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임하나의 강하고 당당한 모습에 자극을 받은 걸까.
성현도 당장 떠오르는 몇 개의 아이디어가 있었다.
잊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 성현은 곧바로 테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저, 그런데.”
이제 막 태블릿 PC를 켠 순간인데, 임하나가 전과 달리 조금은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성현은 하던 동작을 멈추고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입을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정기준 선배가 춤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열 받아서 대결 신청을 하긴 했지만 쉽진 않을 거예요. 저야 떨어질 각오로 한 거지만 성현 씨는…….”
임하나는 말끝을 흐리며 말했지만 성현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임하나 본인은 상관 없는 듯했다.
자신감도 있었고, 자존심도 걸려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일에 다른 사람이 연루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막상 진짜 시작하려니, 성현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객관적으로 이번 대결이 결코 쉽지만은 않단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설프게 말을 이었다.
“무대 구성이 정말 중요할 거 같아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임하나는 말을 하면서 성현을 힐끗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도 있었지만, 성현에게 기대하는 느낌도 들어 있었다.
“걱정돼요?”
물어보는 성현의 입꼬리가 살짝 당겨져 있었다.
무대 구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것과 별개로 어떻게든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질문이었으니까.
“정기준 선배 실력 저도 아니까요.”
“그게 다예요?”
단호할 만큼 똑 부러진 물음이 그녀에게 향했다.
임하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솔직히 말했다.
“오디션 서바이벌인 만큼 춤보단 노래가 주목받을 수밖엔 없잖아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이고 현실이었다.
아예 춤을 위한 오디션이 아닌 이상, 이전까지 방송에서 나온 수많은 가수 오디션 중 오직 춤만으로 우승한 자는 없었으니까.
노래가 음악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애써 머리 아프게 표현을 빙 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전할 수 있는 방법.
그건 음악에서 노래만큼 따라올 무기는 없었다.
이 사실은 성현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현은 임하나를 골랐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
“아까 당신이 했던 말과는 다른 걱정이네요.”
임하나의 입에서 나온 단 한마디의 말.
춤과 노래도 음악에서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이성현은 임하나가 했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때문에 춤으로도 음악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한편 성현의 말을 들은 임하나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핫. 정말 창피한 질문이었네요.”
임하나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성현의 말처럼 자신이 했던 말과 지금 자신이 뱉은 걱정은 모순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임하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자신을 이렇게 믿어주고 길을 이끌어주려는 성현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자신의 본능이 계속 충돌했다.
그에 대한 마찰로 인해 만들어진 걱정이었다.
임하나는 성현을 위해서라도 이번 라운드에서 승리하고 싶었다.
그런 좋은 마음이 이내 쓸데없는 걱정을 키웠다.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던 성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노래를 아예 빼버리는 건 어떨까요.”
노래를 아예 뺀다고?
듣기만 해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을 곱씹어본 후에야 임하나의 입이 움직였다.
“무대에서 노래 없이 춤만 추라는 말씀이세요?”
“네.”
강렬한 단답.
그런 성현의 대답에 임하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분명 춤이 메인인 무대를 꾸며야 하긴 하지만 노래를 아예 없애자니.
노래가 조금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당연히 천지 차이다.
상식선에서 쉽게 이해되는 제안은 아니었다.
“아무리 반주가 있다지만 그래도 무대 위의 노래가 조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 씨가 그랬잖아요. 춤도 노래도 하나의 악기라고. 꼭 노래라는 악기로만 표현하라는 법은 없다고 봐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반면, 성현은 휴대폰을 켜 커넥트 앱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바로 상점란에 들어갔다.
[잔여 캐시 : 1150캐시]
그동안 모아온 캐시. 적지 않은 양이었다.
성현은 상점을 휘저어 무언가를 찾더니, 이내 임하나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이성현이 생각하고 있던 이번 무대를 위한 아이템.
그것을 확인한 임하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과 함께, 진짜 이것을 하겠냐는 표정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춤도 노래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악기라는 걸 증명해봅시다.”
***
본선 1라운드 대결 전날.
주최 측에선 리허설을 할 수 있게 무대를 제공했다.
스케쥴을 각각의 팀이 엇갈리게 짜서, 각 팀이 서로의 무대를 무대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경연 전 상대에게 무대가 유출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손목 아이솔레이션 동장에서 표정 조금만 더 디테일하게 가주시면 완벽할 것 같습니다.”
성현의 마지막 조언을 끝으로 무대에 있던 임하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고갤 끄덕이고 무대를 내려왔다.
“다른 건 괜찮았어요?”
“네. 다른 건 전부 완벽했어요.”
다행히 성현과 하나의 호흡은 좋았다.
임하나 역시 평범하지 않은 성현의 스타일에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워 했지만,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거 참 다행이네요.”
임하나는 성현의 반응에 만족해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리허설을 끝낸 둘이 무대를 떠나려 할 때, 커넥트 앱에 알람이 도착했다.
[공지사항]
* 참가자 전원 강당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공지 내용을 확인한 성현은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모양인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이 오디션만의 가장 특별한 이벤트가.’
그리고는 바로 하나를 데리고 강당으로 향했다.
둘이 강당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많은 참가자들이 도착해 있었다.
성현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조은별을 발견했다.
그곳엔 서지현, 김요하도 함께였다.
성현은 임하나와 함께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왜 모이라고 한 걸까요?”
“그러게요. 괜히 긴장되네요.”
임하나가 성현과 한 팀이 되었단 건 이미 알고 있던 성현 일행.
조은별이 자연스럽게 임하나에게 말을 붙였다.
이전에도 은별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온 적이 있기에, 하나 역시 경계심 없이 답했다.
임하나의 말처럼 평소보다 긴장된 분위기였다.
경연 무대도 아닌데, 꽤 많은 스탭과 AD들이 많았다.
거기에 카메라도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진지한 분위기의 강당 안이었다.
“갑자기 또 룰이 바뀌거나 그러진 않겠죠?”
지금까지 일어난 일로 봤을 때,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조은별은 걱정을 한가득 담은 모습이지만, 성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기다려보죠.”
그리고 정확히 오후 7시가 됐을 때, 강당에 한동균 메인PD가 들어왔다.
한동균PD의 등장에 참가자들은 더욱 술렁거리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AD나 스탭이 아닌 메인 PD가 나섰다는 건, 평범한 공지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중요한 공지사항 하나를 말씀드릴 겁니다.”
한동균이 직접 마이크를 들어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균의 말이 나옴과 동시에 대형 스크린에 수많은 소속사와 엔터의 로고가 떴다.
‘더 넥스트 서바이벌’이 시작되던 첫날, 오디션 시작과 동시에 대형 스크린에 떴던 그 로고들이었다.
“야 저거 TM 소속사 로고 아니냐?”
“대박. 저기 JYC도 있어.”
“와 이번 오디션 장난 없다. 한국 삼대 메이저 소속사 다 들어가 있어.”
엔터의 로고를 보자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연예계에서 소속사가 의미하는 바는 상당하다.
소속사 없이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반대로 좋은 소속사를 가진 연예인이 성공할 확률이 비교적 상당히 높다.
어느 소속사 연습생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출발선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었다.
이곳 참가자는 전부 가수 혹은 프로듀서를 꿈꾸는 이들이다.
소속사와 관련된 공지를 할 거라는 분위기에 술렁이는 것은 당연했다.
“누나, 저기 누나네 소속사 로고도 있어요.”
요하가 조은별네 소속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나름 메이저 소속사의 대표로 나왔지.
“저기가 은별 씨 소속사예요? 은별 씨, 능력자네요.”
요하가 가리킨 은별의 소속사를 보자 임하나가 감탄스레 반응했다.
주변에 잘나가는 소속사에 다니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지.
그럼에도 은별은 쑥스러운 듯 말을 돌렸다.
“성현 씨, 저런 건 갑자기 왜 띄워주는 걸까요?”
성현은 이번에도 그녀의 물음에 별다른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녀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괜히 안다고 나서봤자, 의심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은별의 질문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동균 메인PD가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앞에 보이는 로고들은 ‘더 넥스트 서바이벌’에 함께하는 소속사의 로고입니다.”
로고를 띄운 화면은 계속 넘어갔다.
그에 따라 전혀 다른 새로운 로고들이 오셀로 뒤집듯 보여졌다.
그중엔 한국의 유명한 소속사부터 시작해 처음 보는 소속사도 있었고 심지어 외국의 초대형 소속사들 로고도 있었다.
역시나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오디션답다.
아직 다른 참가자들은, 이런 로고를 보고도 오디션의 진짜 스케일을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야 저거 엔드시런 소속사 로고 아니냐?”
“대박. 미국 메이저 소속사는 다 들어가 있네.”
참가자들은 더욱 군침을 흘렸다.
한동균 PD는 아랑곳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참가자분들은 이번 오디션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을 원하는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소속사와 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한동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당이 크게 술렁거렸다.
“계약? 무슨 계약?”
“연습생 같은 개념인 건가?”
“그럼 이미 소속사 있는 애들은?”
여기저기서 궁금한 질문들이 연이어 나왔고 강당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모두 조용.”
한동균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참가자들을 휩쓸며 순식간에 장내 안은 조용해졌다.
“각 소속사에선 최대 세 명의 멘토가 ‘스폰서’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TM의 이태만 대표 JYC의 최진영 프로듀서 또한 스폰서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이름에 장내는 다시 술렁거렸다.
저 이름이 스폰서라는 이름으로 뒤에 서준다면, 그보다 든든할 수 있으랴.
그런 참가자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한동균은 충고하듯 나머지 안내사항을 전했다.
“모든 참가자에게 스폰 제안이 가는 건 아닙니다. 어떤 소속사에서 스폰 제의가 가느냐는 전적으로 참가자들 본인의 활약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스폰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거절하는 것 또한 참가자 본인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제안이 들어온다면 많은 지원과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만큼 큰 기회가 되는 건 사실이니 신중하게 선택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대로 아무나 소속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해당 소속사의 눈길을 끌어야 들어갈 수 있단 말이었다.
높은 소속사일수록 보는 눈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 소속사에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따기.
하다못해 자그만 소속사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언뜻 보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한동균의 말에 참가자들 모두 더욱 술렁거렸다.
그때, 참가자 중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스폰 제안은 참가자들의 활약에 달렸다고 하셨는데 스폰서에서 우리의 뭘 보고 판단을 한다는 거죠?”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사실 여러분들이 치른 모든 예선 영상은 스폰서들에게 선공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럼 우선 그에 대한 스폰서들의 후원 먼저 확인해보겠습니다.”
한동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띠링, 커넥트 알람이 울렸다.
알림이 온 걸 확인한 한동균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먼저 과연 나는 스폰서들에게 어떤 반응을 받았을지 궁금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