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2) >
“지난 2034년 보스턴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것은 유망주들의 대폭발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 보스턴의 분발은 훌륭하긴 하지만, 그리 기대할 만한 건 못 되죠. 애초에 지금 보스턴의 분투는 상수였던 성민이나 매튜 쿠퍼가 좋은 활약에 3천만 달러의 연봉 보조를 받고 데리고 온 에드 맥밀란이 예상 밖의 성적을 거둬준 결과 정도라고 봐야 하니까요. 에드 맥밀란의 실제 잔여 연봉이 3년 5,400만 달러라는 생각하면, 그리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 활약도 많이 아쉽기는 합니다만 보스턴 입장에서는 3년 2,200만에 쓰고 있는 만큼 제법 쏠쏠하죠.”
“MVP까지 해봤던 타자를 그 가격에 사용하는 건 쏠쏠한 걸 넘어서 큰 이득이죠. 저는 존 맥도웰 단장이 영리하게 잘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에드 맥밀란이 부활을 했기에 가능한 이야기지만요.”
사실 부활이라는 말은 조금 거창했다.
전성기 에드 맥밀란은 MVP까지 수상했던 ‘포수’였다.
작년을 기준으로 메이저리그 포수들의 평균 타격은 OPS 0.714에 wRC+로는 90이었다. 메이저리그 평균적인 타자의 90퍼센트 정도의 생산성만 보여도 포수 가운데는 평균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전성기 에드 맥밀란은 5년 연속 140이상의 wRC+를 기록했었다.
이번 시즌 에드 맥밀란은 0.268/0.337/0.476으로 기대 이상의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포수보다 지명타자로 출장한 경기가 더 많았기에 가능한 성적이기는 했지만, 이건 지명타자들만 꼽는다고 해도 중간은 가는 생산력이다.
그의 무릎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보스턴은 에드 맥밀란이 포수로 출장하는 날 전후로 무조건 휴식일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본래 성민의 공을 받던 잭 클린턴은 성민의 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로스터에 포함되는 것 자체가 민폐인 선수였다. 잭 클린턴과 비교했을 때 에드 맥밀란은 팀에 최소한 3승 이상을 더 가져올 수 있는 남자였다.
-딱!!
[빗맞은 타구, 유격수 잡아 이루로!! 다시 일루로!! 더블 아웃!! 라만 그레고리가 깔끔하게 이닝을 정리합니다.]
[6이닝 2실점. 오늘도 훌륭한 성적입니다. 최근에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게 보여요.]
[맞습니다. 최근 다섯 경기 27.1이닝에서 14실점. 물론 이렇게 말하면 4.61로 그렇게까지 칭찬할 성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최악이었던 지지난 경기 2.1이닝 7실점 경기를 제외하면 네 경기 25이닝 7실점으로 평자책이 2.52까지 떨어집니다. 너클볼 투수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리고 막 복귀했을 때의 성적을 생각하면 점점 폼이 올라오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올리죠.”
“하지만······.”
“압니다. 로스터 여유 없는 거. 하지만 우린 올해도 달리는 팀이잖습니까. 지금 당장 가장 가능성이 높은 투수인데 로스터 한자리 아까워할 시간이 아니에요. 최악의 경우 룰5 드래프트로 누군가 뺏기게 되더라도 지금은 올려야 할 시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렇게 뺏기게 두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말이죠.”
“알겠습니다.”
트레이드를 통한 로스터 정리.
7월 즈음 되면 대충 아, 올해는 망했다. 하는 팀들이 몇 팀은 나온다. 보스턴은 그런 팀들을 상대로 유망주와 아직 젊은 로테이션급 선수들을 매물로 나이를 먹은 능력 좋은 선수들을 사왔다.
-미친, 존 맥도웰 제정신임? 내가 에드 맥밀란까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이해하려고 했는데 무슨 팀을 양로원으로 만들 생각이야?-
-그래도 다한이랑 로버트 내주고 앙헬 데리고 온 거면 개이득 아님? 선수 클래스 차이가 있잖아.-
-아니, 22살이랑 25살. 올해 연봉 320만 달러에 서비스 타임 3년 4년 남은 선수들 내주고 2천만 달러짜리 받아왔는데 이게 이득이라고? 다한도 로버트도 장기적으로 보면 앙헬만큼 할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들이야.-
-그거야 가능성이고. 당장 우승할 수 있으면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해야지. 어차피 우리 팀은 성민이랑 매튜가 건재할 때 최대한 달려야 하는 팀이라고. 앞으로 3, 4년 바짝 달리고 그 이후 다시 노려봐야지.-
-그것도 정도가 있지. 진짜 기둥뿌리를 뽑아주고 있잖아. 게다가 얘들 데리고 3, 4년을 어떻게 뛰냐. 에드 맥밀란도 앙헬 바티스타도 전부 내년부터 드러누워도 이상하지 않은 애들이라고.-
-맞아. 게다가 이렇게 되면 우리 지금 페이롤이 거의 3억 가까운 수준임. 이거 사치세랑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설 것 같은데.-
-돈이야 구단주 그룹에서 알아서 하겠지. 난 일단 우리 팀이 이기는 게 중요함.-
만약 그런 트레이드의 결과물들이 시원찮은 성적을 기록하며 패배로 이어졌다면 구단의 여론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보스턴 레드삭스는 승리하고 또 승리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존 맥도웰의 신묘한 트레이드라고 칭송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신묘한 트레이드라기보다는 팀의 미래와 현재의 자본을 불태운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연봉 보조를 받아 가며 받아온 선수가 몇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이롤이 2억9천7백만 달러. 만약 연봉 보조를 받지 않았다면 3억4천만 달러에 달하는 미친 페이롤이다. 사실 지금 이 성적조차도 사용하는 돈에 비하자면 돈값을 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도 연봉만 졸라 쓰고 꼴찌하는 팀도 있는 마당에 돈 많이 쓰고 그 돈 쓴 만큼 성적 내면 그것만으로도 능력 있는 단장이지 뭐.”
하지만 그럼에도 승리는 모든 것을 정당하게 한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은 2년 만에 다시 포스트시즌에 도전하고 있는 팀을 응원했다.
그리하여 7월이 지나고 8월.
오리올 파크 앳 캠든야즈.
볼티모어와의 3연전. 지구 1위와 2위 팀의 맞대결.
“선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한때 그의 우상이자 멘토였던
하지만 이제는 메이저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하는.
브라이언 보일이 라만 그레고리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시작은 라만 그레고리 쪽이 훨씬 나았다.
커리어 3년 차에 사이 영을 타내는 투수는 흔치 않았으니까. 반면 브라이언 보일 쪽은 리그 에이스급 포텐셜이라는 소리를 4년 차까지 들었다. 4년 차까지도 포텐셜만 리그 에이스급이지 안정적인 에이스 투수 취급은 받지 못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둘의 커리어는 극명하게 갈렸다. 3년 차에 사이 영을 타냈던 투수는 역대급 먹튀로 기억됐고 4년 차까지 리그 에이스급 포텐셜 소리를 듣던 투수는 이대로 커리어를 잘 이어간다면 어쩌면 명예의 전당도 노려볼 수 있는 위치에 섰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만 그레고리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된 게 어디냐. 여전히 둘 다 푸른 유니폼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러게요.”
탬파베이 레이스는 수익성 좋은 구장으로 홈을 옮겼음에도 그리 잘 나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대형 FA 둘 정도는 잡을만한 돈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잡은 FA들이 제법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브라이언 보일 이후로 탬파베이 산 에이스의 계보가 끊긴 탓이었다.
“내일은 전력을 다할 겁니다.”
라만 그레고리에게 체인지업의 그립을 배우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았다. 하지만 이제 브라이언 보일의 나이도 서른둘. 그토록 떠들어대던 리그 에이스급의 포텐셜을 완벽하게 터트린 진짜배기 에이스다. 서른다섯에 간신히 메이저에 올라온 너클볼 투수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만 그레고리는 앓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가슴을 쭉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1회 초.
브라이언 보일은 좋은 투수였다. 아니, 단순히 좋은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이번 시즌 성민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사이 영 경쟁자였으니까. 그런 투수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물론 사람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고 무조건 좋은 피칭을 보여줄 수는 없는 법이지만 최소한 이번 경기 1회 초. 브라이언 보일은 그 단단한 마음에 어울리는 피칭을 보여주었다.
브라이언 보일은 과거 라만 그레고리가 해줬던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대로 들어가는 네 슬라이더는 알고도 칠 수 없는 공이다.’
KKK.
무려 그 매튜 쿠퍼를 상대로 헛스윙 삼진.
1회 초. 브라이언 보일의 슬라이더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그리고 그가 내려간 마운드 위로 라만 그레고리가 올라왔다.
35세.
이번 시즌 AA리그에서 13경기 71과 1/3이닝 평균자책점 7.07. 그리고 메이저리그에서 3경기 14와 2/3이닝 평균자책점 4.93.
홈플레이트 너머 에드 맥밀란이 자신의 미트를 팡팡 두들겼다.
마운드에 오르기 직전까지 그가 라만 그레고리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늘 공 아주 좋았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팍팍 던지라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주 좋았다고 말할 만한 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라는 성민의 말이 아니더라도 에드 맥밀란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운드의 저 투수는 평범한 ‘선발 투수’이며 그런 녀석이 너클볼을 던진다는 것이 공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말이다.
라만 그레고리가 가볍게 호흡했다.
초구. 69.9마일의 너클볼. 살짝 복판으로 몰렸다.
타자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마지막 순간 미묘하게 뒤틀린 공이 스윗스팟을 벗어났다. 그리고 오직 수비 하나로 꾸역꾸역 메이저에서 버티는 사나이. 수비 원툴의 유격수 루시 알베리가 가볍게 공을 잡아 일루로 송구했다.
-뻐엉!!
“아웃!!”
선두타자 초구 땅볼 아웃.
덕아웃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만 그레고리의 경우 어떻게든 첫 단추만 제대로 끼우면 꾸역꾸역 경기를 끌고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 그가 라만 그레고리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애초에 적의 1등마에게 우리의 5등마를 내세운 전략이다. 운 좋게 이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그저 6이닝, 아니 7이닝을 똑바로 버텨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타석에 2번 타자 산자이 칸이 올라왔다. 작년까지 돈값 이상을 해내던 이 녀석은 이번 시즌 마침내 큰일을 해내며 올스타에까지 선정됐다. 인구수, 시장 크기. 모든 면에서 중국을 따돌리고 부상하는 인도 출신으로 덕분에 최근에는 성민의 뒤를 이어 아시아 시장에서 야구의 아이콘이 되어줄 스타 취급을 받고 있다.
-뻐엉
그의 시선이 라만 그레고리의 공을 살폈다.
빠지는 공에 손이 나오지 않는 침착함.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선구안도 선구안이지만 성민이라는 터무니없는 너클볼 투수가 던지는 너클볼에 비교하자면 라만 그레고리의 너클볼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볼티모어에서 데뷔 3년 차. 그 의미는 성민에게 3년이나 지독하게 시달렸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5구 째.
마침내 산자이 칸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솔로 홈런.
마운드의 라만 그레고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실투까지는 아니었다. 약간, 아주 약간의 힘이 더 들어갔을 뿐이다.
다만 리그의 몇몇 타자에게는 최고의 상태가 아닌 그의 69.7마일 너클볼은 담장을 넘길만한 공이었고, 산자이 칸은 그 몇몇 타자 중 하나였을 뿐이다.
라만 그레고리가 피칭을 이어갔다.
안타.
외야 플라이.
또 안타.
그리고 내야 땅볼.
1회 말 1실점.
땀으로 범벅이 된 라만 그레고리가 덕아웃으로 돌아왔을 때, 성민은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것이 성민이 그에게 보내줄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이었다. 조언? 충고?
성민은 필 니크로가 지금 자신의 곁에 있었다면 아마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은 너의 과거가 아니다. 저 녀석은 너의 미래다.’
경기가 빠르게 진행됐다.
< 외전(1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