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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프로듀서는 없었다-5화 (5/273)

5화

‘은별 씨가 잘 받아들여 줘야 할 텐데.’

성현이 게임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저기 좀 봐요.”

고민의 대상이었던 조은별이 갑자기 성현을 툭, 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성현은 살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바로 조은별이 가리킨 곳을 노려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남자가 AD로 보이는 사람에게 명함을 내밀더니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누가 봐도 부정 청탁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박남길 기획본부장답네요.”

성현의 말에 조은별 조용히 고갤 끄덕이며 동의했다.

설마 저 사람도 이곳 오디션장에 참가했을 줄이야.

그는 조은별과 같은 소속사에 다니는 기획본부장이다.

또한 그는 성현에게까지 전해 들릴 만큼 평소에도 방송계 사람들에게 뇌물을 먹이는 걸로 유명했다.

떡잎부터가 그 모양인데 어디 간다고 그 성질 변하겠는가.

“노래 부르는 거 들었어요? 가지가지 하네요.”

더구나 자신의 삶에 있어 유일한 히트곡을 잘도 불러댄다.

이미 그 모습을 셀 수 없이 봐왔다는 듯 은별이 진저리나듯 고갤 저었다.

사실 박남길은 젊은 시절 가수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가 내는 모든 앨범마다 추락세를 보였다.

그 당시엔 가요의 전성기라 할 만큼 한창 핫한 가수들이 대거 출연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노래에는 화제성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우연치 않게 딱 한 곡이 대박을 일으킨 것이다.

그때 이후로 마음을 굳게 다지며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30년째 내내 우려먹으며 프로듀서랍시고 설치고 다녔다.

그 곡 덕분에 지금의 회사를 만들었기에 회사 또한 개국공신인 그를 쉽게 내치진 못해 기획본부장이란 직함을 내주었다.

하지만 프로듀싱 능력도 별로인 그를 언제든 내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나마 성격이라도 좋으면 봐줄 만하겠는데, 아니 오히려 성격도 저 모양이라 내치기엔 더 쉬우려나?

“설마 돈 받고 붙여주는 건 아니겠죠.”

“이번 서바이벌에서 청탁은 불가능할 겁니다.”

사실 청탁은 그러지 못하는 게 현실이지만 어딜 가서도 이루어지면 안 된다.

하지만 이번엔 다행스럽게 성현의 말대로 흘러갔다.

표정을 잔뜩 구긴 김인호AD가 박남길의 명함을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의 단호한 행동 때문인지 박남길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릴 떠났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도 그렇고 너무 잘 맞추시는 거 아니에요?”

“총상금 천만 달러를 내걸었는데 과연 돈이 아쉬울까요, 저들이.”

이건 게임에서 미리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성현의 말대로 온갖 글로벌 기업들이 참가한 프로젝트에 돈으로 하는 부정 청탁이 먹힐 리는 없다.

애초에 부정 청탁받는 것을 저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땅굴 속으로 들어가 살 수밖에 없을 거다.

박남길 덕에 완전히 현실로 돌아왔다.

미션이 주어지고 5분이 지날까 말까 했다.

몇몇 참가자들이 어색한 공기를 뚫고 서로의 경연 상대를 찾아 눈을 바쁘게 굴렸다.

어떤 참가자랑 경연을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어떤 참가자를 피하는 게 좋을까.

음악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서바이벌이란 특성상 경연 상대가 누구인지 또한 주요했다.

“1시간 안에 상대를 찾는 것이 좋을까요?”

조은별이 조금 초조한 듯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1시간 안에 대결을 펼치지 않으면 임의로 대결 상대가 주어진다지만, 그전에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상대와 경연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 서두르는 편이 좋기야 하겠지만, 짧은 시간 상대의 재능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은별 씨.”

한창 두리번거리고 있는 은별을 향해 성현이 불렀다.

“네?”

“저랑 대결할래요?”

은별이 순진한 얼굴로 돌아봤지만, 이어서 나오는 성현의 말에 순간적으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내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성현 씨랑 저랑요……?”

“네. 싫어요?”

반면 태연한 성현의 물음에, 조은별은 쉬이 답하지 못한 채 성현을 되레 빤히 바라봤다.

이들은 오디션 전가지만 해도 함께 작업을 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명은 떨어져야 하는 대결을 펼치자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는 건 조은별이 유독 착하거나 여려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성현이 차가울 만큼 냉정해 보일 뿐.

하지만 성현 역시 마냥 이기기 위해 냉정한 제안을 던진 게 아니었다.

성현이 복잡해 보이는 은별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어요. 우리 둘 중 누구도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미션 공지요. 자세히 다시 봐봐요.”

성현의 알 수 없는 말에 조은별은 다시 커넥트 앱을 켜서 미션 공지를 확인했다.

[예선 1라운드]

* 미션 : 임의로 파트너를 정한 후 주제에 알맞은 곡을 선정해 대결, 한 번 이상의 승리를 거두세요.

“한 번 이상의 승리가 다음 라운드 통과 조건이라면 몇 번을 지더라도 한 번의 승리만 거두면 된단 말이잖아요.”

성현의 말에 조은별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게 그 뜻이 맞을까요?”

“대결에서 진다고 해서 곧바로 탈락이라는 말은 없어요. ‘한 번 이상의 승리’라는 말은, 참가자가 한 번 이상 대결을 할 수 있다는 뜻이죠. 종합해봤을 때, 대결에서 진 쪽 역시 또 대결을 할 수 있다는 뜻일 거예요.”

“아……!”

성현의 설명에 조은별이 이내 낮게 탄식을 뱉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참가자들한테 좋은 함정이 숨어져 있었군요.”

“네. 그러니까 저랑 대결해요. 이긴 쪽은 그대로 합격, 진 쪽 역시 다음 대결을 펼치면 되잖아요. 대결 부스가 적은 만큼, 가능한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죠.”

성현의 말에 오점이라곤 없었다.

곱씹어 생각해봐도, 성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좋아요. 지더라도 원망하기 없기예요.”

조은별이 이내 자신감 있게 고갤 끄덕이며 답했다.

성현과 조은별은 대결 상대를 찾고 있는 참가자들 사이를 지나 부스로 들어갔다.

그러자 예선장에 모인 참가자들의 시선이 둘에게 집중됐다.

아직 그들에게는 미션에 대한 낯섦이 채 가시기도 전, 처음으로 성사된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참가자들뿐만이 아니었다.

‘10분은 지나서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김인호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첫 도전자가 나온 만큼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부스 안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모니터를 지켜봤다.

***

성현이 조은별과 함께 프로듀서 부스로 들어가자 전면에 보이는 심사위원석에는 심사위원 둘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모두 옷을 맞춰 입기라도 온 듯이 푸른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직 본 게임도 아니니까 마음 편히 자신의 기량을 보여달라는 모습을 하고 있듯 보였다.

시선을 돌리니 피아노를 비롯한 각종 악기들도 세팅돼 있었다.

“대결 순서는 참가자분들이 결정해 주시면 됩니다.”

심사위원이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심산이겠지만, 그렇다고 진짜 긴장을 풀 수 있는 참가자가 몇이나 될까.

“제가 먼저 할까요?”

성현이 물었다.

그다지 긴장하지 않은 듯 보이는 몇 안 되는 참가자가 바로 이성현이었다.

조은별이 고개를 끄덕였고, 성현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으면서 익숙한 악기인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성현이 타고난 강심장이기에 긴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긴장할 이유가 없었을 뿐.

‘주제는 계절.’

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머릿속엔, 서바이벌이란 단어는 없었다.

그저, 앞으로 자신이 보여줄 음악의 시작이 될 지금 무대에 온전히 집중할 뿐.

성현은 미션을 받음과 동시에 떠올렸던 곡의 음표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짚으며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

건반 위에 올라간 성현의 손가락이 가볍게 건반을 치며 움직였다.

알레그로로 시작한 가벼운 손가락 움직임이 순식간에 라르고로 바뀌며 느려진다.

특출난 손가락 기교를 부리는 건 아니다.

오로지 박자를 가지고 놀며 노래 자체에 긴장감을 만들어 냈고 벨로시티 조절 또한 완벽했다. 그의 연주는 도입부로서 완벽한 시작을 알렸다.

심사위원들 또한 성현의 재치있는 손가락 움직임에 흥미를 느끼며 몸을 좀 더 앞으로 당겼다.

성현은 좀처럼 예상할 수 없이 박자를 가지고 놀았고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보며 즉흥적으로 멜로디 라인을 바꾸기도 했다.

‘재즈?’

항상 세션 연주만 하던 성현이 재즈를 할 줄 알았다는 건 이번이 돼서야 처음 안 은별이다. 그렇기에 조금 놀라 눈동자가 커지는데 조은별이 더욱 놀랄 상황이 벌어졌다.

조은별의 귀로 문득문득 익숙한 멜로디 라인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설마 이거.....?’

혹시나 하여 이어지는 멜로디를 들어보았으나 더는 안 들어도 됐다.

조은별의 예상이 맞았다.

‘비발디 사계 중 Spring(봄) 1 악장’.

E major 곡으로 봄의 싱그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비발디의 대표곡.

성현은 그걸 재즈풍으로 자유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놀란 건 조은별뿐만 아니었다.

심사석에 있던 심사위원들 또한 비발디 사계라는 걸 눈치채고는 눈이 커졌다.

성현은 오른손으로는 대표적인 멜로디 라인을 따라가고, 왼손으로 치는 베이스 음은 재즈 특유의 리듬감을 살리며 자유롭게 깔아주었다.

누구나 아는 클래식 곡을 신선하고 트렌디하게 재해석해버렸다.

어느새 곡의 분위기는 우울한 날에서 다시 화창한 봄으로 돌아왔다.

심사위원들은 성현의 연주에 리듬을 맞추며 고갤 끄덕였다.

클래식에 몸으로 리듬을 타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성현의 연주가 끝이 나자 심사위원들을 비롯한 대결 상대인 조은별조차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성현의 연주는 대결을 떠나 음악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클래식을 재즈로 편곡한 것이 신선했습니다. 비발디 사계는 예상치도 못했어요.”

“재치 있는 연주 잘 봤어요. 피아노 연주가 상당하던데 원래 클래식을 전공했나요?”

“네. 대학 때까진 클래식 전공했습니다.”

성현의 말에 조은별은 이 역시 몰랐던 사실이란 듯 성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욱 존경의 기운이 맴돌았다.

한편 심사위원들은 그럴 줄 알았단 듯 고갤 연신 끄덕였다.

“다음 분 준비해주세요.”

심사위원의 말에 다음 차례인 조은별이 올라섰다.

그녀 역시 택한 악기는 피아노였다.

아직도 긴장이 안 풀린 듯 은별은 손가락을 풀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뒤이어 숨을 크게 들이 내쉬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조은별이 택한 노래는 봄과 관련된 유명한 힙합곡이었다.

그녀는 주로 아이돌 곡 위주로 밝은 곡을 작업했을 터.

그런 은별이 힙합을 택하자 성현도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성현의 연주를 듣고, 그녀 역시 일반적인 편곡을 해선 안 된다고 느낀 모양이다.

조은별은 보란 듯이 조금 어두운 분위기의 곡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편곡하며 연주를 이어갔다.

심사위원들 또한 고갤 끄덕이며 조은별의 연주를 들었지만, 성현의 연주를 들었을 때처럼 몸을 바짝 당겨서 듣진 않았다.

나쁘지 않은 편곡이었지만 성현이 줬던 충격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조은별의 연주가 마무리됐고, 심사위원들이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회의를 나눴다.

회의는 길지 않았다.

“그럼 심사결과 발표하겠습니다.”

심사위원 중 하나가 핸드폰을 조작하며 말했고, 동시에,

[승리.]

[예선 1라운드를 통과하셨습니다.]

성현의 핸드폰에 깔린 커넥트 앱을 통해 그의 승리와 예선 1라운드 통과 알람이 전해졌다.

결국, 성현의 승리로 대결이 끝난 것.

한편, 조은별의 핸드폰에는 아무 알람이 뜨지 않았다.

조은별이 마른침을 삼키며 심사위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럼 저는 탈락인 건가요?”

조은별은 성현의 말대로 이대로 탈락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대결에 응했다.

그럼에도 탈락 여부가 걸린 일이었기에, 조금의 불안함이 남아있던 것 역시 사실.

다행히 심사위원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아닙니다. 다음번엔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엔, 워낙 강적을 만났어요.”

이 상황을 부스 밖 화면으로 지켜보고 있던 김인호의 얼굴에도 웃음이 서렸다.

‘찾았다. 싹수 있는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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