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강아지 왈츠에 대한 설명이 끝난 직후였다.
성현의 말에 벙쪄있던 관객들은 이내 다시 원래의 태도로 돌아갔다.
나이도 어린 것이 자신들에게 한 소리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더는 참을 수 없던 그들은 다 함께 야유를 퍼부었다.
“저 새끼 저거 우리 놀리는 거지 지금.”
“쇼팽이니 팽이버섯이니 재미없으니까 꺼지라고!”
손님들의 아우성은 더욱 커져 갔지만 성현은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재미없으시구나. 그럼 이번엔 신나는 곡으로 들려드릴게요.”
분위기가 이렇게 험해져 있음에도 그는 일반 콩쿠르에서 공연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성현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무대 앞에서는 여전히 욕과 고성방가가 일어났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자 분위기에 묘한 파동이 일었다.
성현이 자신들의 욕을 일상적인 대화 마냥 평온하게 받아들이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욕을 하던 관객들이 더욱 당황한 것이다.
욕을 먹는 것에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성현에게 이유 없는 욕을 던지는 이들도, 모두 어떤 형태로든지 간의 비난과 욕을 받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일 테다.
이들은 그 마음의 상처를 지금과 같이 술로 풀었다.
하지만 성현은 아니었다.
오아시스 바를 가득 채운 취객들의 눈에는 이런 성현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시작합니다.”
손가락을 풀던 성현은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전 곡과는 확실히 다른 신나는 분위기의 스윙 재즈였다.
성현은 발을 구리며 피아노 하단에 있는 소스테누토 페달을 밟았다.
하나의 음이 길게 울리며 나머지 음은 스타카토를 치듯 빠르게 연주됐다.
손가락은 피아노에서 뛰어놀 듯 이곳저곳 이동하며 힘차게 움직였다.
페달을 놀리는 발과 강약을 조절하며 피아노를 노래하게 했다.
그의 퍼포먼스는 정말로 훌륭했다.
가벼운 분위기의 곡을 연주했지만, 품위는 일본의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처럼 고풍스러웠다.
피아노 앞에 놓인 성현의 모습은 흥에 겨워하며 이 순간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처음 클래식 곡보다 조금 더 신나고 역동적인 연주에, 성현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일행들은 기적이라도 확인한 듯 놀라워했다.
좀 전까지 성현에게 욕을 뱉던 사람들이 맞나 싶은 것이다.
‘클래식에 이어 재즈라니.’
성현의 연주를 지켜보던 심훈영도 더욱 흥미롭게 성현을 지켜봤다.
라이브 바에서 클래식을 연주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번엔 또 재즈를 연주한 것이다.
“이번 건 어땠어요? 이번 것도 재미없었어요?”
성현은 어느새 열정으로 가득 찬 땀을 한 가닥 흘려 보였다.
손님들은 쉽게 말을 뗄 수 없었다.
무대를 즐겨놓고 이제 와서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성현의 동료들이 재밌었다는 소리를 질렀다.
그의 행동에 응원을 보내며 관객들의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 것이다.
“이번에 연주한 곡은 스윙재즈란 장르인데 신나서 몸이 저절로 움직여지지 않아요? 전 너무 즐겁게 연주했는데 여러분들은 어땠어요?”
더욱 능청스럽게 물음을 던지자 몇몇 관객은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차며 다시 술을 마셨다.
허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건 아니다.
몇몇 관객에게선 조금이나마 반응이 보인 것이다.
“뭐, 아까보단 재밌네.”
“재밌긴 개뿔. 노래가 있어야 음악이지! 백날 피아노 건반 두들겨봤자 뭐가 재밌다고.”
“에이 씨부랄. 난 방금 것도 뭔 노랜지를 모르겠어. 재즈니 뭐니 복잡하기만 하고.”
“어려웠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역시 음악에 노래가 빠지면 안 되겠죠?”
성현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흔들림 없는 모습과 도저히 욕할 수 없는 실력에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다.
그들은 역시 음악인이었다.
깊은 곳 어두운 내면에 둥지를 틀며 자취를 감췄던 박자감이 꿈틀거린 것이다.
이를 알아챈 성현은 곧바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제가 분위기 파악을 못 했네요. 이번엔 제대로 한 곡 뽑아보겠습니다.”
“그려, 그려! 이번엔 신나는 걸로다가 해보라고.”
성현에게 호응을 보인 관객들은 이전에 보인 무관심은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성현은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이번엔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증을 가질 때, 성현은 무대 구석에 있는 기타를 메고 무대 중앙에 섰다.
“다들, 찐하게 한 곡 뽑아보겠습니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기타까지.
게다가 지금의 모습은 일행들이 알던 성현의 모습이 아니었다.
능청스러운 멘트를 선보이는 성현에게 그저 아연해서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평소 잔잔한 성격의 성현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움에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뭘 보여주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요.”
“글쎄요...... 근데 은별 씨.”
“네?”
“성현 씨 노래 잘하나요?”
그러고 보니, 지금껏 그의 노래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프로듀서이지, 가수 포지션은 아니었으니까.
서지현의 물음에 조은별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성현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이번엔 신나는 분위기의 포크송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나는 가네 그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 덜컹이는 기차가 지나가고 난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성현이 선택한 노래는 유명 가수의 명곡이었다.
라이브 바에 있는 또래 남자들이라면 모두가 알 법한 노래였다.
코드 자체가 어려운 노래가 아니었고 성현의 기타 실력 또한 나쁘지 않았기에 연주는 별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노래였다.
성현은 음치는 아니었지만, 결코 좋은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음정과 박자는 모두 맞지만, 절대 가수라고는 할 수 없는 실력으로 라이브 바에 있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정도의 실력은 되지 못했다.
그의 노래 실력을 알고 있던 조은별은 괜히 멋쩍어했다.
나머지 일행들도 그의 노래 실력에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그리고 역시나 성현의 노래를 들은 객석에선 비웃음과 함께 야유가 터져 나왔다.
성현은 그런 자신을 향한 비난을 즐기는 듯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레 더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성현의 무대를 지켜봤다.
“저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래?”
“욕먹는 게 즐거운가? 끝까지 안 내려가는구만.”
성현의 손 역시 열심히 기타 줄을 튕기며 손목을 휘둘렀다.
얼마 후, 노래가 끝났을 때쯤엔 라이브 바에 있던 손님의 절반 정도가 성현을 보고 있었다.
“어때요? 이번엔 흥이 좀 났나요?”
성현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야유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노래라고 하냐! 주구장창 연주만 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난 또 노래 좀 하는 놈인 줄 알았더니 것도 아니구만.”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성현의 노래가 끝나자 노래 실력에 대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거친 비난이 들려왔다.
하지만 처음 성현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의 야유와는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금세 정이 담긴 듯한 야유.
“역시 노래는 좀 아니었나요?”
“좀이 아니라 완전 별로. 노래는 두 번 다시 안 부르는 걸로.”
“준비한 게 그게 다야? 뭐 더 재밌는 것 좀 가져와 봐.”
어느새 손님들의 반응은 확실히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욕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성현의 다음 무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이유가 뭐가 됐든, 손님들은 어느새 성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라이브 바에 있던 손님 하나가 소리쳤다.
“거 노래는 내가 훨씬 잘하겠구만!”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을 보니 남자는 가장 앞자리에서 성현의 연주를 들으며 욕을 하던 손님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성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그 손님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며 말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 번 올라와서 불러보실래요?”
성현의 물음에 남자 손님은 조금 당황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주변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그를 부추겼다.
“말로만 하지 말고 보여 줘봐 어디!”
“못 올라갈걸?”
“저놈은 허구한 날 입만 털어대더니 이번에도 또 그러네.”
다른 손님들의 반응에 남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벌떡 일어섰다.
“하라면 내가 쫄 줄 알고? 다들 잘들 봐둬! 이 구역에서 누가 제일 노래 잘하는지 보여줄 테니까.”
술기가 오른 남자가 허세를 보이며 무대로 향했다.
이를 본 심영훈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었다.
‘어쭈, 제법인데.’
술집 안 분위기에 휩싸여 무대를 도망치듯 나갈 거 같았는데, 그 반대로 자신이 분위기를 이끌며 손님들을 무대 위로 움직이게 했기 때문이다.
성현은 무대에 올라온 남자에게 곧장 마이크를 건네었다.
남자는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듯 낚아채 갔다.
“어떤 노래하시게요? 반주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여유로운 질문에 남자는 조금 고민을 하다 이내 가수와 제목을 지정했다.
“이문섭. 광화문 연가 할 줄 아나?”
“물론이죠.”
곡과 가수를 듣자마자 성현은 곧장 기타로 연주를 시작했다.
남자는 마이크에 대고 아아, 크큼 하며 목을 풀더니 이내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세월 따라 모두 변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도 그대 향기 남아있어요.”
남자는 눈을 감고 얼굴이 빨개져라 소릴 지르며 열창을 했다.
허나 술에 취한 탓인지 혀가 꼬이며 종종 박자를 놓치더니 몸도 휘청거렸다.
객석에선 별로라는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술 취한 남자에겐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성현처럼 진심을 다해 마지막까지 열창을 했다.
“봤지? 이 정돈 불러줘야지.”
“참나.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불러놓곤 뭔 자신감이래.”
“뭐야? 돼지 멱따는 소리? 에라이. 야! 너 올라와!”
“네가 내려와! 노래도 못하는 게 어디서 깝치고 지랄이야.”
손님의 말에 남자가 마이크를 쥔 채 무대를 내려갔다.
그렇게 남자 둘은 싸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둘 다 잔뜩 취한 상태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허공에 손만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그 소란한 분위기 속 누군가 손을 들어 외쳤다.
“이 구역에서 노래 제일 잘하는 놈은 바로 나 최민식이여!”
남자는 큰소리로 외치더니 벌떡 일어나 무대로 당당히 올라갔다.
“마이크 이리 줘봐. 내가 진짜 노래가 뭔지 보여줄라니까.”
최민식이란 남자는 처음 노래를 부른 남자에게서 마이크를 달라 요구했다.
그러나 남자는 마이크를 뒤로 숨기며 뺏기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왜 이래? 나 아직 안 끝났어!”
남자의 말에 최민식이란 남자의 표정이 일순 굳더니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려 했다.
그 순간, 성현은 무대 밑으로 내려가 둘 사이에 껴들었다.
“노래방에서도 다 순서가 있는 법인데 일단 마이크 주시고 예약번호 누르시죠?”
성현의 말에 최민식이란 남자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남자와 성현을 번갈아 살폈다.
이윽고 최민식은 성현에게 거세게 말했다.
“나 다음 곡은 김동식 마흔 즈음에야. 알았어?”
“물론이죠.”
남자는 성현의 확답을 듣고 이내 마이크를 넘겼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심훈영은 낮게 탄식을 뱉었다.
‘보면 볼수록 재밌는 녀석이네.’
손님은 어느새 성현의 말에 따르게 됐고 주도권이 성현으로 아무도 모르게 넘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