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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21화 (21/273)

21화

두 대의 방송용 카메라와 함께 등장한 ‘더 비기너’ 멤버들이 미리 세팅된 악기 앞에 자리를 잡자, 그제야 신촌 야외 버스킹 현장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관심을 보이는 이가 많아졌고, 순식간에 꽤나 모인 사람들이 그들의 연주를 기다렸다.

이미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 비기너’ 맴버들 모두 관객을 마주하는 게 오랜만의 일이었다.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관객을 쭉 둘러봤다.

해체 전, 화려한 무대 위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수의 관객이지만, 그때보다 훨씬 긴장되는 것이 사실.

10년 만에 만나는 관객들을 보니, 반가움과 동시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후우-”

이재원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성현을 바라봤다.

삼각대에 DSLR 카메라 설치를 끝낸 성현도 이재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듯 이재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받은 이재원이, 마이크 앞에 설치된 멜로디언 위에 손가락을 살포시 얹었다.

인트로에 삽입된 단순한 멜로디언 멜로디.

원래 건반을 다룰 줄 아는 이재원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수준이었고, 그렇기에 직접 라이브로 연주하기로 결정했었다.

이윽고 작은 건반 위에 얹어진 이재원의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띠리디-띠디-

전자 멜로디언 소리가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잔잔하면서도, 어딘가 향수를 자극하는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신촌 거리.

쿵쿵-

지이잉-

곧이어 얹어지는 김동우와 최훈의 연주, 그리고 성현이 녹음한 베이스 MR이 스피커를 채웠다.

“오오-!”

“인트로 괜찮은데?”

사람들의 박수와 기대에 찬 환호와 함께, 꼬박 10년간 멈춰있던 ‘더 비기너’의 공연이 시작됐다.

“사는 게 어려워지네, 내 맘도 답답해지네, 세상은 우릴 가두고 앞만 보고 달리라 하지.”

반주 끝에 시작된 이재원의 노래.

그 목소리가 신촌 거리를 채우는 순간, 성현은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깜짝 길거리 공연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될 것이란 걸.

아니나 다를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비기너’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재원의 목소리는 나이가 들었건, 외모가 어떻건, 사람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애초에, 목소릴 떠나서 이재원은 원래 잘생기긴 했지만.

모태부터 잘생긴 얼굴이 어디 가진 않는다.

‘됐다.’

순조로운, 아니 엄밀히 말하면 기대 이상의 스타트였다.

“원하는 대로 사는 거야- 때론 넘어지더라도 내가 너의 뒤를 지켜줄 게- 깜깜한 어둠일지라도 주저앉진 않을 거야-”

‘더 비기너’ 멤버들이 젊은 시절 처음 음악을 할 때의 심경이 담긴 노랫말.

그때 느꼈던 막막하고 두려웠던 감정, 그리고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낄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에게 힘이 되는 가사임이 분명하다.

성현의 편곡 덕에 옛노래 특유의 촌스러운 느낌도 많이 지워냈다.

원곡의 향수를 살리면서도 트랜디함을 함께 가져간 거다.

남녀를 불문한 관객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금방 빠져들게 하기 충분한 곡이었다.

“어, 나 저 노래 알아.”

“나도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노래가 진행될수록 하나, 둘 노래를 아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비록 곡이 데뷔 앨범 타이틀이 아닌 일반 수록곡이라, 단번에 어떤 곡인지 알아차리는 이는 극소수뿐.

하지만 꽤나 오랫동안 숨겨진 명곡으로 회자되었던 곡인지라, 젊은 사람들조차 한 번쯤은 들어봤을 노래였다.

‘역시 가지고 있는 바이브는 어디 안 가네.’

성현은 금방 무대에 적응하며 합을 맞추는 ‘더 비기너’를 보고 새삼 감탄했다.

누구도 그들이 10년이 넘는 공백을 뚫고 무대에 섰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그들의 합은 완벽했다.

게다가 어느샌가 여유롭게 관객과 소통하며 공연을 즐기기까지 했다.

아주 짧게라도, 시대를 풍미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시원스러운 드럼 연주, 몸이 절로 반응하는 기타 연주에 뻥 뚫리는 보컬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그렇게 무사히 첫 곡이 끝났고,

“와아-!”

“대박. 진짜 더 비기너잖아!”

“노래 뭐야? 엄청 좋은데?”

짝짝짝-

어느새 무섭게 몰려있던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그 모습을 옅은 미소와 함께 지켜보던 이재원이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안녕하세요. ‘더 비기너’ 보컬이었던 이재원입니다. 신촌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저희 셋이, 아니 넷이 처음 공연했던 곳이 신촌인데. 여기도 세월이 지나 조금 변했네요.”

이재원의 맨트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직 ‘더 비기너’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들의 술렁임이었다.

단 한 곡 만에 꽤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었지만 만족하긴 이르다.

이제 시작이니까.

“다음 곡은 이 세상에 저희를 알려준 곡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곡은 더 비기너의 메가 히트곡 ‘고래’였다.

이 노래는 성현이 거의 손을 보지 않았다.

이들의 색이 워낙 강할 뿐 아니라, 이들의 옛 오리지널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팬들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곡 역시 예스러움이 묻어있었지만, 성현의 판단은 정확했다.

촌스러움은, 때에 따라 강한 무기가 되곤 한다.

두 번째 곡은 전곡과 달리 신나고 강한 비트의 록이었다.

최훈이 킥 드럼과 스네어를 빠르게 치며 두 번째 곡의 시작을 알렸다.

김동우 역시 밝고 경쾌한 일렉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오픈코드로 코드 변환도 거의 없이 3코드로만 구성된 노래지만 멜로디라인 자체가 워낙 좋았다.

또한, 미리 녹음한 베이스가 조금 허전할 수 있는 부분을 메꾸어 주었다.

그리고 이번 곡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인 이재원의 목소리.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처럼 두려움도 불안도 없이 살아갈 거야.”

노래 도입부부터 이재원의 시원한 고음이 반주를 뚫고 나왔다.

이에 관객들 모두 박수와 함께 환호했고, 거리 공연장 분위기는 최고조에 도달했다.

십여 년 전, 그들의 공연 모습도 이러했다.

이재원의 고음은 제목 그대로 고래가 물살을 가르고 뛰쳐나오듯 한 기분을 줬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고래는 이재원의 애칭이 되기도 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최훈의 솔로 드럼 연주.

최훈은 머리를 흔들며 스네어와 킥 드럼, 라이드를 두들겼다.

왼손과 오른손은 쉴 새 없이 공중으로 뻗으며 스틱으로 두들겼고, 오른발도 박자를 맞추며 킥을 두들겼다.

김동우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빠르게 기타 연주를 했다.

화려한 기술의 손놀림이 호응을 보일 때마다 빠르게 움직였다.

이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예술이었다.

그저 밋밋했던 신촌의 길거리에 오색찬란한 음색으로 힘껏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두 번째 곡이 끝나갈 즈음엔, 많은 사람들은 함께 땀을 흘리며 열광하고 있었다.

‘더 비기너’의 팬들처럼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과한 반응은 아니었다.

기다리던 가수가 10년 만에 돌아왔을 때의 감격은, 직접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처음보다 몇 배로 몰려들었다.

언제 두 번 다시 ‘더 비기너’의 공연을 길거리에서 무료로 볼 수 있겠는가.

과장 조금 보태서, 신촌에 있는 모든 사람이 소식을 듣고 몰려온 듯했다.

두 번째 곡 역시 성공리에 곡을 마친 이재원은 가쁜 숨을 쉬며 말했다.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거라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음 같아선 이곳에서 밤새워 노래하고 싶은데 준비한 곡이 세 개뿐이라 다음 곡이 마지막 곡이 될 것 같습니다.”

이재원의 말에 어느새 더 비기너의 팬인 된 사람들은 모두 아쉬운 듯 탄식을 질렀다.

누군가는 아무 노래라도 좋으니 불러만 달라고 외치기도 했다.

우선, 준비한 곡을 끝낸 뒤 생각해볼 일이었다.

“지금 들려드릴 마지막 곡은 더 비기너가 은퇴 전에 마지막으로 냈던 음원인데…….”

마이크를 잡은 이재원의 목소리가 어째선지 떨렸다.

이유는 분명했다.

마지막 곡 ‘널 떠나 보내고’는 작사 작곡 모두 베이스인 심혁이 만든 곡이기 때문.

“사실 한 번도 라이브를 해본 적이 없어요. 음원을 내고 갑자기 은퇴를 하게 돼서.”

이재원 말에 사연을 알고 있는 몇몇 팬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 모두 심혁의 죽음 때문에 ‘더 비기너’가 해체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원은 오랜만에 만난 팬들 앞에서 이런 우울한 분위기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애써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다시 밝은 톤으로 마이크를 쥐었다.

“그럼 다음 곡 시작하겠습니다.”

이재원은 잠긴 목을 풀며 바닥의 물병을 집어 들었다.

물을 마시며 감정을 추스른 뒤, 다시 마이크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그 사이 최훈과 김동우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두둥- 틱- 쿵쿵-

이내 연주가 시작했다.

최훈의 재즈 그루브가 들어간 드럼 연주 인트로에 관객들은 모두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다.

‘금세 자기 걸로 만드셨네.’

드럼을 치는 최훈을 보고는 성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연습 기간 동안 성현이 이재원의 보컬 다음으로 걱정한 게 최훈의 드럼 연주였다.

그동안 아이들을 가르쳐왔기에, 드럼에 대한 감을 잃지는 않았었다.

다만, 그가 락 음악만 해왔던 것이 걱정이었다.

이번 곡의 편곡에는, 성현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재즈 그루브 느낌이 가미됐다.

락과 재즈는 엄밀히 다른 그루브를 가지고 있다.

그에 따라 드럼의 볼륨 밸런스 또한 조절해야 했다.

강한 비트를 주로 사용하는 락은 스네어의 킥드럼을 하이햇 라이드보다 상대적으로 강하게 내야 했지만, 재즈는 아니다.

재즈의 그루브를 내기 위해선 라이드의 볼륨을 스네어와 킥드럼보다 크게 내야 재즈 특유의 멋이 살기 때문이다.

볼륨 밸런스란 건 사소한 거지만 그루브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이에 성현은 특별히 최훈에게 이를 집중적으로 요청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성현의 요청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최훈의 드럼이 울려 퍼지고 있다.

최훈은 성현이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성현과 눈을 마주쳤다.

이어서 김동우의 끈적한 기타 연주가 더해졌다.

여기에 더해 이재원의 목소리가 얹어지니,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선 기분이 들었다.

이재원의 보컬은 이런 트랜디한 느낌에도 전혀 이질감 없게 잘 어울렸다.

“오늘도 흐린 하늘은 너 때문인 것 같아서- 하루 종일 너와 걷던 길을 서성여-”

세 번째 ‘널 떠나 보내고’는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사랑 노래였다.

사람들 모두 재즈에 몸을 흔들며 즐기는데 그때 갑자기 최훈의 드럼 연주가 조금 빨라지기 시작하며 볼륨 밸런스를 전환했다.

최훈은 킥드럼을 강하게 내려치며 락에 어울리는 볼륨 밸런스를 맞췄다.

그루브를 타고 이내 재즈 위에 락이 얹어진다.

트랜디한 재즈록 사운드에, 사람들 모두 함께 몸을 흔들며 그루브를 느꼈다.

그때, ‘더 비기너’ 멤버 모두가 일제히 귀에 꽂힌 인이어를 빼며 연주를 멈췄다.

무슨 사고라도 벌어진 듯,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뭔가 싶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지려는 찰나, 성현이 준비한 MR에서 베이스 솔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심혁이 살아생전 녹음했던 베이스 솔로를 노래 브릿지에 추가한 것.

지금 이 순간, 적어도 ‘더 비기너’ 멤버들에게는 심혁이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베이스 연주가 끝났고, 동시에 합주는 다시 시작되었다.

어느새 연주도 마무리 단계.

이재원이 눈을 감고 부르는 마지막 후렴구.

거리의 사람들은 노래에 몸을 맡긴 듯, 이재원과 악기가 그리는 감정선을 따라가며 손을 흔들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황홀하다.’

자신이 편곡한 곡으로 가수를 무대에 세우고, 그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일.

항상 상상만 해오던 무대가 처음으로 직접 눈 앞에 펼쳐지니,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음악을 사랑하고, 프로듀서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그 이유가 눈앞에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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