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75화 (276/287)

< 외전(4) >

그리고 바로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젊은 타자 산자이 칸. 2038년 크리켓의 나라 인도에서 온 남자가 일루로 걸어 나갔다.

사실 2038년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는 제법 뜻 깊은 해였는데 볼티모어의 전설적인 타자 크리스 데이비스에게 지불하던 디퍼 금액이 2037년으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크리스 데이비스는 여러 가지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좋은 쪽은 아니다.

역대 최고의 FA가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많은 이견이 있겠지만, 역대 최악의 FA가 누구였나를 묻는다면 백이면 백 이 남자를 손꼽는다. 메이저 160년 역사에서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가운데 최저 타율. 62타석. 54타수 무안타라는 역대 최장기록 무안타. 7년 1억6천1백만 달러의 FA 계약 이후 누적 WAR만 무려 –4에 달한다.

참고로 현재 두 번이나 올스타전에 출장한 이 젊은 타자를 데리고 오는데 들었던 70만 달러의 계약금은 51세의 크리스 데이비스에게 지급했던 디퍼 금액의 절반에 불과했다.

-0.5 크데가 오늘 또 자기 몫은 끝냈구나!!-

마운드의 성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6회 말.

공이 살짝 빠졌다. 만약 에두아르도 크루즈였다면 이건 멋지게 스트라이크로 둔갑시켜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없었다.

“망할 자식. 진짜로 30대 중반에 칼 같이 은퇴를 할 줄이야.”

녀석은 7년 장기 계약이 끝난 35세 시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퇴를 해버렸다. 팀에서는 녀석을 잡기 위해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을 했지만, 애초에 그리 욕심이 크지 않던 녀석이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이면 3대는 놀고 먹을 수 있다며 깔끔하게 거절하고 본인의 소원처럼 돈 많은 백수로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녀석의 은퇴 이후 2년 전부터 성민의 새로운 전담을 맡은 잭 클린턴은 여러 가지 부분에서 평균 미만의 포수였다. 하지만 애초에 성민의 공을 받을 수 있는 포수 자체가 드물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낙제점이더라도 단지 공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써먹을 수밖에 없었다.

타석에 스티븐 고메즈가 올라왔다. 최근 폼이 점점 올라오는 젊은 타자다.

하지만 아직이다.

-딱!!

낮게 깔린 타구. 이제는 베테랑의 분위기가 풀풀 풍기는 루시 알베리가 가볍게 공을 잡아 이루에 토스했다.

아웃, 그리고 또 아웃.

[루시 알베리 선수의 깔끔한 수비. 언제봐도 참 빈틈이 없습니다.]

[6회 초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공격이 끝난 상황에서 점수는 여전히 4:2. 이제 다시 보스턴 레드삭스의 차례입니다.]

[이번 시즌 가장 강력한 사이 영 컨텐더죠? 마운드에 브라이언 보일 선수가 올라옵니다.]

[6년 전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8년 2억4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비딩 할 때만 하더라도 무모한 금액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도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증명됐어요.]

과거의 팀 동료이자 이제는 32세. 절정기의 끄트머리를 달리고 있는 선발투수 브라이언 보일이 마운드로 올라왔다.

“이제 내 차례네.”

어울리지 않는 턱수염과 살짝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 매튜 쿠퍼가 방망이를 들고 타석으로 걸어 나갔다.

[선두 타자. 매튜 쿠퍼가 타석에 올라옵니다.]

[7년 연속 올스타에 재작년의 MVP죠.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삼루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고보면 9년 전의 보스턴이 얼마나 대단한 팀이었는지 새삼 느껴집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양키스와 다저스를 이기고 월드 시리즈 반지를 차지한 것이 기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중론이었습니다만, 현재는 그만한 선수들이면 우승도 당연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아무래도 현재의 면면을 보면 좀 그런 느낌이 있죠. 하지만 그거야 지금 현재의 실력을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고, 당시에는 정말 기적이 맞았습니다. 당장 저 브라이언 보일 선수만 하더라도 당시에는 불안 불안한 3, 4선발급 투수였는걸요.]

보스턴 레드삭스 최고의 타자를 상대로 브라이언 보일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번 시즌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진지하게 반지를 노리고 있다. 양키스가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보스턴이 주춤한 지금이야말로 완벽한 기회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지난 10년간 평균 페이롤은 1억 5천만 달러로 메이저리그 평균을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올 시즌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페이롤은 무려 2억 6천만 달러. 전체 4위다.

그는 무려 4년이나 성민과 한 팀에서 뛰었다. 그렇기에 그는 성민을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은 대단한 투수, 아니 대단한 사람이다.

올해의 보스턴이 주춤하다고?

사람들은 2034년 보스턴의 우승에 대해 그럴만한 싹수를 지닌 선수들이 모여 우승을 이뤄냈다고 말한다. 하지만 브라이언 보일이 생각할 때 그건 선후가 바뀐 이야기였다. 2034년 보스턴 선수들이 그럴만한 싹수를 지닌 것이 아니라 2034년의 경험이 있었기에 이런 선수들이 될 수 있었던 거다.

현재까지 점수 차이는 2점.

전성기의 성민이었다면 절망적인 점수 차이다. 하지만 그는 늙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의 볼티모어에는 대단한 타자들이 존재한다.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3점은 또 느낌이 다르다.

그러니 이번 타순만 완벽하게 막아내자.

타석에 선 매튜 쿠퍼가 크게 방망이를 들었다. 거대하다. 타석을 꽉 채운 무게감이 느껴진다. 해설자들은 그를 가리켜 메이저리그 최고의 삼루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너무 작게 이야기한 것이다. 만약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를 꼽는다면 열 명 중 다섯 명은 아마 이 남자 매튜 쿠퍼를 꼽을 것이다.

커리어 10년 동안 0.287/0.376/0.573. 1514개의 안타와 379개의 홈런. 다섯 개의 골드글러브와 일곱 개의 실버 슬러거. 그리고 두 번의 MVP.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이 시대 최고의 타자다.

마운드의 브라이언 보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그에게 8년 2억4천만을 선물해준 슬라이더가 그림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그 그림 같은 슬라이더를 그대로 통타했다.

-딱!!

펜웨이파크의 우측 담장. 그린 몬스터를 가뿐하게 넘어가는 거대한 홈런 타구. 약 1초 정도 타구를 지켜 본 매튜 쿠퍼가 가볍게 방망이를 집어 던지고 일루를 향해 달렸다. 엄청 재수없는 자세다. 하지만 리그에서 저런 재수 없는 태도를 견지해도 되는 남자가 하나 있다면 바로 저 매튜 쿠퍼다. 그의 커리어는 그만한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었다.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 홈베이스를 밟았을 때 팀의 수많은 동료가 그를 마중 나왔다. 하지만 그 중에 랄로 가야르도는 없었다. 매튜 쿠퍼의 시선이 저 멀리 관중석으로 잠시 향했다. 그곳에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쁘게 박수를 보내는 그의 오랜 친구가 있었다.

랄로 가야르도가 자신의 아내에게 마치 자기 일처럼 매튜의 홈런을 뽐냈다.

“내가 말했잖아. 저 녀석은 진짜라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태도가 조금 재수 없고 멍청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야구에 관해서는 진지했지.”

“알아요. 알아. 자기가 부상으로 은퇴 고민할 때 자기 일처럼 외국 리그 알아봐 주고 돌아와서 대학 진학 할 때도 선수협회랑 구단에 학자금 지원이랑 이것저것 편의 알아봐 줬다고.”

모든 재능이 성공할 수는 없다.

랄로 가야르도의 재능은 눈부셨다. 하지만 4년 차에 경험했던 최악의 부상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정강이뼈의 복합골절. 그의 재능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정밀한 시계와 같았다. 빛나던 운동능력이 사라졌다. 조금만 무리해도 느껴지는 정강이의 통증은 그의 완벽한 폼을 무너트렸다.

아마 매튜 쿠퍼가 없었더라면 그는 인생 자체를 실패했을지도 몰랐다.

“이 망할 새끼야. 고작 이 정도로 포기를 하겠다고? 웃기지 마. 넌 망가진 게 아니야. 혼자 다른 세상에서 살던 새끼가 이제야 다른 사람과 똑같아진 거지.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고 있어. 고민하고 번민하고 힘들어하고 당장 때려치우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다음 날 다시 야구장에 나와. 근데 뭐? 야구를 그만둬? 그래, 그만둔다고 치자. 그렇게 인생에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야구를 때려치우겠다고? 너 지금까지 모아둔 돈이나 있어? 대학도 안 나온 새끼가 모아둔 돈도 없이 뭘 하려고. 저 지금 그만두면 저 옆 동네 가서 마약이나 팔고, 팔다 남은 마약 빨고 헤롱헤롱하다가 총 맞아 뒤지기 딱 좋아. 알아?”

“······.”

“야구가 너무 힘들면. 그래 좋아. 차라리 한탕 돈이라도 땡길 수 있는 곳으로 가. NPB든 KBO든 아니면 CPBL이든. 메이저 MVP출신 타자가 온다고 하면 아주 대환영일테니까. 그리고 네 인생에 야구가 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

매튜 쿠퍼의 이야기처럼 NPB에서는 그를 환영했다.

연봉이 3년 20억엔. 달러로는 2천만 달러다. 그는 3년 동안 20억 엔을 받고 벤치를 뜨겁게 데웠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야구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야구가 하고 싶은지를 알게 됐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선수로써 랄로 가야르도는 끝이 났다는 것을. 대학을 들어갔다. 스포츠를 공부했고, 인간의 신체를 공부했다.

아마 지금의 지식이 있었다면 선수 시절 조금 더 나은 성적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

보스턴 레드삭스의 공격이 끝났다.

매튜 쿠퍼에게 홈런을 허용했지만, 브라이언 보일은 역시 대단한 투수였다.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세 명의 타자를 상대로 삼진 두 개, 외야 플라이 하나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7회 초.

또다시 성민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뻐엉!!

“스트라잌!!”

80마일 언저리를 넘나들던 사기적인 너클볼은 이제 없었다.

이를 악물고 뿌려봤자 76마일에서 77마일.

그것만 하더라도 여전히 대단한 공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난 10년. 성민은 리그 최정상의 투수로 군림했다. 그 말인즉 처음 데뷔했을 때 생소함의 극치였던 성민의 공이 이제는 리그의 타자라면 누구나 숙지해야 하는 익숙한 공이 됐다는 뜻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너클볼은 여전히 강력했다.

특히나 가끔씩 이 악물고 던질 때 나오는 저 공은 답이 없었다. 하지만 늙은 투수다. 칼날 같던 로케이션은 조금 무뎌졌고 100개를 던져 1, 2개 나올까 말까 하던 실투는 그 서너 배로 증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민은 여전히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가장 강력한 투수였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7이닝 2실점.

성민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끝냈다.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는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무난하게 승리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무난하게 위닝 시리즈를 가져가다!!]

그리고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무난하게 시리즈를 가져갔다.

< 외전(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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