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2) >
굳이 화무십일홍이라는 거창한 말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좋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니, 그건 이미 진작에 이야기가 끝난 거잖아.”
“그거야 지난 시즌의 이야기지. 이 숫자들을 좀 보라고.”
헐리웃 오브 라이프의 제작사인 KU 미디어의 사장 릭 모리슨과 총괄 PD인 브라이언 황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두 사람의 대화의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 드라마계의 시스템을 조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국 드라마가 시즌제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처음 1화 파일럿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반응이 좋으면 반 시즌을, 그리고 여전히 반응이 좋으면 나머지 반 시즌을. 그렇게 1년을 보낸다.
그리고 이후 2시즌, 3시즌을 이어가는데 시즌이 길어진다는 것은 결국 그만한 인기가 있다는 뜻이며 인기는 당연히 돈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돈이라는 것이 커졌을 때 수익을 가져가는 것은 제작사만이 아니다. 당연히 배우도 매 시즌 새로운 계약을 할 때마다 더 좋은 계약을 원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드라마의 인기라는 것은 보통 절정을 찍고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배우의 출연료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시트콤의 수명은 결정된다.
보통은 아무리 인기 있는 시트콤이라도 10시즌 이상 진행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13시즌이나 진행된 헐리웃 오브 라이프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주연 배우들이 회차당 출연료로 120만 달러를 요구한다며. 게다가 허버트 로렌스 같은 경우는 혼자서 200만 달러를 요구하고 있고. 브라이언. 이건 이미 한계야.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면 회차당 제작비가 1,000만 달러를 넘어간다고. 무슨 헐리웃 블록 버스터 영화도 아니고 시트콤 한 시즌 찍는데 2억 달러가 넘게 들어가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릭. 작년 우리는 이 쇼로 회차당 1,000만 달러의 수익을 얻었어. 게다가 이후로 발생하는 부가 수입을 생각하면 절대 손해는 아닐 거야. 배우들도 그 정도는 다 계산을 하고 들이미는 거라고. 게다가 중간중간 배우들의 등장 씬을 조정하는 거로 얼마든지 출연료를 아낄 수도 있다고.”
릭 모리슨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장기적으로 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 어찌 됐건 그렇게 해도 적자는 보지 않을테니 OTT를 통해 꾸준히 돌리다 보면 결국 흑자가 될 거야. 하지만 바로 눈앞에 노다지가 있는데 굳이 다른 걸 주워들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릭. 몇 번이나 말했던 것처럼 그건 노다지가 아닌 거위 배를 가르는 도박이 될 수 있어.”
“그 거위가 이미 알을 낳기 힘들 만큼 늙었다면 과감히 배를 갈라야지. 헐리웃 오브 라이프는 이미 수명이 다한 프로그램이야. 솔직히 말해서 지금 쇼의 주인공이 허버트 로렌스라고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이잖아.”
릭 모리슨의 이야기는 옳았다.
헐리웃 오브 라이프의 미국 내 인기는 시즌 10을 넘어가면서부터 진작에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커버하는 것은 한,중,일 동아시아 3개국. 그리고 인도에서의 인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역시 성민과 조이 제임슨 부부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허버트 녀석도 솔직히 쇼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보이고 말이야.”
“그거야 확실히······.”
허버트 로렌스 입장에서 헐리웃 오브 라이프는 본인을 메인으로 내밀던 쇼다. 5시즌에서 합류한 조이 제임슨과 여섯 번째 시즌에 카메오로 합류한 성민에게 밀린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13년이나 같은 프로그램,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제법 피곤한 일이다. 그것도 인기가 점점 하락하는 캐릭터를 말이다. 어쩌면 저 200만 달러라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요구는 자연스러운 하차, 혹은 쇼의 종결을 요구하는 그의 시위일지도 몰랐다.
“성민과 조이 제임슨을 중심으로 스핀오프로 해서 새로운 쇼를 만드는 거야. 지지난 시즌에서 결혼도 했겠다, 조이도 배우에 대한 꿈을 접고 보스턴으로 옮기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주제가 사라진다고. 애초에 헐리웃 오브 라이프는 헐리웃에 관한 페이크 다큐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쇼야. 너도 잘 알잖아.”
“그거야 이야기를 조금 조정하면 그만이지. 브레이킹 배드가 마약왕과 갱스터의 이야기였지만 그 스핀오프인 배터 콜 사울은 변호사들의 이야기였잖아.”
“그거야 스토리 위주의 정통 드라마였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캐릭터로 승부하는 시트콤이잖아.”
“그러니까 거기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만 살리면 된다 이 말이야. 인기도 의욕도 없이 비용만 더럽게 높은 캐릭터들을 버리고 말이야. 무엇보다 헐리웃 오브 라이프의 핵심은 헐리웃이 아니라 셀럽의 삶이라고. 극 중에서 성민도 슬슬 그 뭐지? 서비스 기간이 끝나가는 선수니까 이번 시즌에 대형 연장계약을 체결하면 여전히 셀럽들의 이야기는 이어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지난 시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까?
릭 모리슨이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고 왔다. 하지만 책임 PD인 브라이언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거랑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 역사상 가장 성공했던 시트콤 중 하나인 프렌즈. 그리고 거기서 가장 인기 있던 캐릭터인 조이 트리비아니를 그대로 따왔던 조이. 마찬가지로 초인기 드라마였던 슈츠에서 인기 캐릭터였던 제시카 피어슨의 이야기인 피어슨. 다들 결말이 어땠는지 알고 있지?”
“그거야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던 드라마고, 여러 가지 다른 악재들이 있었잖아.”
“우리라고 그런 악재들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리고 지금 성민과 조이 제임슨 부부가 사랑받는 건 그들이 지금은 없어진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내는 커플이라는 스토리텔링 때문이야. 언더독의 성공기는 사랑받지만, 성공해버린 사회 인사의 플렉스는 선망만큼이나 만만찮은 반발을 불러오는 법이라고. 게다가 모든 걸 다 떠나서 성민이 굳이 이런 도전을 할 거라고 확신해? 그 친구 최근 어떤지 자네도 잘 알잖아.”
“그거야······.”
3년 전.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 그룹은 단연 디즈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영화의 7할이 디즈니 영화라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아무리 성민이라도 이건 말이 안 되지.”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잖아. 게다가 비중만 따지면 오히려 훨씬 덜하지.”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경우가 조금 다르잖아. 무엇보다 이 영화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이건 진짜······.”
하지만 그런 디즈니도 처음부터 이런 대단한 그룹이었던 것은 아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디즈니는 미디어에서는 메이저라고 하기 조금 부족한 영화보다는 테마파크 사업에 더 집중하는 그런 회사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 디즈니의 기원으로 돌아가면 단편 영화와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영세한 업체에 불과했다.
그런 디즈니가 처음 도약한 것은 1937년 12월 31일. 세계 최초의 풀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현재까지 무려 10번이나 재상영이 된 이 애니메이션은 물가 상승률을 고려했을 때 역사상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대가 흘러 이제는 애니메이션보다 실사 영화에 더 큰 힘을 쏟는 디즈니였지만 여전히 이 애니메이션에 갖는 애정은 각별했다. 얼마나 각별했냐면 자신들이 보유한 여러 장편 애니메이션. 일명 디즈니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애니메이션들을 차례로 실사화하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실사로 찍어내지 않은 채 손에 쥐고 있을 만큼 각별했다.
그리고 2037년.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100주년이 되는 해.
그들이 마침내 그 손에 쥐고 내놓지 않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실사화를 확정을 지었다. 사실 거기까지만 했다면 그냥 디즈니 프린세스의 마지막 한 사람이 결정되는구나! 정도의 이슈였을 것이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각별하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디즈니 사정이고 대부분 사람에게 그건 그냥 디즈니의 많은 공주 만화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디즈니는 쉽게 가지 않았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플로리안 왕자역 후보로 김성민 확정]
-이런 미친 PC충들이 또?-
-북유럽 배경에 동양인이 왜 왕자로 나옴? 미친 거 아님?-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그런 거 다 따지자면 인어공주에서 북해에서 돌아다니는 인어가 흑인인 건 설명이 됨?-
-내가 에리얼이랑 에스메랄다가 흑인인 것도 참았고 심지어 메리다에 아시안을 가져다 둔 것도 참았어. 뭐 사실 메리다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근데 뭐? 왕자를 아시안을 쓰겠다고?-
-난 환영한다. 헐리웃에서 지금까지 아시안 남자에게 유독 좋은 역할이 안 갔던 건 사실이잖아. 솔직히 성민 정도면 비주얼적으로도 왕자 역할을 해도 이상할 것도 없고 말이야.-
-아니, 그럴 거면 차라리 다른 영화에서 그런 역할을 시키던지. 왜 하필 백설 공주의 왕자냐고. 하여간 PC충 놈들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성공한 프랜차이즈에 자기 냄새 묻히는 것밖에 없지? 김성민 단독 남주로 영화 찍으면 흥행 힘들 거 아니까 백설 공주에 묻어가려는 거잖아.-
-김성민 단독 남주로 찍어서 흥행이 힘들다니. 그건 무슨 신박한 개소리냐. 작년에 찍은 영화 월드 와이드 12억 달러 한 거 기억 안 나?-
-그것도 단독 남주가 아니었잖아. 게다가 그 매출의 절반을 아시아 시장에서 거둔 거잖아. 아, 그러고 보니 이것도 또 아시아 시장 노리고 써먹는 건가?-
-헐리웃이 아시아 신경 쓴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그리고 12억 중에 아시아에서 6억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잖아. 애초에 북미 기준으로도 6억 달러면 역대 흥행 20위 안쪽으로 들어가는 영화라고.-
-근데 난 김성민이면 플로리안 역할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김성민 나이가 있는데 플로리안 역할은 좀 무리지.-
-김성민 이제 25살 아니야? 그 정도면 플로리안 왕자 역할 하기에는 충분하지.-
-그건 헐리웃 오브 라이프의 설정상 나이잖아. 그 친구 이번에 생일 지나서 35살이라고.-
-맙소사. 35살?-
-그나저나 좀 아쉽네. 김성민이면 라이징 스타잖아. 차라리 그냥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이나 하지. 굳이 이런 영화에 출연할 필요 있어?-
사실 원작의 캐릭터가 백인인 영화에 흑인이나 황인을 캐스팅할 때마다 이런 논란은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사람들이 넘어갔던 것은 언제나 모든 것을 해결하는 ‘영웅’. 즉 남자 주인공 자리만큼은 백인 남성을 캐스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백인 여성 주인공과 황인 남자 주인공이라니. 그나마 논란이 덜 했던 것은 그가 단순한 아시안이 아닌 김성민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국기라고 해도 무방한 야구에서 가장 잘나가는 선수이자 드라마와 영화 등에서 멋진 역할로 몇 차례 등장했던 남자다.
“무엇보다 애초에 백설 공주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왕자는 이름도 안 나오는 그냥 왕자잖아. 차라리 일곱 난쟁이 쪽이 더 비중이 있는 거 아니야?”
그랬다.
83분짜리 원작 애니메이션인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에서 왕자가 등장하는 시간은 10분 남짓에 불과하다. 초반부에 잠깐 백설 공주와 결혼을 약속하고 후반부에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쓰러진 백설 공주에게 키스하고 되살아난 그녀와 숲 밖으로 나가는 게 전부다.
영화에서는 약간의 분량을 더 배정받긴 했지만, 그래봤자 백설 공주에게 달려갈 때의 솔로곡 하나를 더 배정받은 정도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굳이 이런 논란을 감수해가며 영화의 출연을 강행한 성민의 선택이 멍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37년 12월 31일.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실사 영화가 개봉한 그 날.
“야, 김성민 쟤 노래만 뭐 더 좋은 기계 쓴 거야? 그냥 자기 여자친구 걱정하면서 말 타고 달려가는 장면인데 왜 쟤가 노래 부르는 장면만 눈물이 나냐?”
“그거 인터넷 기사에 뜬 이야기로는 녹음실에서 원 테이크로 딴 곡이라는데?”
성민이 진정한 의미에서 헐리웃의 메인 스트림에 완전히 올라타는 순간이었다.
< 외전(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