말았다.
“에이 씨, 저게 무슨 노래야. 야! 뽕짝 갖고 와.”
어디선가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발생한 성현도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
“지현 씨!”
손님 중 한 명이 무대로 쓰레기를 던져 버린 것.
그리고,
“아!”
그 쓰레기에, 서지현이 정통으로 맞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