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81화 (282/287)

< 외전(10) >

앤드류 딘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분노가 머리를 가득 메운 덕분에 그냥 입에서 나오는 말을 여과 없이 내뱉었지만, 사실 아차 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성민이라니.

“그게 그러니까······.”

성민이 우물쭈물 변명하려는 앤드류 딘을 외면했다.

“라만, 가자.”

“어? 어?”

클럽 하우스를 맴도는 싸한 분위기.

그래도 라만 그레고리는 성민이 무언가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하지만 성민은 그저 라만을 끌고 나갔다.

“성민, 잠깐, 잠깐만.”

“무슨 이야기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겠는데 일단은 따라 나와.”

애초부터 약속은 있었다.

라만 그레고리의 등판일은 내일이고, 성민의 홈 경기 등판은 아직 사흘이나 남았으며, 오늘은 보스턴의 휴식일이다. 거의 한 달 만에 라만의 공을 봐줄 기회였다.

“후,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못 볼 꼴 보여줘서 미안.”

“고생은 무슨. 어차피 운전은 AI가 하는 거고.”

성민이 잠시 고민했다.

사실 안 봐도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몇 년 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무언가 액션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성민의 나이도 어느덧 불혹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고, 당장의 이익을 얻는 데 급급할 나이는 지났다.

“성민, 나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다니?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잖아. 라만, 너 벌써 잊은 거야? 넌 브라이언 보일 그 천둥벌거숭이도 제어했던 사람이라고. 그에 비하자면 앤드류는 순한 양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상황이 다르잖아. 그리고······.”

라만 그레고리가 말을 삼켰다.

당시 브라이언 보일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사이 영을 수상했던 에이스이자 팀의 에이스급 투수였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녀석은 나를 존경하고 있었으며 내가 하는 이야기가 먹히는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FA 먹튀 소리나 듣는 퇴물일 뿐이다. 당장 메이저로 올라가 공을 던질 투수를 상대로 대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드는 생각은 많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성민이 말했다.

“상황이 다르다고? 그래, 물론 상황은 언제나 다르지. 하지만 넌 라만 그레고리잖아. 사이 영 위너. 저 녀석은 존중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그래, 물론 그렇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좀 보라고. 게다가 저 녀석 태도도 좀 보고. 네가 나타났을 때 녀석 표정을 봤어? 사람들이 존중하는 건 지나간 기록이 아니야. 현재의 상태지. 난 저런 녀석들에게 이미 존중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라만 그레고리의 이야기에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라만,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만약 녀석이 정말로 너를 존중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말에 화를 내지도 않았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보기에 녀석은 그냥 두려운 거야. 라만 너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거지.”

“미래?”

이제 막 수술을 끝내고 복귀한 상황이었다.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팀에는 이미 비슷한 길을 걸은 끝에 엉망진창으로 커리어를 끝내고 먹튀 소리를 듣는 선수가 존재한다.

그 짧은 순간, 앤드류 딘의 말에서 성민이 느낀 것은 반발심이나 분노가 아닌 두려움이었다. 안 그래도 걱정이 가득하던 녀석이 재활을 하는 동안 그 걱정만 더 키워온 것이다.

“너도 경험해봤잖아. 부상에서 돌아왔을 때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지.”

“그랬지.”

“솔직히 나도 그랬어. 내가 운이 좋았던 점은 내 곁에는 나를 이끌어줄 아주 좋은 멘토가 있었다는 점이었지.”

“글쎄, 그 멘토링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본인의 기량이지. 나도 뭐 조언을 해주는 인간들은 여럿 있었지만 내가 받아들이지를 않았으니까. 그때 코치 말을 조금만 더 믿었더라면 나도 달라졌을지 모르지.”

“라만, 너는 잘 모르겠지만, 브라이언 녀석에게 네 말이 먹혔던 건 네가 좋은 투수이기 때문만이 아니야. 넌 그 사이 영이 아니더라도 존경할만한 투수고, 훌륭한 인간이었어. 98마일짜리 속구를 잃어버렸어도 그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야. 아니 어떤 의미로 보면 더 훌륭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포기하지 않았잖아. 아까 그 자리에서 내가 녀석에게 더 크게 화를 낼 수도 있었어. 아마 녀석은 즉각적으로 너에게 사과를 했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잘 알아. 네가 바라는 건 사과가 아니잖아. 그걸 바랬더라면 애초에 녀석에게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았겠지. 넌 진정으로 그 녀석이 안타까웠던 거잖아. 아니야?”

라만이 자신에게 되물었다. 내가 녀석에게 이야기했던 것이 과연 그냥 꼰대의 참견질이었을까? 아니면 녀석을 진심으로 위했기 때문일까? 성민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녀석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

라만 그레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녀석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는 내일 너의 등판을 준비해보자고.”

성민이 라만 그레고리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

라만 그레고리가 마운드에 섰다.

-후우

가벼운 심호흡.

경기 직전 자신을 찾아왔던 앤드류 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아냐, 다 이해한다. 이제 막 부상에서 돌아왔는데 당연히 초조하겠지. 나처럼 될까봐 걱정됐잖아. 뭐, 솔직히 나도 그랬어. 1억 9천만 달러나 받는데 그 돈값은 못 하고 있다는 게 불안했지. 뭐, 몇몇 사람들은 그건 내가 지난 기간 동안 보여줬던 것을 보고 돈을 주는거라고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했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되냐? 그걸 보여줬던 건 탬파베이와 보스턴이고 나한테 돈을 주는 건 로키스였는데.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말의 의미는 그게 아니더라.”

앤드류 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의 진짜 의미는 그 사람들이 그 돈을 주는 것은 내가 지난 기간 동안 보여줬던 것대로만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의미였어. 굳이 그것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냥 하던 대로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서서히 감소하는 기량도 그냥 그것까지 감수하겠다는 돈. 그게 그 돈이었던 거야.”

“아······.”

“너무 부담 갖지 말란 소리야. 넌 그냥 하던 대만 해도 이미 1억 8천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선수야. 괜히 무리하면 너도 이 꼴이 나는 수가 있어. 네가 걱정하던 것처럼 말이야.”

“저 사실······.”

“응?”

“그레고리 씨처럼 될까 걱정했던 거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전 그레고리 씨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이미 그만한 돈을 받았음에도, 그리고 그렇게 긴 시간 손가락질을 당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강한 마음이 저한테는 없거든요. 아마 질투였을겁니다. 제 남은 커리어가 엉망으로 끝났을 때, 저는 그레고리씨처럼 될 수 없을거라는 질투. 그래서 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더 툴툴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 대화를 회상하며 로진백을 가볍게 주물렀다.

“강한 마음은 무슨.”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녀석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미련일 뿐이다. 라만 그레고리라는 사람이 고작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미련. 녀석의 이야기처럼 강한 마음이 있었다면 마운드 위에 서는 게 두렵지도 않았겠지.

덕아웃에서 그를 지켜보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참 보스턴에서 뛰던 시절 그를 바라보던 브라이언 보일의 시선을 닮았다.

이래서야 쪽팔릴 수도 없다.

홈플레이트 너머의 커다란 미트가 눈에 똑똑하게 들어왔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

하루 전.

밤늦은 시간.

“여기야.”

성민이 손을 들었다.

“저기, 그러니까 아까 낮의 일은!!”

“일단 밥부터 먹자고. 여기 뭐가 괜찮아? 내가 이 동네는 잘 몰라서 말이야.”

앤드류 딘이었다.

“앤드류, 네가 불안한 건 잘 알겠어.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거든. 여기 이거 보이지?”

성민이 자신의 팔을 쑥 걷어 오른팔의 흉터를 보여주었다. 벌써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수술 흔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뭐, 너 수술 잘 됐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건 의미가 없을 거야. 진짜 중요한 건 수술이 아니니까. 마음이지.”

“마음이요?”

“내가 너 정도 나이일 때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어. ‘성민아, 저 투수를 잘 기억해라. 네가 조금 더 나이를 먹는다면 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될 거다.’라고 말이야.”

“누구였습니까?”

“욘 마르틴. 물론 그냥도 대단한 투수이기는 하지. 하지만 그 사람이 말했던 욘 마르틴의 진짜 대단한 점은 성적이나 커리어가 아니었어. 바로 이거지.”

성민이 오른손 엄지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단단한 마음.”

“마음······.”“그래, 마음. 사람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어. 하지만 사람이 실패자가 되는 건 실패했을 때가 아니야. 그 사람이 실패자로 끝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건 실패한 채로 주저앉았느냐, 아니면 다시 주먹 꽉 쥐고 일어났느냐야. 욘 마르틴은 그대로 천천히 무너질 수도 있었어. 하지만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쳤지. 그 사람의 진짜 대단함은 28살 시절 사이 영을 탔던 게 아니야. 서른일곱에 4.87을 찍었는데, 기어코 서른여덟, 서른아홉까지 버텨냈다는 부분이지.”

물을 한 모금 들이킨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아마 라만을 보고 불안했을 거야. 나도 FA에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됐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을 거야. 내가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해. 아마 나라도 그러기는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라만은 해냈어. 다시 AA에서 공을 던지고 있지. 그의 커리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는 한 번 실패했지만, 아직 실패자가 아니야.”

앤드류 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는 라만 그레고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성민의 이야기처럼 자신은 라만 그레고리와 같은 강한 마음을 갖지 못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곁에서 잘 보고 배워둬. 좋은 몸을 만들고 좋은 공을 던지는 법을 알려줄 수 있는 코치는 많지만, 투수가, 사람이 가져야 하는 마음을 알려줄 수 있는 코치는 드문 법이니까.”

“하지만 어제 그런 일을 했는데······.”

“사과해. 그리고 솔직하게 대화해. 그거면 충분할거야. 라만은 그릇이 큰 녀석이라고.”

***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길.

“어떻습니까. 영감님. 역시 이런 건 상관할 필요 없이 맡겨둘 만하죠?”

지난 2년의 시간은 앤드류 딘에게 거대한 불안감을 선물해줬다. 그렇다면 7년이라는 세월동안 먹튀 소리를 들었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앞둔 채 너클볼을 연마했던 라만 그레고리는 어땠을까?

라만 그레고리는 이제 자신을 믿지 못했다. 거기서 앤드류 딘에게 바로 강하게 나가지 못 한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성민의 격려로는 해결해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성과,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점은 투수 본인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을 던지는 너클볼 투수에게는 아주 큰 문제였다.

마운드 위에서 투수가, 특히 너클볼 투수가 믿어야 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니까.

물론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라만 그레고리가 자신감을 빼앗긴 시간은 너무 길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단 하루.

그리고 그 단 하루가 꾸준히 쌓여간다면?

“뭐, 그것도 일단은 오늘 일이 잘 해결됐을 때 이야기겠지만요.”

뭐, 네가 한 일인데 어련히 잘 됐으려고.

들리지 않는 대답. 자율주행자동차 안에서 성민이 웃었다.

***

6.2이닝 6피안타 1실점.

라만 그레고리. 복귀 후 첫 승.

< 외전(10)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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