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84화 (285/287)

< 외전(13) >

대부분 사람은 약자를 응원한다.

언더독이 탑독을 쓰러트리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선호된 이야기다.

너클볼은 까다로운 공이다. 보통의 투수라면 이걸로 프로가 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프로에서 써먹기 위한 너클볼은 낮은 회전수는 물론이거니와 괜찮은 속도까지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 둘을 병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조금만 삐끗해도 배팅볼이다.

낮은 회전수, 괜찮은 속도.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느니 차라리 빠른 속도, 높은 회전수에 집중하는 것이 편하다.

게다가 너클볼은 다른 공과는 메커니즘 자체가 다르고, 여기에 집중하는 만큼 다른 공은 점점 망가지기 마련이다. 역사상 최강의 너클볼 투수라고 불리는 성민만 보더라도 구속감소가 자연적인 에이징 커브 이상으로 가파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는 보통 실패자들이다. 주류에서 한 번 실패했고, 더이상 그걸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지만 그럼에도 야구를 포기하지 못하는 실패자들.

그렇기에 너클볼에는 로망이 있다.

마운드의 라만 그레고리가 땀으로 푹 젖은 모자를 잠시 벗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5회 말.

점수는 3:1. 원아웃에 주자 1루.

포기하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잘 버텨냈다. 공을 두들겨 맞는 것보다 공을 던질 수 없게 되는 것이 더 괴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최소한 아직 메이저리그의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질 수 있다.

타석에 박동엽이 올라왔다.

앞선 타석에서 2타수 1안타. 내야 땅볼을 끝끝내 안타로 만들어냈던 발 빠른 타자다. 최근 3년 동안 매 시즌 15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할 만큼 한 방도 있다. 물론 4년 5,500만 달러는 조금 오버페이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라만 그레고리에게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해볼 만해.’

박동엽이 방망이를 꾹 움켜쥐었다.

너클볼이라면 지난 6년 동안 질리게 당해서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지만, 라만 그레고리의 너클볼은 성민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더 느리고, 덜 움직인다.

하나를 보내고

“스트라잌!!”

지켜보고.

-뻐엉!!

휘둘렀다.

-딱!!

내야 관중석을 직격하는 타구.

볼카운트 1-2.

동엽이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헬멧을 고쳐 썼다.

그리고 네 번째.

라만 그레고리의 몸이 움직였다. 내려치는 팔의 강도, 물론 전력으로 팔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손끝의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최선의 범위. 그는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번에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70.1마일의 너클볼이 날아왔다.

동엽이 이를 악물었다. 너클볼을 치는 방법은 질리도록 들었다. 일단 마음을 편히 먹고 자신 있게 스윙을 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마지막까지 공의 위치를 살피고 예상되는 위치를 향해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방망이를 집어 던진 동엽이 일루를 향해 빠르게 질주했다. 빠른 타구가 삼루수와 좌익수 사이로 떨어졌다.

안타다.

일루의 코치가 동엽에게 이루까지 달릴 것을 지시했다. 그의 발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사이 일루 주자는 이루를 지나 삼루까지 달렸다. 에드윈 필립스가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지만 늦다.

“세이프!!”

이루타.

동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운드의 라만 그레고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잘 던진 공이 두들겨 맞는 것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기 어렵다. 하지만 아직이다. 아직 손가락에는 공을 던질 힘이 남았다.

‘어쩌지?’

보스턴의 감독이 고민에 빠졌다. 라만 그레고리가 생각보다 잘 던져준 탓이다. 2점 차이다. 이렇게 되면 승리의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불펜을 동원해야 할까? 그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이 자리에서 너클볼을 가장 잘 아는 성민에게 향했다.

‘아직입니다.’

성민의 눈빛은 그에게 아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성민의 눈빛이 그의 의사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마지막 한 톨의 무게감 정도는 실어줄 수 있다. 감독이 우선 조금 더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우습게도 브라이언 보일은 팀이 점수를 낼 것 같은 이 상황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라만 그레고리였다. 그가 막 메이저를 밟으려 할 때 이미 사이 영을 수상했던 위대한 투수. 그에게 투수의 기본을 가르쳐줬던 완벽한 롤모델.

맥스 슈피겐이 그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복잡하냐?”

“복잡은 무슨.”

“다 이해해. 나도 처음 성민을 이겼을 때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브라이언 보일이 미친놈 쳐다보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야, 너 지금까지 성민이랑 네 번 맞대결 해서 딱 한 번 이겼잖아. 그것도 시범경기에서.”

“크흠, 어쨌거나 이긴 건 이긴 거잖아.”

맥스 슈피겐 놈의 헛소리 덕분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래,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사이 영을 수상하고 팀의 혹사로 인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2년 만에 정상급의 투수로 돌아왔던 사나이다.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최악의 부상들로 고통받고 모두가 그는 끝났다고 이야기했음에도 결국 너클볼로 다시 메이저 무대에 돌아온 오뚝이다.

감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가.

그래, 그는 라만 그레고리다.

-딱!!

그리고 이어진 시원한 2타점 적시타.

라만 그레고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래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다. 오늘 라만 그레고리의 공은 기적에 닿기에 부족했다.

[라만 그레고리 4.2이닝 5실점.]

[보스턴 레드삭스 시리즈 1차전 8:3 패배!!]

***

맥스 슈피겐이 생각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구체적인 기간으로 이야기하자면 약 2년 정도?

지금까지 성민은 꾸준히 약해져 왔다. 물론 여전히 그는 리그 최정상급의 투수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1점대 평자책을 기록하던 그런 괴물은 아니다.

그리고 성민의 구속이 떨어지는 속도를 생각한다면 앞으로 길게 잡아야 2년. 36세의 그렉 매덕스와 37세 이후의 그렉 매덕스가 완전히 다른 성적을 기록했던 것처럼, 성민 역시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그 이전. 성민을 상대로 완벽한 피칭을 선보이겠다. 그리하여 리그의 지배자라는 평가를 물려받겠다. 지금 아메리칸리그에서 그것을 물려받을 수 있는 남자는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훈련했던 나 맥스 슈피겐뿐이다.

뒤늦게 너클볼 좀 배웠다고 다 늙어서 성민의 후계자 소리를 듣는 저 라만 그레고리가 아니라.

그리고 성민 역시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맥스 슈피겐의 94.7마일 속구가 존을 공략했다.

-뻐엉!!

[아슬아슬하게 빠지는 공. 매튜 쿠퍼가 잘 골라냅니다.]

젠장. 바깥쪽 꽉 찬 코스로 넣으려고 했던 공인데 빠졌다.

괜찮다. 두 번이나 빠른 공을 보여줬으니. 이번에는 느린 공으로 교란할 차례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투수가 공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어떤 타자도 그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걸 구분하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이거든요.’라고 말이다.

마침 포수도 마음이 통했는지 그에게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저 녀석 참 좋은 포수다. 본래 포수라는 건 저렇게 투수의 마음에 드는 사인을 쏙쏙 보내는 놈이 좋은 포수인 법이다. 반면 에두아르도 크루즈 그 양반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마다 던지고 싶은 공을 못 던지게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공을 던지는 건 결국 투수다. 그리고 투수란 본래 던지고 싶은 공을 던질 때 가장 좋은 공이 나오는 법이다.

77.1마일의 체인지업.

구속도 그리고 공의 움직임도 일품이었다. 이번 시즌 맥스 슈피겐의 체인지업은 리그 전체를 통틀어 두 번째로 훌륭한 체인지업으로 평가받았고 이번 공은 그 평가에 부끄럽지 않은 공이었다.

그리고

-딱!!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그의 체인지업을 두들겼다.

담장 앞까지 날아가는 이루타. 과연 이번 시즌에도 MVP를 노리는 타자답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그 ‘엿 같은 토니 그윈(fucking Tony Gwynn)’처럼 그걸 구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단지 확률과 패턴의 문제였을 뿐이다.

이번 시즌, 속구 두 개. 그리고 볼카운트 1-2상황에서 맥스 슈피겐이 가장 선호했던 공은 체인지업. 물론 공을 요청하는 건 포수지만, 맥스 슈피겐 놈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포수도 어지간하면 그 자식 성질에 맞춰주는 법이지.

경기가 흘러갔다.

어제 경기 상대 타자들이 너클볼 투수의 약점인 도루를 꾸준히 공략한 덕분에 앉았다 일어서기를 평소보다 많이 했음에도 이틀 연속 포수로 출장한 에드 맥밀란은 생각보다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다. 확실히 시즌 초반 꾸준한 휴식과 주사 치료를 받았던 것이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에두아르도 크루즈와 함께 역대 최고의 포수를 노릴만한 포텐셜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재능은 진짜배기였다. 물론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터무니 없던 프레이밍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민의 너클볼을 받기에 급급한 수준을 넘어 어느 정도 여유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그의 기량을 증명했다.

위급한 순간에 원바운드 볼을 던지더라도 절대 뒤로 흘리지 않을 포수만큼 투수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드문 법이다.

‘역시, 이래서 너클볼 투수는 좋은 짝이 필요한 법이죠. 안 그렇습니까?’

지난 2년.

성민의 성적은 상당히 떨어졌다. 그것은 그의 구속이 감소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속구 고속너클볼 체인지업 그리고 너클볼. 3년 전 사이 영을 수상했던 그의 피칭 레퍼토리는 이렇게 구속이 떨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레퍼토리였다.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하락했던 그의 성적은 잭 클린턴. 그의 공을 받는 것만으로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했던 포수 탓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잭 클린턴 탓은 아니다. 애초에 너클볼 투수의 공을, 그것도 성민 같은 터무니없는 녀석의 공을 받아내는 것은 대단한 일이니까. 이건 그냥 그 이전 성민과 호흡을 맞췄던 에두아르도 크루즈 녀석이 공을 받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메이저 역사를 통틀어 첫손가락으로 꼽을만한 괴물이었던 탓이 크다.

-딱!!

[아, 잘 맞은 타구. 우익수 앞으로 떨어지는 안타입니다!!]

물론 5회, 6회로 갈수록 실투가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김성민이다.

필 니크로가 말했다.

너는 저 투수를 본받아야 한다고.

성민은 그 투수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승보다 패가 많았다.

전성기에 비하자면 3배쯤 많은 안타와 홈런을 허용했고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를 응원했던 사람들은 기록을 위해서 아득바득 붙어 있는 투수라며 그를 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투수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래, 그에 비하자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도 언젠가는 어제의 라만 그레고리처럼 되겠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성민의 공이 에드 맥밀란의 미트를 꿰뚫었다.

그 공의 속도는 10년 전보다 4마일이나 줄었지만, 그 공에 담긴 마음은 10년 전보다 훨씬 무거웠다.

“스트라잌!!”

만 40세.

아직 그는 필 니크로가 말했던 그 순간에 다다르지 않았다.

< 외전(1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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