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1) >
지난 5년 동안 성민의 평균 구속은 4.7마일이 감소했다.
-딱!!
[쳤습니다!! 좌측 방면 강한 타구!! 좌익수 에드윈 필립스. 달려갑니다!!]
[담장, 담장!! 타구 담장 상단을 직격합니다!!]
녹색의 괴물 상단을 맞고 튕겨 나오는 타구를 바라봤다.
오른쪽? 왼쪽? 빌어먹을 담장. 더럽게 까다롭다. 에드윈 필립스가 타구의 방향을 예측했다. 몸의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틀렸다.
젠장.
일순간 방향을 전환한다. 왼쪽 무릎에 어마어마한 부하가 잡혔다. 참아낸다. 다시 달린다. 하지만 늦다. 담장을 때린 공이 바닥을 굴렀다. 왼팔을 쭉 뻗어 공을 낚아챘다.
적절한 스탭. 달리던 힘 그대로 반 바퀴 몸을 돌려 글러브를 내밀고 있는 삼루수를 향해 힘차게 공을 뿌렸다.
-뻐엉!!
하지만 주자가 조금 더 빨랐다.
“세이프!!”
에드윈 필립스가 성민을 힐끔 바라봤다.
보통의 투수라면 둘 중 하나다.
분노를 표현하던지, 그걸 내색하지 않든지. 거기서 성격이 더 나쁜 녀석이라면 에드윈에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겠지.
하지만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는 성민이다.
성민이 어깨를 폈다.
그에게 이딴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물론 연기다.
‘망할. 이건 미셸 아저씨가 그리워지는데요?’
최근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내고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 말고는 딱히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지만 이런 실수를 볼 때마다 그리워지는 사람이다. 에러도 아닌 것이 이루타가 삼루타로 둔갑하다니. 이래서야 외야 플라이 하나면 추가점이다.
[원아웃 주자 3루. 7번 타자 브렛 톰슨 대신 대타 몬테 브레드쇼. 몬테 브레드쇼가 들어옵니다.]
몬테 브레드쇼라면 한 방이 있는 타자지만 당연히 지금 노리는 건 그게 아니다. 어떻게든 외야로 공을 퍼 올리고 1점을 추가하겠다는 의지다.
6월 말.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계절이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래, 나는 김성민. 이 시대 최고의 투수다.
‘그래요, 저도 압니다. 세월에는 장사 없다는 거. 하지만 아직입니다. 너클볼 투수에게 마흔은 이제 시작이죠. 안 그렇습니까?’
타석에 몬테 브레드쇼가 들어왔다.
올해 24세.
그의 얼굴에 가득 찬 감정은 기쁨이었다.
“영광입니다,”
“응?”
잠깐의 의문.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에드 맥밀란은 몬테 브레드쇼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벌써 이렇게 됐구나.
에드 맥밀란 역시 녀석과 비슷했던 순간이 있었다.
학창 시절에 TV로만 봤던 선망하던 선수와 같은 무대에 선 순간이 기억난다. 물론 에드 맥밀란은 저 녀석처럼 순수하게 ‘영광입니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감정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고 타석에 섰었다. 결과는 6구째 높은 공에 헛스윙 삼진이었지만.
자신의 경기를 보며 자라난 아이들이 프로 선수로 메이저 무대에 설 때마다 새삼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13살 차이. 그래, 에드 맥밀란이 드래프트 됐을 때 이 녀석은 아직 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나이였고, 그가 메이저에 데뷔했을 때도 아직 야구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은 나이였겠지.
은퇴를 결심했던 해, 스프링 트레이닝에 새로 합류하는 녀석들을 바라보던 케빈 체임벌린의 아련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근데 그 양반 말년에 걔들이 난장 쳤던 거 생각하면 쓸데없이 아련했던 것 같긴 하다.
젠장할.
에드 맥밀란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쓸데없이 아련한 감상이다. 나의 플레이를 보고 컸다고? 그래. 그렇다면 그 위대했던 플레이가 얼마나 매운맛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 이들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이겠지.
에드 맥밀란이 미트를 내밀었다.
그래, 지난 5년 동안 성민의 평균 구속은 4.7마일이 감소했다.
하지만 성민은 3년 전 커리어 네 번째 사이 영을 획득했다. 그 당시에도 이미 가장 빠른 공을 던지던 시절에 비하면 3마일은 평균 구속이 떨어진 다음이었는데 말이다.
필 니크로를 성불하게 했던.
그 상상 너머의 너클볼은 이미 없었다.
그가 가장 완벽하다고 극찬하던 너클볼 역시 이제는 100개를 던져 열댓 개 던지면 잘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아주 오래전부터 성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수단이 아니다. 수단이란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그의 근간이 된 필 니크로는 마지막에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 욘 마르틴을 똑똑히 봐둬라. 지금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네가 정말 힘겨워질 때가 오면 그의 선택이 얼마나 훌륭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사실 힘든 일이었다.
김성민이라는 투수는 필 니크로라는 너클볼의 화신이 벼려낸 가장 완성된 형태의 너클볼 투수였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필 니크로의 이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던 성민에게 어쩌면 필 니크로는 아버지 그 자체였다는 점이었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스승의 기쁨이다.
그리고 그 기쁨이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은 그 영재가 마침내 자신의 어깨를 딛고 일어나 더 멀리 보는 순간이다.
아버지와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닮은, 하지만 자신과 같지는 않은 아이. 항상 아버지를 따라 하겠다고 낑낑거리던 녀석이 어느 순간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일가를 이뤄내는 그 순간.
3년 전.
성민은 자신의 피칭 레퍼토리를 바꿨다.
본래 성민이 구사하던 고속 너클볼과 느린 너클볼. 그리고 속구의 조합은 강력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속구가 90마일 전후. 속구 단독으로만 봐도 50점은 나오던 시절에나 가능한 조합이었다. 실제로 2038시즌. 성민의 속구는 차라리 안 던지는 것이 나은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만약 거기서 속구의 비중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너클볼의 비중을 높이는 형태로만 갔다면? 그래,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욘 마르틴은 그러지 않았다.
성민은 자신의 피칭 레퍼토리에 한 가지를 추가했다.
-딱!!
[초구!! 쳤습니다!! 하지만 낮게 깔린 타구. 루시 알베리가 잡아서 일루에!!]
-뻐엉
“아웃!!”
[절묘하게 빠지는 체인지업이 내야 땅볼을 유도해냅니다.]
[70.7마일의 체인지업!! 김성민 선수의 체인지업. 이게 참 절묘하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고속 너클볼보다는 느리고, 저속 너클볼보다는 빠르고. 게다가 상대한 선수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잘 날아오던 공을 누가 뒤에서 쑤욱 하고 잡아당기는 느낌이에요.”
[저 체인지업이야말로 조금씩 하락세로 접어들던 김성민 선수를 다시 급반등시켰던 공이라고 평가받죠? 물론 구사율은 5퍼센트 미만이긴 합니다만, 이게 효과가 정말 대단해요. 지난 3년간의 기록만 보면 성민의 모든 공 가운데 가장 낮은 피안타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 덕분에 몇몇 전문가들은 여전히 저 공의 구사율을 더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죠.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저 공이 저런 효과를 보여주는 건 공의 위력 자체보다는 공을 던지는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히게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말이죠.]
구속이 느려지면 더 느린 공을 추가하는 것으로 타이밍을 헷갈리게 만든다.
현재 성민이 구사하는 공은 속구, 고속 너클볼, 체인지업, 너클볼이었다. 이퓨스의 경우는 지난 시즌과 지지난 시즌에는 하나도 던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2038시즌에 그걸로 재미를 너무 본 탓인지 39시즌에 작정하고 그걸 노리던 녀석들에게 무려 홈런을 두 방이나 얻어맞은 탓이었다.
‘압니다. 알아요. 2년이나 아껴뒀으면 이것도 가장 결정적일 때 한 번 정도는 써먹을 만하다는 거요.’
그리고 마지막.
타석에 8번 타자 라자로 베니테스가 올라왔다.
초구 고속 너클볼.
전성기의 그것처럼 구속과 위력을 모두 간직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들어가는 고속 너클볼은 여전히 마구에 가깝다.
그래, 제대로 들어간다면.
‘젠장!!’
사람들은 너클볼 투수의 장점으로 체력을 이야기한다. 그래 맞는 말이다. 실제로 역동적인 자세로 공을 뿌리는 다른 투수와 비교한다면, 설렁설렁 공을 던지는 것 같은 너클볼 투수는 체력적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자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큰 근육은 회복이 느린 대신 쉽게 지치지 않는다. 작은 근육은 쉽게 지치는 대신 회복이 빠르다. 너클볼 투수가 가장 크게 혹사하는 근육은 전완근. 팔을 휘두를 때 생기는 회전력을 공을 밀어내는 것으로 중화 시켜야 하는 만큼 그 혹사도는 적지 않다. 물론 다른 투수들 역시 강한 악력을 이용하여 공을 최대한 강하게 회전시켜야 하지만, 너클볼 투수의 경우는 거기에 더해 적절한 완급조절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전성기 가장 팔팔한 몸을 지니고 있던 성민과 만 40세의 성민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회복력.
15개가량의 공을 던지고 5분에서 10분을 쉬고, 다시 15개의 공을 던지는 것을 반복한다. 이전의 성민이라면 그것을 아홉 세트쯤 반복해도 실수가 없었다면 만 40세의 성민은 그것이 힘들어졌다.
떨어진 악력을 고려하여 조금 더 강한 느낌으로 공을 밀었다.
그리고 성민의 너클볼은 그대로 배팅볼로 둔갑했다.
-딱!!
아무리 8번 타자라지만 메이저리거다. 73마일의 밋밋한 속구. 그것도 코스까지 복판으로 들어오는 공을 놓쳐서야 메이저리거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좌익수 앞으로 떨어지는 안타.
삼루주자가 홈으로, 타자는 무사히 일루를 밟았다.
[라자로 베니스테의 적시타!! 7회 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1점을 추가합니다. 점수는 이제 4:3. 아직 보스턴이 1점을 앞서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인에게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한 사람이 있다. 후자의 경우 보통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굉장히 높은 사람이 많다. 성민 역시 그러하다.
후.
에드윈 필립스가 실수한 것은 그래도 참을만했다. 하지만 이건······. 부글부글 속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성민이 고개를 두어 번 가볍게 저었다.
덕아웃은 당연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난 9년 동안 성민이 그들에게 쌓아 올린 믿음은 그렇게 가볍지 않다. 여기서 설사 동점 홈런을 허용했더라도 성민이라면 흔들리지 않고 수습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성민은 그 기대에 훌륭하게 보답했다.
이어지는 9번 타자를 상대로 3구째 내야 땅볼 아웃.
성민이 또 한 번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승리를 가져왔다.
[김성민 7이닝 3실점!! 시즌 7승째 수확!! 커리어 통산 200승까지 이제 15승!!]
-이거 페이스로 보면 성민이 잘하면 이번 시즌 200승도 가겠는데?-
-11시즌 만에 200승이라니. 그것도 만 30세 시즌부터 뛴 거잖아.-
-성민이 200승 찍으면 명전 갑니까?-
-10시즌 채우는 순간 이미 명전이었음. 180승이라고는 해도 우승 반지만 네 개에 사이 영이 네 개임.-
-그래도 누적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님?-
-명예의 전당이지, 누적의 전당이 아님. 시대를 지배한 선수가 올라가는 건데, 솔직히 만 30세에 FA로 와서 저만큼 했으면 시대의 지배자라고 봐야지.-
-그냥 명전도 아니고 이미 첫 턴 확정이었어. 200승은 투표율 80퍼대냐 90퍼대냐 문제지. 솔직히 너클볼 투수에 요즘 하는 거 보면 급격한 노화 없이 4~5년만 더 뛰어주면 무적권 투표율 95퍼 이상 본다. 너클볼 로망 생각하면 100퍼도 가능할지도 모름.-
< 외전(1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