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74화 (275/287)

< 외전(3) >

그린 몬스터가 내려다보는 경기장.

성민이 타석에 올라왔다.

상대는 지구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새로운 에이스이자 이번 시즌 가장 강력한 사이 영 도전자인 세르게이 긴즈버그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막한 인상의 이 투수는 실제로 안하무인 그 자체로 이미 여러 차례 면전에서 성민을 조롱한 적이 있었다.

8회 말. 투아웃에 만루. 위기다.

하지만 다행히 상대의 타격감은 그리 훌륭하지 못했다. 오늘 2타수 무안타. 게다가 시즌 중반에 입었던 큰 부상으로 마이너에 내려갔다 온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관중석에는 조이 제임슨이 두 손을 꼭 모은 채 간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최근 자신의 남자친구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연예계에 투신하는 게 어떤가?”

얼마 전 허버트 로렌스도 진지하게 성민에게 직업을 바꿀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 물론 성민의 대답은 No였다. 그것도 조금 과격한 형태의 No.

“허버트 씨도 시트콤 두 개 연속으로 말아먹었지만 꿋꿋하게 헐리웃 바닥에 붙어있잖습니까. 그에 비하면 제 실패는 아무것도 아니죠.”

“뭐라고?”

성민의 대답에 허버트 로렌스가 불같이 화를 냈다. 덕분에 입장이 곤란해진 것은 중간에 낀 조이 제임슨이었다. 덕분에 성민과도 몇 차례 감정적인 충돌이 있었다.

미안했다.

가뜩이나 자기 문제로 힘든 성민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방해만 된 것 같았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꼭 사과해야지. 그러니 제발 성민이 시원하게 역전 홈런포를 하나 날려주기를. 모든 일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세르게이 긴즈버그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최고 100마일의 속구를 던지는 괴물. 그의 손끝에서 공이 날아올랐다.

-부웅!!

“스트라잌!!”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폭포수 같은 커브볼.

-부웅!!

“스트라잌!!”

성민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장갑을 동여맬 때, 관중석의 조이 제임슨과 눈이 마주쳤다. 우연은 아니었다. 성민이 타석에 들어선 이래 조이 제임슨의 시선은 단 1초도 성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경기 바로 직전에 한바탕 싸움을 한 주제에 저렇게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니. 성민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쓱 올라갔다.

그녀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미소였다.

기분 탓일까?

어쩐지 마운드를 꽉 채운 것 같았던 투수가 작아 보였다.

그래, 이번 경기가 끝나면 그녀를 찾아가 꼭 안아줘야지. 그리고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다고 사과를 해야지.

세르게이 긴즈버그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아름다운 폼.

그의 손끝에서 강력한 공이 날아왔다.

-딱!!!

담장 밖으로 날아가는 야구공.

만루홈런이었다.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오는 성민에게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선수들에게 두들겨 맞는 가운데도 성민의 시선은 관중석의 조이 제임슨을 향했다. 항상 그를 지지해주는 여자다.

경기가 끝난 후.

성민이 요즘 항상 들고 다니던 반지 케이스를 매만졌다.

“그래, 오늘이야.”

그녀는 언제나처럼 주차장에서 성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했어. 오늘 아주 멋지던데? 아침 일은 미안해. 괜히 나도 감정적으로 뾰족해져서. 사실 허버트 씨 편을 들려던 게 아닌데.”

“조이.”

“응?”

“결혼하자.”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내민 반지 케이스.

그 안에는 티파니에서 나온 다이아반지가 들어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조이 제임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동인지, 놀람인지 알 수 없는 표정. 조이 제임슨의 입이 마침내 열리는 그 순간.

“컷!! 수고하셨습니다.”

촬영 스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길었던 11번째 시즌의 마무리가 끝났다. 지금 사람들이 가장 집중하는 것이 조이 제임슨과 성민의 사랑 이야기인 만큼 그 궁금증을 극대화하는 가장 적절한 마무리였다.

12월의 쌀쌀한 날씨.

매니저들이 배우들에게 빠르게 긴 팔 가디건을 대령했다. 세르게이 긴즈버그가 성민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세르게이 너도 고생했어. 그나저나 피칭 폼이 더 좋아졌는데? 연습 좀 했나 봐?”

“디아고 헤밍턴 선수 비디오 보고 연구 좀 했죠.”

“구속도 상당히 나올 것 같던데?”

“그래 봐야 60마일 간신히 넘기는걸요.”

“그래도 아마추어가 그 정도면 대단한 거야. 사회인 야구 같은 거 하면 투수 충분히 하겠어.”

성민의 칭찬에 세르게이 긴즈버그가 멋쩍게 웃었다. 유대계 출신의 이 젊은 모델은 냉막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수더분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다.

지난겨울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플로리안 왕자로 출연한 이후 성민의 인지도는 그야말로 폭발했다. 따라서 이번 헐리웃 오브 라이프의 메인 스토리는 성민과 조이 제임슨 위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본래라면 짧게 짧게 얼굴만 비추고 끝났을 세르게이 긴즈버그의 비중이 아주 크게 상승했다.

세르게이 긴즈버그가 성민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음 촬영은 이제 올해 말이겠네요. 아, 경기는 응원가겠습니다.”

“그래, 보고 싶을 때 이야기해. 표 몇 장 보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촬영이 있던 곳은 펜웨이 파크도 아니었다. 겨울에 촬영하기에 보스턴은 너무 추웠다. 촬영은 플로리다주 포트마이어스에 위치한 제트블루 파크 앳 펜웨이 사우스에서 이뤄졌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장소로 구장의 구조가 펜웨이 파크와 같았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것은 조이 제임슨이었다.

성민의 시선이 운전하는 그녀에게 향했다. 확실히 자본의 힘은 대단했다. 4년 가깝게 비수기 없이 달렸던 요 몇 년의 시간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만은 아닐지 몰랐다. 비록 촬영에서 했던 프러포즈였지만, 그 순간 전해온 떨림은 진짜였다. 이제는 이 긴 연애의 끝을 맺을 때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결혼을 했던 많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여자친구를 만나다 보면 정말 이 사람이다!! 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그리고 그 순간만 참으면 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 많은 사람은 모두 그 순간을 참지 못했던 사람이다. 애초에 그것은 참으려야 참을 수 있는 충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에 진짜 반려를 만났을 때 느끼는 그 강렬한 충동.

성민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조이, 그래서 대답은?”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4년 전.

권 여사는 자신의 결혼식을 앞두고 성민에게 한 가지 물건을 물려주었다.

“외할머니가 남긴 가락지야. 너한테는 증조할머니가 되겠네. 사람들이 그러잖아. 전쟁통에도 사랑은 다 하고 산다고. 너희 증조할아버지랑 증조할머니가 그 산증인이다. 그 양반이 얼마나 로맨틱 가이였는지 그 전쟁통에 어디서 이 금가락지를 구해서 청혼했다더라고.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도 이건 절대로 팔지 못하게 했다네. 지금에야 얼마 하지도 않는 가락지지만 당시에는 정말 사람 목숨만큼 귀했던 반지라고 하더라.”

물론 당시에 그 물건을 물려주던 권 여사는 성민이 이른 시일 안에 이것을 사용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4년.

마침내 성민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그 반지를 꺼내기 위해 속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

“정말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고말고. 내가 지금 반지를 준 지가 몇 년이 지났는데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 녀석 천년이고 만년이고 지금 이대로 지낼 게 뻔해. 원래 남자라는 족속들은 위기감을 느끼든지, 아니면 뭔가 계기 같은 걸 외부에서 만들어주지 않는 이상 움직일 생각을 안 해요. 내 아들이지만 그냥 이대로 지내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생각하는 게 너무 뻔하다니까.”

걱정은 됐다. 비록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 충분히 행복하기도 했다. 동거한 지 벌써 3년이 넘었고 이 정도면 결혼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으니까. 괜히 이러다가 지금의 행복마저 깨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상대는 김성민에 관한 최고 권위자다. 그리고 그녀에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조이 제임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를 원하는 여자와 프러포즈를 원하는 여자.

“그러면 진짜 이렇게 진행합니다?”

그리고 시청률을 원하는 작가가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

시간이 흘렀다.

시트콤에서 조이 제임슨은 임신을 했다.

현실의 조이 제임슨도 임신을 했다.

그녀는 인기 절정을 달리는 배우였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이, 그리고 더 큰 행복을 주는 것이 이것임을 확신했다.

육아는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아이는 낮과 밤이 없이 울어댔고 여러 가지로 조이 제임슨이 더 크게 고생을 했다고 하지만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일 년, 또 일 년.

아이가 마침내 말도 하고 똥오줌도 좀 가리기 시작했을 때 모처럼 두 부부는 기분 좋게 와인을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지.”

둘째가 생겼다.

제발 베이비 시터를 쓰자고 사정을 해도 자기 아이는 자기가 키워야 한다고 꿋꿋하게 주장하던 조이도 두 아이를 한 번에 케어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도 하나 이미 키워봤으니, 해본 일이니까 둘째는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어째서 내가 그 지옥 같았던 나날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렸던 걸까. 성민은 육아라는 지옥에 또 한 번 빠져버렸다.

“아빱!! 아빱빱!!!”

물론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나와 그녀를 닮은,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은 생명체가 꼬무락거리는 것은 매우 대단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보스턴과의 장기 계약이 끝났다.

보통이라면 은퇴를 생각할 나이. 하지만 너클볼 투수인 성민은 여전히 경쟁력 넘치는 투수였다. 그를 향한 러브콜이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예전이었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내가 뛰기 좋은 팀. 나의 커리어를 위한 선택. 금전적인 부분 등이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그것들은 매우 중요한 조건들이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하나 생겼다.

아이들을 위한 환경이었다.

[김성민, 보스턴 레드삭스와 3년+1년 총액 9,000만 달러 재계약 체결!!]

그런 의미에서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도시에서 계속 사는 것은 가장 매력적인 옵션이었다. 다행히 보스턴은 성민을 보사구팽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보사구팽하지 못했다.

“아무리 너클볼 투수라고 해도 그렇지 그 나이의 투수에게 4년 계약이라니. 너무 긴 것 아닙니까?”

“이 정도가 아니면 잡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메츠에서는 3년 8천만까지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게다가 지금 성민이 클럽하우스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과한 투자도 아닙니다.”

1,000삼진. 1,000이닝. 100승. 2,000이닝. 2,000삼진.

기록이 쌓여가는 만큼 나이를 먹어갔다.

그리하여 어느새 만으로는 30대라는 소리도 못 할 완벽한 40대.

슬슬 새치를 뽑는 것보다 염색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 성민이 마운드 위에 올라왔다.

그는 여전히 보스턴 레드삭스의 가장 강력한 투수였다.

< 외전(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