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암전과 동시에 적막에 빠진 무대.
무대 밑에서 임하나를 지켜보는 정기준은 여전히 기만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무대를 본 심사위원들도 그의 실력에 대해서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 정도 분위기면, 적어도 춤을 메인으로 무대를 꾸민 임하나 정도를 이기는 데 무리는 없을 테다.
한편, 대기실 안의 스크린에도 어둠 속 실루엣만 간신히 비추는 임하나의 모습이 보였다.
대기실 스크린으로 송출되는 카메라는 무대 정면에 고정된 채 무대 전체가 보이게만 촬영한다.
“시작해요!”
요하의 말에 조은별과 서지현이 모두 숨을 죽이고 스크린에 집중했다.
여기서 임하나가 지면 이성현도 탈락이다.
성현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
춤과 노래를 함께 보여준 참가자는 있었지만, 대놓고 춤을 메인으로 한 참가자는 적어도 이곳 잠실 본선장에서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렇기에 심사위원들이 임하나의 무대를 어떻게 평가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들 역시 모두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애초부터 모두의 관심이 쏠렸던 임하나와 정기준의 대결.
그중에서도, 춤으로 승부를 본다던 임하나의 이번 무대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큰 관심과 집중을 보였다.
이윽고, 어두운 무대에 조명 하나가 떨어지고 임하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누군가 그 모습을 봄과 동시에 작게 읊조렸다.
“오. 여신이다.”
한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들 모두 임하나의 자태에 감탄했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팔다리가 길고 몸 선이 곱기 때문에 더욱 청초한 느낌을 주었다.
곧이어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자 임하나는 발을 옮겼다.
그런데 그녀의 의상 중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맨발?”
“맨발로 무대에 섰다고?”
임하나가 맨발로 무대에 선 것이다.
그녀의 숨겨진 본모습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엿보인 성현의 발상이었다.
이윽고 참가자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쓰게 됐다.
임하나는 그 어떤 노래도 없이 오직 성현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움직였다.
건반을 타고 내려온 빛이 그녀를 축복해주듯 바닥에 흩뿌려졌다.
임하나는 하나의 눈송이가 되어 티 없이 고운 모습으로 선율을 타고 무대 위를 떠다녔다.
성현의 피아노 연주는 그 어느 때보다 잔잔했다.
그것이 오히려 임하나의 춤을 더욱 떠받쳐줬다.
임하나도 그의 바람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단지 몸을 움직이는 것뿐인데 음악이 표현됐다.
어느덧 하나의 춤선에 사람들 머릿속의 생각들은 모두 지워지고 시선만이 사로잡혔다.
***
무대 위 부드러운 피아노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임하나의 아름다운 춤선이 이어졌다.
심사위원들 역시 모두 넋을 놓고 지켜봤다.
“현대 무용 전공했나? 표현력이 상당하네요.”
“그러게요. 손끝이랑 발끝 디테일 좀 보세요.”
“어려운 동작을 너무 쉽게 표현해버리니까…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임하나는 발레와 현대무용을 해서 그런지 춤선이 예술이었다.
어디서 그녀를 바라보나 임하나의 춤선은 가려지지 않았다.
유연성 또한 대단해서 어려운 동작을 너무나 쉽게 표현해냈다.
하지만 그 동작이 절대 쉽지 않은 동작이란 건 전문가라면 알아볼 수 있었다.
“신기하네. 피아노 한 대 세웠는데 무대가 꽉 차네요.”
곡에는 드럼이나 전자비트 등 박자를 위한 악기는 전혀 없었다.
소리를 내는 건 오로지 성현의 피아노뿐.
거기다 멜로디 또한 느리고 잔잔하여 자칫하면 지루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여백을 임하나가 자신의 춤으로 메우고 있었던 거다.
임하나를 믿었기에 선보일 수 있는 성현의 무대 구성이었다.
“표정 연기가 압권이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설렘이 여기까지 전달되네요.”
심사위원들은 임하나의 춤선과 표현력, 안무 모든 것에 감탄했다.
하지만 이를 좋게 보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무대 아래서 그걸 지켜보고 있는 정기준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저런 느린 곡으로 임팩트를 남기긴 어려워.’
자신도 느린 발라드곡을 택했지만 임하나의 곡은 클래식 그 자체다.
저런 곡이 이런 서바이벌에 어울릴 거란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심사위원의 밝은 표정을 애써 부정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데 그 순간,
틱틱-
드럼 비트가 작게 깔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템포가 빨라졌다.
그에 맞춰 임하나의 안무 또한 점차 격동적으로 움직였지만, 디테일한 표현은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군요.”
“방금 전 동작이 처음 사랑에 빠질 때를 표현한 거라면 지금은 연애를 시작할 때 기쁨과 열정을 표현하는 것 같아요.”
“분명 템포는 빨라졌는데 강약조절은 더 세심해지고 있어요.”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무대를 보는 이들 전부가 곧 터질 것 같은 클라이맥스를 기대하는 순간,
쿵-
무언가 떨어지듯 드럼 베이스가 짧고 굵게 울렸다.
기대했던 클라이맥스는 나오지 않았다. 무대가 암전되며 노래도 멈춰버렸다.
***
대기실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참가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대 사고야?”
이제 막 제대로 된 무대를 볼 것만 같았는데 무대가 종료됐다.
검게 변한 모니터에 여기저기서 사고가 난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이를 지켜보던 조은별과 일행들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짜 사고 난 건 아니겠죠?”
혹여나 무대 심사에 영향이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된 서지현이 물었다.
그 일이 하필 성현의 무대에서 일어나다니.
은별은 그럴 일 없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어두워진 모니터만이 그녀의 앞에 있었지만 성현과 하나를 위해 바랐다.
“아닐 거예요.”
조은별의 간절한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촤악-
무대 한가운데 다시 조명이 떨어지더니 임하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고 난 무대가 복구된 줄 알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전보다 무대 앞에 자리한 임하나의 자태가 여전히 고고했다.
게다가 그녀의 의상 역시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원피스가 아닌, 블라우스와 핏감 살아있는 슬렉스. 거기에 플랫 구두처럼 보이는 신발까지.
심사위원들도 꽤나 당황한 듯한 모습과 함께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더니.
딱딱-
임하나의 발구름에 따라 박자감 넘치는 소리가 울렸다.
“탭댄스...?”
은별의 말대로였다.
임하나는 탭댄스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신고 있었던 건 구두가 아닌 탭댄스 슈즈였다.
얼마 전, 성현이 임하나에게 커넥트 앱에서 보여준 것은 바로 탭댄스 슈즈인 것이다.
설마 자신에게 탭댄스를 시키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임하나는 놀랐다.
하지만 할수록 이보다 시선을 압도하는 퍼포먼스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연습무대에서도 발이 저리도록 탭댄스를 췄었다.
조은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절대 이 오디션에서 탭댄스가 나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저거 무리수 아니야? 갑자기 웬 탭댄스냐.”
“왜? 난 신선하고 좋은데.”
“무대가 재밌긴 하네. 또 뭐가 나올까 기대감도 생기고.”
의견이 분분했다.
허나 확실한 건 하나 있다.
그들 모두 성현과 임하나 무대에 빠져들고 있다는 거였다.
임하나는 어떤 반주도 없이 탭댄스를 췄다.
임하나 본인이 어떤 장르도 소화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그녀는 탭댄스만으로 그루브를 만들며 몰입도를 형성했다.
하지만, 성현이 준비한 무기는 탭댄스만이 아니었다.
‘시작해볼까.’
성현은 임하나의 춤을 지켜 보며 두 손을 건반 위로 올렸다.
따닥-
임하나가 탭댄스로 2마디를 채웠다.
그러자,
팟-
다른 곳에 밝혀지는 조명이 신디 앞에 앉아 있는 성현을 비췄다.
그는 라이브 연주로 임하나가 선보인 박자보다 조금 더 빠른 박자로 재즈 스타일의 즉흥 연주를 보였다.
“와우.”
심사위원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성현 역시 두 마디를 연주하곤 피아노를 멈췄다.
임하나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성현의 박자보다 더 빠른 박자로 탭댄스를 췄다.
2마디 후, 성현은 다시 더욱 빠른 박자로 즉흥 연주를 시작했다.
“코드는 이전과 같은데 느낌은 전혀 다르게 진행하네요.”
“이 친구 재즈전공인가? 기본적인 센스가 있네.”
심사위원들은 임하나뿐만 아니라 성현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성현의 연주가 끝이 나고 다시 임하나가 더욱 빠르게 탭댄스로 2마디를 채웠다.
계속해서 임하나의 탭댄스 소리와 피아노의 소리가 마치 대화를 주고받듯 이어졌다.
이런 연주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다.
허나 그건 금방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고받는 춤과 연주 속에, 연인 사이 남녀 간의 사랑과 갈등이 오고 가며 감정이 극에 달하는 게 절묘하게 표현됐다.
“저만 느끼는 건가요? 연인들끼리 속삭이는 거 같은 기분.”
“저도 느꼈어요. 무대 구성이 상당히 재치 있네요. 안무 자체를 악기처럼 쓰고 있잖아요.”
심사의원들은 뜻을 깨우치자 전보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이어진 마지막 하이라이트.
임하나의 탭댄스는 계속 이어지고, 그 위로 성현의 재즈 연주가 덧칠해졌다.
따닥-
임하나의 탭댄스 박자에 성현의 연주가 얹어지면서 무대에 박자와 리듬감이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점점 빨라지는 박자와 연출 덕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마치 잔잔한 물가 위로 꽃잎들이 떨어지듯 황홀했다.
하나의 발걸음과 성현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가벼우면서 힘찬 물결이 퍼져나갔다.
어느새 임하나의 발은 육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들 어느새 입을 벌리고 무대를 지켜봤다.
“저게 가능해?”
“미쳤다, 진짜.”
“춤도 춤인데 건반 치는 사람 손가락 안 보이는 거 실화야?”
임하나의 빠른 발놀림 못지않은 성현의 빠른 연주가 눈에 띄었다.
그러니 대기실에 있는 참가자들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이제 멈출 거 같다 싶어도 계속 이어가는 연주에 심사위원들은 이제 숨을 멈추고 이를 지켜봤다.
그들의 표정은 놀랍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지거나,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들로 일관됐다.
곡이 끝나갈 때 되자, 임하나는 손뼉을 치는 동작인 ‘클랩’을 선보였다.
그 뒤로 무게 중심을 바꾸며 소리를 내는 ‘스텝’, 한 발로 점프해서 착지하는 ‘합’, 신발 앞부분을 밀면서 치는 ‘브러시’를 절묘히 사용했다.
탭댄스에서 사용되는 여러 기본적인 동작을 조합하여 탭댄스 스킬을 쉬지 않고 구사했다.
이를 또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했다.
그리고 길어지는 연주와 춤 속에 긴장감과 긴박감이 터질 듯이 높아졌다.
바닥에 수놓아진 꽃들은 어느새 하늘로 치솟아 올라 불꽃놀이를 만들어내며 화려함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였다.
쿵-
딱-!
정확히 동시에 임하나의 춤과 성현의 연주가 멈췄다.
“허억-, 허억-”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임하나 얼굴엔 땀이 흥건했지만 전혀 지쳐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난 몰입에서 깨어나, 해냈단 성취감에 물들인 얼굴이었다.
성현 역시 마찬가지. 숨을 내몰아 쉬며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이렇게 연주해본 게 얼마 만인지.’
성현 또한 오랜만에 손가락을 제대로 놀려 조금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박수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오늘 본선 1라운드, 심사위원으로부터 나온 첫 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