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5) >
-문제는 성민과 매튜 쿠퍼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 팀에서 문제가 없는 사람 딱 둘만 고르라면 그 둘인데. 그 두 사람이 문제라니.-
-그래, 지금 팀은 저 둘을 제외한 나머지를 다 갈아 치워야 해.-
-바로 그래서 저 둘이 문제라는 거야. 지금 우리 팀은 진즉에 탱킹에 들어갔어야 해. 그런데 저 둘이 있는 이상 그건 절대 불가능이지. 한 명은 영원한 MVP 후보고 또 한 명은 영원한 사이 영 후보니까. 저런 선수들을 데리고 있으면 누구나 달리고 싶지. 그래서 그렇게 달린 결과를 좀 보라고. 우리는 지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어.-
-그리고 그 직전 해에 월드시리즈에 우승했지. 좀 생각이라는 걸 하고 말을 하자. 어떻게 저 두 사람이 문제가 되냐.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가져 온 반지가 무려 네 개야. 지금은 그냥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거라고.-
-그 숨 고르기가 문제라는 소리다. 성민의 나이가 벌써 40이야. 언제 뻗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라고. 매튜는 또 어떻고 만으로 33세면 이제 슬슬 하락이 시작될 나이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은 저 선수들을 다 내다 팔고 팀을 리빌딩 하는 거라고.-
-그놈의 탱킹이니 리빌딩이니 아주 지겹다 지겨워. 니들 양키스나 다저스가 탱킹이니 리빌딩이니 하겠다고 팀의 중심을 내다 파는 거 봤어? 우리는 보스턴 레드삭스. 이 시대 가장 위대했던 팀이야. 전설들의 황혼기를 좀 아름답게 해줄 수 없겠냐?-
-그딴 거 챙기다가 팀이 10년쯤 암흑기가 오는 건 괜찮고? 다들 다저스가 지금 어떤지 잊지 말자고.-
-다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성민은 너클볼 투수야. 너클볼 투수에게 나이는 장식이라고. 게다가 타자에게 33세는 아직 한창때잖아. 우린 최소한 3~4년은 더 높은 곳을 노려볼 수 있어.-
***
-부웅!!
“스트라잌!! 아웃!!”
9회 말.
선두타자로 나온 에드 맥밀란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헛돌았다.
삼구삼진.
“어우, 에드 맥밀란 저 새끼 저거. 또 저러네.”
“아니 쟤는 무슨 떨어지는 공만 나오면 붕붕거려.”
다저 스타디움에 모인 팬들이 그 시원한 헛스윙 삼진에 분통을 터트렸다. 작년 117경기 436타석 411타수 87안타 12홈런 0.197/0.234/0.302. 아무리 포수라고 해도 조금 심각한 성적이었다. 특히나 이번 시즌 그가 받는 연 1,700만 달러의 연봉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솔직히 이 정도면 그냥 오셔한테 기회를 꾸준하게 주는 게 맞지. 둘이 성적이야 비슷하지만 그래도 오셔는 젊어서 가능성이라도 있잖아.”
“사실 둘이 비슷하지도 않아. 오셔 쪽이 조금이지만 더 낫지. 홈런은 조금 더 적다지만 타율이 더 괜찮잖아. 이건 그냥 에드 맥밀란이 워낙에 고연봉자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쓰는 거라고 봐야지.”
“아니, 대체 구단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34살의 타자한테 5년짜리 연장 계약을 준 거야? 우리 앞으로 저걸 3년이나 더 봐야 하는 거잖아.”
“누가 연장 1년 차부터 저렇게 갑자기 폭망할 줄 알았겠어? 그래도 33살 시즌까지는 제법 쳤잖아. 게다가 기존 계약이 워낙에 성적 대비로 헐값이었으니 보상 차원에서 좀 챙겨준거라고 봐야지.”
“보상은 무슨. 에휴. 모르겠다. 하여간 난 빨리 저 녀석 어딘가에 트레이드 좀 했으면 좋겠어. 볼 때마다 아주 속이 답답해.”
“저 성적에 1,700만. 잔여 연봉이 4,500만인데 누가 데리고 가겠냐?”
“그러면 그냥 방출이라도 시키든지.”
에드 맥밀란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걷는 동작만으로도 무릎이 시큰했다.
사람의 관절은 소모품이다. 그리고 포수는 무거운 장구들을 입은 채 경기의 절반을 쪼그려 앉아서 수백 번을 앉았다 일어났다 해야 한다. 1년에 그런 경기를 최소한 100번 이상. 15년이 넘게 해왔다. 무릎 관절이 남아날 리가 없다.
이미 몇 차례나 수술도 받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어떻게 생각하면 에두아르도 크루즈 녀석이야말로 영리한 녀석이다. 사람들이 아쉬워할 때 재빨리 도망을 쳐버렸다. 애당초 그만한 포수는 정말 찾기 힘들다. 이래서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녀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드 맥밀란은 쉽게 은퇴라는 카드를 선택할 수 없었다.
[LA 다저스 시리즈 2차전 7:6 아쉬운 패배!!]
-에드 맥밀란 여섯 경기 19타석 연속 무안타 실화?-
-에드 맥밀란은 이제 완전히 회생 불가능 같은데? 작년에는 그래도 포수라면 참을 수 있는 성적이었다면 지금은 완전 엉망이잖아.-
-저 친구는 이제 슬슬 은퇴 하는 게 본인 커리어를 위해서도 나을 듯. 누적 쌓이는 것도 별 거 없이 비율 스탯만 점점 엉망이 되는데?-
***
2042년.
인류는 많은 장애를 극복했다. 이제 인류는 더이상 충치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금속을 사용하지 않는다. 법랑질 재생 기술은 물론이거니와 돈만 있다면 치아 자체의 재생조차 가능해졌다. 장기를 갈아 끼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전히 비싼 가격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본인의 장기를 배양하는 기술은 수많은 인류를 죽음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보스턴의 단장 존 맥도웰이 먼지 한 톨 없는 자신의 민머리를 벅벅 긁었다.
“리빌딩 같은 헛소리는 좀 집어치우자고. 응? 우리가 지금 누구를 트레이드 할 거야. 성민? 매튜? 그 친구들이 당장 사이 영 컨텐더에 MVP 후보라는 사실은 접어두더라도 10-5룰 적용자들인 건 잘 알지?”
메이저리그에는 10-5룰 이라는 것이 있다.
10년 이상의 서비스 타임을 보낸 선수가 같은 팀에서 5년 이상 활동할 경우 전구단을 대상으로 트레이드 거부권을 갖는 것이 그 내용이다.
성민도 매튜도 모두 해당 되는 권리다.
“뭐, 루시 알베리라면 거기서 제외이긴 하겠네. 그런데 그 친구 연봉이 얼마인지는 알지? 5년 2,400만 달러야. 그 돈으로 어디가서 그만한 유격수 구해올 수 있겠어? 그래, 알아. 알지. 지금 리빌딩 하자는 건 가성비의 문제가 아니라 팀의 체질개선 문제라는 거. 근데 좀 생각이라는 걸 해보자고. 우리가 지난 2년간 포스트시즌에 못 나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경쟁했단 말이지. 그런데 성적이 엉망이라고 저렇게 들고 일어나. 근데 유망주들 위주로 밀어주면서 팀의 체질 개선을 해본다? 헛소리야.”
“하지만 당장 우리가 우승을 노릴 전력이 아닌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게다가 성민 선수나 쿠퍼 선수의 경우 지금이라면 상위권 유망주를 쓸어올 수 있지만, 그 가치는 점점 떨어질 겁니다. 지난 9년 동안 우리 팀의 팜은 너무 부실했어요.”
확실히 보스턴은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뒀다. 당연히 드래프트는 후순위였고 그나마 있던 유망주도 당장의 성적을 위해 열심히 팔아치웠다. 사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역사에 남을 대성공이다. 무려 네 번의 우승이라니. 그리고 당연히 그 반대급부로 팜은 초토화됐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팀 상황에서 리툴링은 가능해도 리빌딩은 불가능해. 그러니 지금 전력에 뭐를 보태야 우승 경쟁이 가능한지를 살펴보자고.”
게다가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구단주 그룹부터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리빌딩을 원하는 목소리가 슬금슬금 나오고 있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잠재적인 팬층이 수십 배는 된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양키스가 리빌딩 하겠다고 탱킹 들어가는 꼴 봤어?”
무엇보다 중계권 계약 갱신이 2년 남았다. 현재 보스턴의 브랜드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민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은 다 쉬는 겨울 시즌에 보스턴 레드삭스는 돈 주고도 못 할 홍보를 공짜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이걸 남에게 넘긴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지금 보스턴 입장에서는 설사 성민이 ERA 6점대 투수가 되더라도 무조건 잡아둬야 한다. 하물며 성민은 여전히 ERA 3점대 초반을 오가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최고의 투수다.
“그래서 양키스가 지금 저 꼴 난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저 꼴 안 나도록 잘해야지.”
***
늦은 아침.
호텔방에서 몸을 일으킨다. 뻐근하다. 이런 때마다 필 니크로의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너도 언젠가는 저런 순간이 찾아올 거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구속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는 컨디션 괜찮은 날에 이를 악물고 전력으로 던져도 88마일 남짓? 평속은 더 떨어져서 작년 속구 평속이 85.3마일 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클볼 투수가 은퇴하는 순간은 공을 던지고 일루 커버를 할 힘이 없을 때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1년 30경기 이상 선발로 등판하는 것은 생각보다 고되다. 젊은 시절처럼 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데 집중력은 쉽게 떨어진다. 덕분에 전성기 시절의 그 감각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도 성민은 자신의 피칭을 준비했다.
“굿 볼!!”
잭 클린턴이 성민의 공을 받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성품이 나쁜 녀석은 아니다. 본인이 살아남으려면 결국 성민의 비위를 맞추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 눈치도 있다. 하지만 실력이, 그리고 재능이 부족하다. 에두아르도 크루즈와 호흡을 맞출 때와 비교해서 성민은 매 경기 1점 이상의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레이밍에서, 그리고 타격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경기. 1회 초. 보스턴이 2점을 얻어내며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4월 중순의 토론토.
오늘 낮 최고 기온은 9도로 봄이라고 하기엔 매우 춥다. 로저스 센터야 돔구장이라지만 그래도 쌀쌀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나이를 먹으니 뼈마디가 시리다는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손끝에 가볍게 입김을 불어 넣었다.
‘압니다. 알아요. 메이저에 처음 올라온 애송이라고 방심하지 말아야죠.’
그날 이후로 사라진 누군가에게 돌아오지 않을 이야기를 건넸다. 대답을 기대하는 말은 아니다. 그래, 이건 그냥 루틴이다. 과거의 성공적인 기억을 떠올리며 그 좋았던 감각을 되살리는 루틴.
초구.
이제는 전력을 다해도 77마일 남짓 나오는 고속 너클볼. 전성기에 비하자면 4마일 가깝게 떨어진 구속이지만 충분하다. 애초에 R.A 디키가 사이 영 상을 받았을 때 너클볼의 평균 구속은 75마일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성민의 너클볼은 그가 사이 영을 받았을 당시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았다.
-딱!!
빗맞은 타구.
타자가 전력을 다해서 일루로 달렸다.
하지만 루시 알베리 쪽이 더 빠르다. 이 녀석 여전히 빠따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공격력으로는 매년 –0.5정도를 기록하는데도 꾸준히 2에서 3의 WAR을 적립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제 수비 하나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가볍게 공을 잡아 그대로 1루를 향해 뿌렸다. 조금도 다급해 보이지 않는 동작들이지만 동작 사이에 빈틈이 없었다.
-뻐엉!!
“아웃!!”
[김성민 6.1이닝 2실점. 시즌 3승!!]
< 외전(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