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뭐라고요?”
조진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하며 되물었다.
뭔가에 홀린 듯 이리저리 멍하니 시선을 방황하던 성현이, 느닷없이 대결을 신청해왔다.
조진석이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성현은 그런 진석을 다시 무시한 채 서지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지현 씨는 스케일 연습은 그쯤하고 빨리 대결부터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제한 시간 초과해서 랜덤 매치로 가면 불이익이 있을 겁니다.”
“진짜예요?”
“불이익이 없다면 굳이 1시간 제한 시간을 줬을 이유가 없겠죠. 이번 미션은 대결 상대를 빨리 찾는 것도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될 거라 봅니다. 이번 오디션은, 기존 방송에서 보던 오디션과 많이 다를 테니까요.”
‘더 넥스트 슈퍼스타’의 시작을 알리는 멘트였다.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오디션들과 전혀 다른 쇼가 될 거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 오디션에 대한 설명이자 일종의 충고였다.
성현의 말에 서지현의 표정엔 당혹감이 서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지만, 참가자들은 초반과 달리 각자의 상대를 찾는데 바빠 보였다.
생각해보니 미션 내용에 ‘제한시간 안에 대결을 치르지 않을 시’라는 멘트를 괜히 넣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만약 정말 불이익이 있다면…….
서지현은 이내 성현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웃거렸다.
그 모습에 지현은 살짝 고갤 끄덕이며 서둘러 상대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 모습을 그저 좋게만 바라보고 있을 진석도 아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자신의 작업을 성현이 방해하자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다.
진석은 금방이라도 지현에게 달려가기 위해 발을 뗐다.
하지만 성현이 그를 곱게 보낼 리는 없다.
“자신 없어요?”
성현의 다소 도발적인 말 한마디에 조진석의 발이 바로 멈췄다.
역시, 게임 속 그의 성격상 이런 도발을 듣고만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나랑 붙자니까요. 조진석 씨는 프로듀서고 아직 대결도 안 해 상대가 필요하잖아요.”
이어지는 성현의 도발에 조진석이 표정을 굳힌 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일부러 그래요? 서지현 씨 탐나서?”
“네.”
성현의 단호한 대답에 조진석이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재밌네. 나도 서지현 씨 탐나는데.”
“그럼 우리 말은 그만하고 실력으로 승부 봐요. 사실 우리가 원한다 한들 선택은 서지현 씨가 하는 거잖아요. 서지현 씨한테 누가 더 잘났는지 보여주는 것보다 누가 이겼는지를 보여주는 게 더 먹힐 거 같은데. 어때요?”
“어리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저 진짜 잘하니까.”
“잘하는 거 알아요. 힙합라이프에도 실리고.”
“그걸 아는데도 붙잔 거예요?”
“자신 없어요?”
“난 있는데, 그쪽이 없을까 봐.”
조진석이 일부러 과장된 제스처와 함께 자신감을 나타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이었기 때문.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
조진석은 그 시선과 말투가 너무 싫었다.
그렇기에 평소에도 강한 허세를 보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성현은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애초에, 성현에게는 상대 음악가를 무시하는 마인드는 없었다.
“각자 곡 준비해서 20분 뒤에 부스 앞에서 봐요.”
“기대할게요.”
조진석은 성현을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성현의 예상치 못한 저돌적인 태도에 기가 눌린 기분은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절대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노트북을 켜고 헤드셋을 꺼내 들었다.
이후 곧바로 비트를 찍어대었다.
준비를 시작하는 건 성현도 마찬가지.
조진석의 실력은 확실히 수준급이다.
마음을 쉽게 먹을 순 없었다.
그렇게 이성현도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저 멀리 조은별이 대결 상대와 부스에 들어가는 것이 포착되었다.
‘대결 상대 찾았나 보네.’
그녀의 대결 결과에도 관심이 갔지만, 현재 자신의 작업에 집중하였다.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은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겠지.
성현은 당장 앞의 일보다 나중을 위한 큰 그림을 생각하였다.
진석을 떨어트리고, 은별과 지현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앞으로의 미션을 이겨나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성현은 진석의 속을 내밀어보듯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조진석이라면 힙합이나 R&B로 편곡을 하겠지.’
힙합, R&B라.
성현은 이내 생각에 잠겼다.
성현도 이런 추가 대결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빠르게 준비를 해야 했지만, 확실히 마음에 드는 곡 컨셉을 잡고 넘어가고 싶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조진석과 정면 대결을 할 수 있는 곡.’
확실한 승리 카드가 필요했다.
성현의 장기는 피아노와 재즈. 조진석의 장기는 힙합 R&B.
어떤 곡을 연주해야 그를 확실히 누를 수가 있을까.
고민에 빠진 그때, 성현에게 한가지 선택이 뇌리에 스쳤다.
‘이거다.’
성현은 미친 듯이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겼다.
그의 표정은 확신과 자신감에 차 있는 당당함이 보였다.
그렇게 약속한 20분이 지나고 제한 시간 20여 분을 앞두고 성현과 조진석은 프로듀서 부스 앞에서 만났다.
프로듀서 부스 안에는 이미 누군가 대결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당신 후회할 거야.”
조진석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고, 성현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부스 앞에 대기 중인 성현과 조진석을 지나 서지현이 가수 부스로 향했다.
서지현이 성현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하며 들어섰다.
아마 빠르게 대결을 펼치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에 대한 고마움 표시리라.
서지현이 성현에게만 목례를 하자, 조진석의 표정은 순간 일그러졌다.
그렇게 서지현이 가수 부스로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프로듀서 부스가 열렸다.
대결을 마치고 나온 조은별이 부스 앞에서 대기 중인 성현을 보자 싱긋 웃어 보였다.
당당히 합격해서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다행히 성현에게 화냈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축하해요.”
“자신 있다 했잖아요.”
한껏 기세 좋은 자세로 말했다.
한편 그녀의 뒤로는 기타를 든 남자가 눈물을 훔치며 나왔다.
남자는 울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더니 기타를 가방에 넣고는 곧장 예선장을 떠났다.
“저기......!”
그의 모습에 은별은 다급히 그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이미 다른 구역 사람이 되었다.
남자는 뒤도 보지 않고 예선장을 빠져나가 철문이 굳게 닫혀버렸다.
철컹, 문 닫히는 소리가 조용한 예선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예선장에 있던 참가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연습에 집중했다.
덕분에 예선장 분위기가 한층 더 살벌해졌다.
이것이 서바이벌이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건 주최 측이 밝히지 않은 함정이었다.
패배가 탈락을 의미하는 게 아니란 것.
“안타깝네요.”
조은별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본인 역시 성현이 아니었다면, 저 남자와 같은 모습으로 예선장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남자의 상황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죠. 포기한 건 그 사람의 선택이니까요.”
하지만 승부는 승부.
강한 마음을 먹지 않는 한 살아남기는 힘들다.
성현은 남자에게 조금 미안해하는 조은별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잠시나마 격려를 했다.
이제 남은 건 성현의 차례.
성현은 조진석과 함께 프로듀서 부스로 들어갔다.
***
“누가 먼저 할래요?”
“앉아서 들어봐요. 당신이 대결을 신청한 상대가 어떤 음악을 하는지.”
성현의 질문에 조진석이 도발적인 말투와 함께 먼저 미디 앞에 앉았다.
“프로듀서 포지션 우승 후보 조진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큰소리로 당차하게 외친 말에 심사위원들은 그 자신감에 웃어 보였다.
스스로 저런 말을 하다니, 배짱 하나는 인정이다.
손과 목을 풀고며 미디 건반 앞에 앉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는 자신이 준비한 힙합과 R&B 스타일로 편곡한 곡을 연주하였다.
수준급의 연주 실력이었다.
조진석은 겨울이라는 주제를 살려 차가운 느낌의 분위기를 건반만으로 연출했다.
심사위원들 또한 시선이 집중되긴 마찬가지.
오로지 피아노 하나로만 이러한 분위기를 만든 조진석의 연주에 감탄하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네요.”
“역시 힙합을 해서 그런가 깡도 있고 실력도 되고. 또 보고 싶은 참가자네요.”
“감사합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이제 다음은 성현의 차례.
그가 자리에 올라서자 심사위원들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또 왔어요? 아까 붙었잖아요.”
“제 음악 더 들려주고 싶어서 왔습니다.”
“우리야 좋지. 좋은 노래 또 듣고. 이번에도 기대할게요.”
심사위원들에게 인사한 성현이, 연주에 앞서 미디 프로그램으로 소리를 바꾸었다.
그런데, 정작 성현이 앉은 건 미디에 연결된 건반 앞이 아닌 일반 피아노 앞이었다.
잠깐의 정적.
이내 성현의 연주가 시작된다.
그런데 어째 성현이 연주를 할수록 조진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거 내 코드잖아?’
성현이 연주하는 멜로디의 기본 코드는, 다름 아닌 방금 조진석이 연주한 곡의 코드와 같았다.
작곡을 공부한 음악인이라면, 같은 코드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성현은 즉석에서 조진석의 코드를 따고, 이를 연주로 옮긴 것.
과감한 시도였다.
단순히 코드를 따온 게 끝이 아니었다.
즉석에서 따온 조진석의 코드에서 미와 시를 플랫하여 블루스 스타일로 곡을 변주하면서 미묘한 변화를 줬다.
역시나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심사위원들은 흥미롭게 그를 관찰하며 속삭였다.
“블루스 맞죠, 이거?”
“맞는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성현은 블루스의 열두 마디를 모두 완주한 이후 곧장 비슷한 코드로 재즈풍의 노래를 연주했다.
블루스에서 파생된 재즈는 블루스의 느낌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해진 마디와 박자 안에서 연주를 했던 좀 전의 블루스와는 다르게, 박자를 자유롭게 가지고 놀았다.
이것이 바로 재즈의 묘미다.
“이번엔 또 재즈로 바뀌었네요.”
“블루스에서 재즈라. 음악의 변천사를 귀로 듣는 기분이에요.”
심사위원들 모두 감탄하고 있는데 성현은 또다시 장르를 바꾸었다.
단순히 장르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성현의 왼손이 피아노에서 미디로 빠르게 이동했다.
오른손으로는 현란한 움직임으로 계속해서 피아노 건반을 눌러대었고, 왼손으로는 미디로 드럼 비트를 찍어대었다.
진석은 성현이 이 정도까지 연주를 할 줄 몰랐다는 듯 당황스러움과 함께 그의 실력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리듬 앤 블루스.
이번엔 재즈에 이어 R&B로 넘어간 것이다.
성현은 재즈의 자유로운 박자감에 트랜디한 리듬감과 비트를 더해 R&B 스타일 재즈 힙합을 완성시켰다.
자신보다 모든 부분이 압도적으로 우수했다.
“한 곡에 음악의 역사를 담아버릴 줄이야. 생각도 못했어요.”
“생각이야 할 수 있다 쳐도 저렇게 즉석에서 조진석 씨의 코드를 따와서 실제로 연주를 한 게 더 대단하네요.”
심사위원들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분위기는 바깥 상황도 마찬가지.
모두 성현의 기묘하고도 화려한 연주에 연습을 중단하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성현의 연주는 대단했다.
상대방의 연주를 자신만의 느낌과 장기를 살려 소화한 것도 모자라 장르까지 변화시킨 것이다.
“심사하러 온 건데 귀가 제대로 호강하네요.”
“매 연주마다 같은 뮤지션으로서 큰 영감 받고 가요. 고마워요.”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그의 연주는 끝이 났고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시작됐다.
심사위원의 극찬이 이어질수록 조진석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승부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