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처음의 어색한 공기는 어디 가고, 어느새 이성현과 임하나 사이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자리했다.
“어떤 춤을 원하세요?”
임하나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물었다.
춤의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팝핀, 탱고, 블루스, 비보잉, 발레 등 일반인에게 익숙한 장르부터 시작해,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르는 분야까지.
그 수많은 장르를 앞에 두고, 임하나는 무엇이든 자신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원하는 건 없습니다.”
굳이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특정 장르가 아니었다.
임하나 그녀가 가장 자신 있는 춤.
이성현 본인이 나서 구태여 장르의 틀을 구분 짓고 싶지 않았다.
“무작위로 노래 틀 테니까 프리스타일로 가시죠.”
프리스타일은 자신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음과 동시에 가장 까다로운 룰이기도 하다.
무엇이 나올지도 모르고, 당장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프리스타일을 꺼려하지만,
“프리스타일이라, 알겠어요.”
임하나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런 모습이 성현의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임하나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안은 채, 노래를 재생하는 성현.
곡이 나옴과 동시에 그녀의 몸은 움직였다.
‘박자를 가지고 노는구나.’
예상대로 임하나의 춤 실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모든 움직임이 섬세했으며, 부드럽고 유연했다.
또한, 엇박으로 포인트를 주다가도, 때론 정확한 박자에 확실한 동작을 보여줌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놓치지 않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털실을 만난 고양이처럼 곡을 가지고 노는 모습.
거기에 감정이 묻어나는 강약조절 또한 완벽했다.
단순히 춤 실력이나 순 발력외에도, 프리스타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또하나 있다.
‘안무 구성은 어떻게 하려나.’
바로 즉흥적인 안무 구성 능력.
당장이라도 임하나와 무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진짜였다.
그러나 이성현에게 안무를 구성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당연히 이성현 본인도 연구를 하겠지만, 안무 구성은 어느 정도 임하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임하나의 안무 구성 실력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다행히 그녀는 프리스타일로 춤을 추면서도, 최소한의 기승전결을 지키는 구성을 보여주었다.
들려준 곡은 아이돌의 곡이긴 했지만, 사람들에게 잘 안 알려진 수록곡이었다.
게다가 아무 곡이나 튼 것이기에 안무를 찾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의 춤이 원본 춤이라고 오해를 부를 법했다.
‘더 볼 필요도 없겠네.’
프리스타일에서 이정도라면, 작정하고 안무를 짰을 때의 실력은 의심할 필요 없어 보였다.
이성현은 확실했다.
더 이상의 테스트는 필요 없을 거라고.
임하나라면 자신이 어떻게 프로듀싱 하느냐에 따라 춤만으로도 대단한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거리거 말이다.
‘적어도 재밌게 즐기면서 준비할 순 있으니까.’
확실히 임하나에게 끌렸다.
조금 전 자신이 프로듀싱하기로 했던 남자들보다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실력을 떠나 그들에겐 없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애착이 임하나에겐 있다.
그것만 있으면 무대를 만드는데 훨씬 재밌다.
임하나도 마찬가지일 거다.
춤을 추는 내내 임하나의 표정을 열정과 흥미로 가득했다.
저 정도 춤 실력을 기르기 위해선 그동안 수천 시간을 쏟아부었을 텐데, 그럼에도 춤에 관해 일절 질리지 않은 듯한 모습.
그런 임하나를 보는 것 자체로 프로듀서로서 욕망이 또다시 솟아났다.
곡이 끝나자 임하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에 성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곧바로 말을 뱉었다.
“나랑 같이 멋진 무대 만들어볼래요?”
***
임하나와 대화를 마친 이성현은 곧장 김인호 AD를 찾았다.
그를 마주한 뒤, 처음 내뱉은 말.
“임하나 씨와 팀을 이루고 싶습니다.”
예선 2라운드 때 들었던 기권만큼이나 황당한 말에, 김인호는 다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임하나 씨랑 팀을 이루고 싶다고요?”
“네. 임하나 씨 프로듀서와는 이미 얘기 끝났습니다.”
저번부터 성현의 선택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전 기권도 그렇고, 오늘 임하나와 팀을 이루고 싶다는 말도 그렇고.
이성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선택을 내렸다.
참가자라면 당연히 당장 눈앞의 미션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때문에, 괜한 도전으로 위험에 몸을 담그는 일은 피하기 마련.
하지만 성현은 달랐다.
믿고 뛸 수 있는 에어백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우승은 이미 포기해버린 건가?
도저히 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왜 그러는 건지 이유나 물읍시다. 우승할 생각 없어요?”
“있어요.”
“근데 왜 그래요 자꾸. 떨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면 좋잖아요. 임하나 씨랑 하는 무대가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이유가 겨우 그것뿐?
즐기기 위해서라니?
여기가 단순 놀이터나 학교 동아리 활동이라도 되는 줄 아나?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핑 돌았다.
우승 보상은 무려 천만 달러다. 한화로 100억이 넘는 돈.
그것만 있으면 남은 인생을 편히 살 수가 있는데, 성현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모습이었다.
실력이 부족해서 애초에 우승 따위는 쳐다볼 수 없는 처지인 것도 아니고.
게다가 본인 말로 우승을 목표로 한다지 않나.
하지만 정작 성현은 아무렇지 않았다.
애초에 성현의 선택 기준은 우승이나 돈이 아닌 음악 그 자체였다.
우승을 원하긴 하지만, 음악적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임할 생각은 없었다.
성현의 음악에 대한 애정은 상상 이상이다.
그렇기에 다른 조건들은 따로 보지도 않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것만 생각하며 임해왔다.
물론 이를 김인호 AD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거 어마무시한 또라이네.’
김인호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질 거라 생각하는 임하나가, 이성현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것만큼 화제성이 될만한 것도 없다.
문제는 임하나 참가자가 정기준을 이기는 것이 어렵다는 거였다.
정기준 참가자의 보컬 실력이야 AD들 사이에서도 이미 어느정도 인정받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저놈은 또 그걸 해낼 거 같단 말이지.’
중요한 건, 김인호 AD 마음 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대감이었따.
만약 이성현이라면, 임하나와 함께 그런 실력의 정기준을 꺾어버릴 거 같았다.
“이길 자신 있어요? 지면 그대로 탈락입니다.”
김인호는 마지막으로 성현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다.
그의 본 마음을 떠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임하나 씨와 무대 하고 싶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바로 답하는 성현.
아예 질 것 같다는 생각조차 안 하고있는 것 같았다.
마치 임하나와 멋진 무대를 만들어서 이기는 걸 마치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있는 듯한 모습.
그런 단호한 모습에 김인호는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알겠어요. 제가 PD님한테 말씀드릴게요.”
김인호가 작게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김인호는 그렇게 성현과의 만남을 끝내고 한동균 메인PD를 찾아갔다.
한동균 PD 역시 역시 처음의 김인호와 반응이 같았다.
“뭐? 임하나 참가자랑?”
“네. 자기가 그렇게 하겠답니다.”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성현이다.
그런데 다시 제 발로 불구덩이로 들어간단다..
한동균은 잠시 어이없단 표정을 짓더니 이내 생각에 빠졌다.
이내 좋은 방안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김인호에게 물었다.
“그 이성현이란 참가자 패자부활전 뚫고 온 애 아니야?”
“맞습니다.”
김인호의 대답에 한동균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처음 이성현을 봤을 때 들었던 예상이 떠올랐다.
한동균의 PD로서의 감이, 이성현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림 괜찮게 나오네. 기권해서 떨어졌다가 패자부활전에서 살아 돌아온 프로듀서가 탈락 위기의 참가자와 팀을 자처한다라…….”
“그럼 트레이드 시킬까요?”
한동균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시청자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명장면이 넝쿨 채 굴러들어온 상황.
“작품 하나 만들어보자고.”
***
한동균의 허락이 떨어진 후, 일처리는 빠르게 진행됐다.
임하나의 기존 프로듀서가 파트너 채인지를 반대할 리 없었다.
이내 파트너 교환은 성사됐고, 이 일에 연루된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임하나는 성현의 손을 마주 잡고는 몇 차례나 고맙단 말을 반복했다.
사실 성현에게도 이번 일은 기적이었다.
제일 막바지로 들어왔는데 이렇게 훌륭한 댄서를 만나게 될 줄이야.
둘은 곧바로 무대 구상을 위한 회의를 시작했다.
“언제부터 춤을 좋아했어요?”
회의 시작 후 처음 나온 성현의 질문이었다.
단순하고 의외의 질문에 임하나는 다소 당황하며 답했다.
“신선한 질문이네요.”
“그런가요. 당연한 질문 같은데.”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말했다.
사실 성현의 질문 자체는 신선한 질문이 아니긴 했다.
이곳이 서바이벌이 아니라면 말이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긴박한 순간이다.
무대 구상을 위한 첫 회의에서 할 질문이랑은 다소 거리가 멀긴 했다.
그래서 임하나에겐 그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당연히 어떤 춤에 가장 자신이 있냐라든지, 어떤 무대를 원하는지의 질문이 나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현의 생각은 이곳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 제일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그렇기에 순수할 정도로 티 없는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낼 수 있었다.
“무대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춤과 노래 무대장치 말고 아티스트도 포함돼요. 전 아티스트에 대해 잘 알아야 그만큼 훌륭한 무대를 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 씨에 대해 알고 싶어요. 언제부터 춤을 좋아했는지.”
이성현의 가수를 대하는 태도는 일관됐다.
이전과 달리 노래가 아닌 춤을 메인으로 하는 무대를 구상해야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가수가 먼저였다.
“걸음마 떼면서부터 춤추는 걸 좋아했데요. 아직도 부모님이 틀어주신 음악에 맞춰 춤을 췄던 게 기억나요. 가끔 명절 같은 날 친척들 앞에서 춤을 추면 박수 치고 좋아해 주시곤 했어요.”
임하나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입을 뗐다.
그녀는 당시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피어있었다.
“다들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진짜 잘하는 줄 알고 춤 학원에 등록했는데 글쎄 저보다 잘하는 애들에 쌔고 쌨던 거예요. 그때부터 욕심이 생겼어요. 춤 하나로 최고가 되고 싶단 욕심이요. 그래서 춤이란 춤은 다 배웠어요. 현대무용, 발레, 재즈, 방송 댄스 안 해본 게 없어요.”
임하나는 성현이 묻지 않아도 스스로 이것저것 털어놓았다.
그 모습을 본 성현은 임하나가 춤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한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춤을 사랑하는구나.’
춤을 대하는 그녀는 언제나 진심만을 보여줬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이런 사연을 들으니 더욱 그녀에게 멋진 무대를 선물하고 싶었다.
어쩌면 임하나의 모습에서, 얼핏 자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프로듀서가 되기로 마음 먹은 후, 닥치는 대로 모두 장르를 공부했었다.
곡 작업을 하느라 며칠을 밤새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는 그저 음악이 정말 좋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성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물어봤다.
“설마 배운 걸 다 잘하진 않겠죠?”
“다 잘해요. 말만 하세요. 다 출 수 있으니까.”
임하나는 자신만만한 배짱을 보였다.
작은 체구라고 한순간이라도 얕봤다가는 큰 코 다치게 생겼다.
물론, 아군이 된 지금 이보다 든든한 태도는 없으리라.
‘다양한 장르를 다 잘한다라. 허세 부릴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임하나의 기본기가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은 이미 성현이 직접 확인한 사항.
만약 임하나의 말처럼 그녀가 모든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일단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는 있게 된다.
‘정말 재밌는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성현의 머릿속엔 온통 임하나의 무대를 어떻게 더 완벽하게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