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김동우는 어둠으로 짙게 깔린 내면 속에서 이상을 생각하며 그려봤다.
자신이 ‘더 비기너’로 이루고 싶었던 이상.
“음악, 다시 들어보자.”
그것은 성현이 말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
김동우도 결국 음악인이다.
깊은 동굴 속 박혀 있던 그의 신념이 음악에 이끌려 반응했다.
그 상태로 차마 성현의 부탁을 거부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슬픔으로 속여가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싫은 거였다.
결국, 그는 성현의 음악을 다시 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여기요.”
성현은 그에게 순순히 헤드셋을 다시 건네줬다.
헤드셋을 건네받는 김동우의 표정, 그리고 이를 건네는 성현의 표정 모두 처음과 사뭇 달랐다.
만약 이번에도 김동우가 음악을 듣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 음악이 부족한 탓이겠지.’
그때가 되면 성현도 더는 김동우를 설득하긴 포기할 생각이었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더 비기너’다.
그런 그들에게 마음이 움직일 최고의 노래를 주지 못할 거라면, 놓아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허나 성현은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빌었다.
김동우가 온갖 생각들로 인해 생겨난 기분으로 주저앉았다면, 끌어안은 감정들을 발판 삼아 짓밟고 앞으로 뛰쳐 나와주기를.
김동우는 다시 헤드셋을 썼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성현이 노래를 다시 틀었다.
아까와 똑같은 음악이었다.
그의 귀로는 원곡과 다른 조금 레트로한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멜로디라인 또한 분위기에 맞춰 살짝 변형시켜놨다.
확실히 다시 들어도 충분한 매력이 있는 멜로디다.
김동우는 다시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리듬을 탔다.
이내 인트로가 끝나고, 처음 김동우의 신경을 건드렸던 첫 번째 벌스가 흘러나왔다.
원곡의 멜로디를 트렌디하게 편곡한 곡으로, 이전 처음 듣자마자 감정에 휩싸인 탓에 느끼지 못한 신선함이 느껴졌다.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김동우의 가슴이 오랜만에 벅차올랐다.
잘나가던 그 시절 무대에 섰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 노래를 무대 위에서 다시 선보일 수 있다면 어떨까, 팬들이 이 노랠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어느새 그는 무대 위를 꾸밀 생각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의 안에 자그마한 감정의 씨앗이 심어졌을 뿐인데 새로운 꽃이 피어났다.
김동우도 자신의 모습을 그제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남은 곡들도 마저 다 듣고는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그의 입에선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솔직히 곡 좋은 건 인정 할게. 노래 듣고 가슴 설렜던 것도 인정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성현이 만든 곡에는 자신들의 예전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듯 만들어졌다.
그 점은 높이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높은 평가와 달리 김동우가 여전히 좋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곡을 만들어준 성현에겐 미안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근데 너무 늦었어. 이제 와 뭘 어쩌겠다고.”
“아직 안 늦었어요. 형도 사실 그때가 그립잖아요. 다시 무대 서고 싶잖아. 그래서 다른 맴버들 전부 음악 관두고 다른 거 할 때 형 혼자 세션으로나마 음악 활동 이어온 거 아니에요?”
성현의 말이 사실이었다.
김동우는 팀의 해체 이후 세션맨으로 활동하며 다른 곡을 위해 연주해왔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엔 ‘더 비기너’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사랑했고, 그리워했고, 만에 하나라는 생각에 음악을 놓지 못했다.
사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그 마음이 연해졌다고 생각 들었다.
그러나 성현의 말과 음악을 들으니 다시 그 열정이 피어올랐다.
다시 한번 자신의 불길로 무대 위에서 여러 등불을 띄우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다르다.
이제와서 다시 무대에 선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종이를 뒤집듯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 혼자 결정할 문제 아닌 거 알잖아. 내가 허락한다 해도 다른 멤버들 반대가 심할 거야.
특히 재원이.”
이재원.
‘더 비기너’ 밴드의 보컬이자 리더였던 사람으로 성현과는 일면식이 없다.
그렇기에 성현이 그와 이야기하는 건 더욱 어려울 텐데 확고한 어조를 띠며 말했다.
“자리만 주선해줘요. 설득은 내가 할 테니까.”
그 사람이 음악인이라면 분명 자신의 얘길 듣고 아무런 아무 반응이 없진 않을 거다.
그럴게, 김동우도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래서 성현은 자신의 음악으로 그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김동우는 음악을 하고 있고 나머지 맴버들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와는 전혀 다른 고난이 있을 거라고 판단되었지만, 김동우의 눈빛은 거세게 흔들렸다.
‘어쩌면 정말......’
그의 진심이 여실히 잘 느껴진 탓에 희망이 보였다.
지금 상황으로만 간다면 충분히 이재원을 설득할 수도 있을 거다.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한동안 연락하지 않은 번호를 찾았다.
“기다려. 만나게 해줄 테니까.”
***
다음 날.
성현은 더 비기너의 드러머 최훈을 먼저 만났다.
그는 드럼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때 신들린 손놀림으로 드럼을 두들기는 그의 몸짓은 날갯짓하듯 힘차 보였다.
학생들에게 잠시나마 연주해주는 모습을 보니 역시, 그 실력은 어디 안 갔다.
성현의 설득에 김동우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다 결국 승낙을 했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 또한 김동우와 같은 거였다.
“재원이 형 설득하는 게 쉽진 않을 텐데.”
도대체 그의 성격이 어떻길래 다들 이리도 걱정하는 걸까.
성현은 그의 실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결국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해선 그를 설득할 수밖에 없겠구나.
성현은 그에 대한 걱정보단 ‘더 비기너’를 뭉치겠다는 설렘이 더 커졌다.
그렇게 패자부활전이 시작된 지 사흘이 지났다.
그제서야 성현은 이재원을 만날 수 있었다.
김동우는 성현이 오디션에 참가하고 있다는 건 말하지 않고 단순 촬영만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재원 측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카메라맨은 대동하지 않았고, 성현은 맴버들과 함께 이재원을 찾아갔다.
“재원이 너 많이 변했다. 길 가다 보면 몰라보겠는데.”
이재원은 말끔한 정장 차림에 머리도 단정하게 짧게 자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김동우가 매우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고, 최훈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그는 귀를 넘기는 살짝 긴 머리에 누가 봐도 락커라는 걸 알 수 있는 복장으로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옛 밴드 보컬이라는 걸 상상할 수 없을 외모였다.
“형 그럼 저기 회사에서 일하는 거야?”
“생각보다 내가 회사원 체질이더라고. 나랑 잘 맞아.”
이재원은 확실히 이들과 달랐다.
그는 이제 음악과 완전히 멀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형은 잘 지냈어요? 훈이 넌 살 좀 붙었다.”
이재원은 걱정과 달리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을 반가워했다.
또한 김동우의 친한 동생이란 성현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이재원은 성현의 생각보다 말투도 나긋나긋했고 배려심도 있어 보였다.
게다가 헤어스타일을 바꿔서 그런지 인상도 생각 외로 순해 보였다.
곧이어 진동벨이 울리더니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각각 주문한 메뉴를 가져가는데 아메리카노를 가져가는 이재원을 보고 김동우가 신기한 듯 말했다.
“아메리카노 쓰다고 안 먹더니.”
“그랬나?”
“뭘 그랬나야. 혁이 형이랑 둘이 맨날 커피 쓰다고 쉐이크 시켜 먹었으면서.”
그 순간, 화목했던 분위기가 먹물로 더럽혀졌다.
최훈의 말에 이재원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자신이 말실수를 했단 걸 금세 깨달은 최훈이 재빨리 입을 가렸지만, 이미 뱉어진 말이다.
검게 변한 분위기에 이재원은 급히 흰색 천을 덮어씌우듯 화제를 돌렸다.
“이 친구는 어쩌다 만난 거야?”
“아, 세션 활동하다 만났어. 프로듀싱하는 앤데 이번에 더 넥스트 서바이벌이라고 거기 참가했거든.”
김동우의 말에 이재원도 서바이벌을 아는지 관심을 보였다.
하기사 천만 달러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을 회사원인 이재원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래? 녹화 시작한 건가요?”
“네. 이제 예선 라운드 진행 중입니다.”
이재원은 고갤 끄덕이며 성현에게 뭔가를 물으려다 말았다.
아무래도 성현이 서바이벌에서 떨어진 건지 진행 중인 건지 궁금한 눈치였다.
“떨어졌습니다.”
눈치가 워낙 빠르기에 금방 대답했다.
딱히 크게 신경 쓰는 부분도 아니고 숨길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현의 말에 이재원은 괜히 머쓱해져 커피를 마셨다.
그 모습에 성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패자부활전 진행 중인데 도움을 좀 받고 싶어 왔습니다.”
“도움이요? 저한테?”
이재원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드디어 올 게 와버렸다.
뭐, 이런 건 빨리 이야기할수록 앞으로의 일을 해결하는 데 좋다.
김동우는 괜한 헛기침을 하더니 최훈을 데리고 일어났다.
“흐흠. 사실 이 친구가 너한테 할 얘기 있대서 온 거거든. 우린 나가 있을 테니까 둘이 잘 얘기해봐.”
김동우와 최훈은 둘만을 남겨둔 채 카페를 나섰다.
그들이 나가자 재원은 어리둥절했고 성현은 이재원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너뷰트 동영상 50만 찍는 게 패자부활전 미션이거든요.”
“그래서요? 제가 뭘 도와주면 될까요?”
이재원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뻑이며 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성현은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더 비기너’, 다시 무대에 세우고 싶습니다.”
성현의 말에 이재원의 표정은 예상대로 순식간에 굳었다.
“최고의 무대에 세워줄 자신 있습니다. 일단 노래라도 들어주세요.”
“음악 얘기하러 온 거면 가세요. 보다시피 음악 관둔 지 오래고 당신 오디션 도와주자고 뭉칠 만큼 가벼운 사람 아닙니다.”
이재원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성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설득시켰다.
“패자부활전이 전부는 아니에요. 아까 동우 형이 말했다시피 전 ‘더 비기너’ 때문에 처음 락음악을 듣게 됐을 정도로 팬이었어요. ‘더 비기너’한테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커요.”
“얘기 다 한 거면 가보겠습니다.”
이재원은 더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성현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프로듀서는 당연히 음악을 잘 만들 줄 알아야 하지만 그만큼 또 중요한 게 있다.
그 음악을 부를 가수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이재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프로듀서로서 성현이 해내야 하는 일이다.
처음부터 음악을 놓지 못하고 있던 김동우에겐 음악만으로 설득이 가능했지만, 완전히 마음이 닫힌 상태인 이재원에겐 먼저 닫힌 마음을 여는 게 우선이었다.
막힌 문을 뚫기 위해선, 때론 과감한 힘을 주는 것도 답이다.
성현은 그 방법으로 정공법을 택했다.
“심혁. 그분의 사망 때문인가요?”
성현의 물음에 이재원은 강하게 테이블을 내려쳤다.
테이블은 거하게 울렸고 위에 있던 커피들이 쏟아져 호수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