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눈앞에 천소울이 있다.
거기에 천소울은 자신이 그렇게 찾아다니던 꿈의 목소리를 가진 주인공이 아닌가.
‘왜 이런 상황이 펼쳐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성현에게 천소울은 게임 속 캐릭터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참가하고 있는 서바이벌 오디션이 게임 속의 것과 똑같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중요한 건 널 만났다는 거야.’
꿈꿔왔던 목소리와 꿈꿔왔던 캐릭터가 동일인물이란 게 밝혀졌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설마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될 줄이야.
덕분에 기쁨은 몇 배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천소울와 함께하고 싶은 작업들이 머릿속에 잔뜩 피어올랐다.
이미 2년 전부터 상상했던 다양한 곡들을 시작으로, 이제껏 만들지 못한 새로운 무대들을 만들고 싶어진 것이다.
‘천소울과 함께라면 최고의 무대를 만들 수 있어.’
천소울의 음색은 이미 증명됐고, 정보창 또한 그런 천소울의 재능을 증언해줬다.
그와 함께 음악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프로듀서로서 꿈꿔왔던 이상을 이룰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분명 이루고도 남을 거다.
게임 속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설령 몇 달, 몇 년이 걸리더라도 천소울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낼 것이고, 또 그 놀라운 음악을 세상에 들려줄 것이다.
이 첫 만남이, 그 역사의 시작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현은 우선 자신을 까칠하게 바라보는 천소울의 경계심부터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프로듀서 참가자 이성현이라고 해요.”
성현이 천소울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자기소개를 먼저 했다.
자신에게 상냥히 인사해오는 성현을 보고 천소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성현은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성현이 천소울을 주시하고 있을 때, 소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하며 답변했다.
“천소울입니다.”
“천소울...... 이름도 마음에 드네요. 목소린 더 마음에 들고.”
성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소울은 다시 어이없단 표정으로 돌아갔다.
마치 벌레라도 씹은 듯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눈을 찌푸려댔다.
“왜요? 내가 오바하는 거 같아요? 당신 목소리, 프로듀서라면 탐날 수밖에 없는 목소리예요.
이런 얘기 처음 듣는 것도 아닐 텐데요.”
공식적으로 처음 만난 자리인데 칭찬부터 해대니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성현은 천소울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지나치도록 목소리에 관한 칭찬을 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천소울의 얼굴에는 인상이 짙게 깔려만 갔다.
결국 참다못한 그는 속에 응어리져 있는 말을 던지듯이 내뱉었다.
“목소리에 대한 칭찬… 처음은 아니죠. 다들 하나같이 쓰레기였을 뿐.”
천소울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 섞인 말은 너무나 차가워 듣는 귀마저도 얼어붙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성현은 그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있었을 터.
그 덕에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상대로네.’
게임 속 천소울은 프로듀서를 극도로 싫어하는 캐릭터다.
그리고 그 설정이, 이번 역시 현실에서도 똑같이 반영된 듯했다.
게임 속 천소울은, 그의 마음에 든 가수 참가자와는 협동 관계를 곧잘 이어갔다.
그러나 프로듀서 참가자와는 끝까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 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음악을 하길 원했다.
게임 설정상 어떠한 사연이 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천소울은 음악에 목숨을 걸 정도로 좋은 음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노력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거절한다?
이는 누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게임 설정상에서도 천소울이 어떤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 사연에 대해선 중심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듯이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았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건 확실한데.’
천소울이 아무리 게임 속 캐릭터고 성현이 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 해도 당장 천소울의 과거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성현 역시 프로듀서 참가자이기에 그에게 좋게 보일 일은 없겠지.
다른 방도는 없다.
일단은 그에게 천천히 믿음을 쌓아가는 수밖엔 없었다.
“당신을 이용해 내 욕심 채우겠단 생각 없어요. 그저 프로듀서로서 당신이 탐나요. 천소울씨 당신이 가진 목소리와 재능도 좋고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좋아요. 최고의 곡을 선물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최고의 무대에 세우고 싶어요. 당신을 내 손으로 최고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성현은 자신의 진심을 어떻게 말해야 빠르게 전달될까 생각하며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쏟아부었다.
그러나 한결같은 모습의 천소울에겐 그 어떤 감동도 끼치지 못했다.
“다들 말은 그렇게 하더라고.”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어요? 나 지금 당장 당신한테 계약하잔 것도 아니고 같이 작업하잔 것도 아니에요. 그냥 기회가 되면 당신이랑 놀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재밌는 음악 하면서.”
분명 진심을 담아서 얘기를 했을 텐데, 천소울은 한 글자도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 모두 쳐냈다.
어지간히 큰 사건을 겪어 트라우마로 남아있나 보다.
하지만 성현은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다.
그의 말은 천소울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딱히 좋은 인상을 주진 못한 모양.
천소울이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뭔가 한마디 뱉으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입을 가로막기라도 하려는지 커넥트 앱 알림이 울렸다.
[문의 사항이 들어와서 알립니다. 한 조에는, 반드시 한 명의 프로듀서만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한 명의 프로듀서?’
알람을 본 성현은 당황해 표정이 굳었다.
이런 룰이 있다는 건 게임에서조차 보지 못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천소울 캐릭터로 게임 할 당시 딱히 한 조에 프로듀서 두 명이 들어가는 상황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자신의 앞에 천소울이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그를 바라봤다.
“그쪽 예선장에 데려가고 싶은 프로듀서가 또 있나 보죠?”
역시나 한발 늦었다.
성현이 당황한 모습을 놓칠 리 없는 천소울이 좋은 기회를 잡은 듯 여유를 되찾았다.
좀 전만 해도, 성현을 데리러 온 사람이 조은별 말고도 여럿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합격하고, 누군가는 탈락해야 한다.
성현도 결국 누구와 함께할지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제 알겠죠? 음악 하면서 놀잔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정신 차리세요. 여긴 서바이벌 오디션이고 그 사실은 이 오디션이 끝난다 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쇼 비즈니스 바닥이 그런 곳이니까.”
천소울의 말처럼 여기는 서바이벌 오디션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떨어져야 한다.
그건 천소울이나 이성현이나 마찬가지.
천소울은 뜬구름 잡힌 말로 정신 못 차리는 성현을 무시하듯 말하고 돌아섰다.
그가 성현에게 등을 보였을 때, 뒤에서 말 한마디가 그의 뒤통수에 꽂혀 들었다.
“내가 전부를 데려갈 수 있다면?”
모두를 데려간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천소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천소울에게 성현은 못을 박듯 마저 말을 끝냈다.
“내가 전부 데리고 올라가 볼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확고한 모습 때문인지, 천소울의 눈빛은 순간 작게 흔들렸다.
하지만 다시 원래대로 냉소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사람들도 다 처음엔 그렇게 말했어요. 결국엔 다 변했지만.”
그 사람들이라.
아마 지금의 천소울이 프로듀서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품게끔 한 장본인들일 테다.
이 말을 끝으로 천소울은 자신이 속한 예선장으로 발을 옮겼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그의 뒷모습을 성현은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믿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현도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천소울이 어쩌다 저렇게 꼬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눈앞에서 천소울을 보낼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그의 차갑고 까칠한 태도가 살짝 재수 없긴 했지만, 돌아선 모습도 탐나는 건 사실이었다.
더욱이 목소리며 분위기며, 실력이며. 프로듀서로서 저런 보물을 놓치는 건 말이 안 됐다.
만약 결국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고 그를 놓친다면? 지금처럼 그가 더 멀어진다면?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
그런 상황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다행인 건 아직 증명할 기회가 있다는 거다.
프로듀서와 가수 사이에는 갑을 관계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관계는 각자의 명성과 실력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천소울. 지금 당신이 갑인 건 인정할게.’
2년 전 싸클에서 들었던 노래에서도, 오늘 예선장에서 연습하는 걸 잠깐 들었을 때도 그는 성현에게 여전히 갑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언젠가 반드시 내 노래에 천소울, 당신 목소릴 입히고 말 거야.’
이제 성현에게 이 서바이벌에서 위로 올라가야 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에게 어떤 과거가 있건, 얼마나 프로듀서를 증오하건 중요한 게 아니다.
‘지켜봐. 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다는 걸 예선에서부터 증명해 줄 테니까.’
게임을 통해 ‘더 넥스트 서바이벌’에 대해 알고 있고, 앞으로 어떤 라운드가 펼쳐질지 또한 알고 있다.
갑작스럽게 놓여진 상황에서, 천소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리스크가 크지만, 걸어볼 만한 모험이었다.
딱히 다른 선택지가 생각나는 것도 아니었다.
‘재미있게 됐네.’
마침내 천소울의 등에서 거둬진 성현의 눈이 반짝였다.
***
예선장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모두 당황해 있었다.
“성현 씨 알람 봤어요? 저희 어떻게 되는 거예요?”
특히 성현과 같은 프로듀서 포지션인 조은별은 더욱 당황해 있었다.
확인된 룰에 의하면 조은별과 성현은 대결을 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마땅히 좋은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예선장에 김인호 AD가 들어왔다.
다 같이 한 팀을 이루겠다는 성현의 계획을 들은 김인호는 당장 메인 PD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에게 이성현의 계획을 말했다.
메인 PD는 숨도 쉬지 않고 걱정할 거 없다며 굳이 설명되지 않았던 룰을 읊어줬다.
이어서, 아예 커넥트 앱을 통해 전체 공지를 때려버렸다.
매 미션 참가자들의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기분 좋은 함정을 파 놓을지언정, 이런 대형 서바이벌이 허술할 리 없었다.
예선장에 들어온 김인호는 성현을 쳐다보며 남몰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대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성현과 조은별의 사이는 전부터 각별해 보였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쓸만한 소스 좀 나오겠는걸.’
더욱 흥미로워지게 흘러갈 방송 내용에 만족스러워했다.
그때 성현이 자신의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예외 사항은 없습니다. 한 조의 하나의 프로듀서. 이것이 원칙입니다.”
성현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하는 김인호.
하지만, 성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김인호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이번 라운드 기권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