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72화 (외전) (273/287)

< 외전(1) >

프레스톤 윌슨의 선언으로 시작했던 지난 4년은 환상적이었다.

"목표는 우승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미친 소리로 들렸지만.

그래, 가능할 수도 있다. 공은 둥글고 어디로 굴러갈지는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이 팀은 '부산 마린스'다. 무려 144경기에서 103패. 그야말로 역사적인 시즌이다. 혹자는 100년이 지나도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고 하는 굴욕적인 기록이다.

하지만 이 말을 내뱉은 사람의 명성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첫 턴 헌액자이자 역대 최다 우승 선수. 그리고 감독으로도 우승을 경험한 커리어다. 41승 103패가 100년이 지나도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면 바로 직전 해까지 메이저 현역 감독으로 있던 사람이 KBO에 감독으로 오는 것 역시 100년 내로는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그런 대단한 감독답게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으니 이런 이야기를 했겠지.

"이왕이면 정규시즌 그리고 한국 시리즈 통합 우승이 좋겠군요."

취소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포스트 시즌 우승이야 단기전의 특성상 일단 진출만 하면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감독이 명성에 어울리는 신들린 작전을 보여주는 거로 가능하다. 하지만 정규시즌은 다르다. 144경기의 레이스에서 우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순수한 기량이다.

다시 말하지만 144경기 41승 103패의 팀이다. 이번 시즌 정규시즌 우승팀이었던 재규어스가 89승 55패를 기록했다. 짱깨식으로 계산해도 무려 48승이 더 필요하다.

맙소사.

MVP급 선수의 기대 WAR이 7에서 8이다. 팀에 MVP급 선수가 최소 여섯 명은 더 들어와야 한다는 뜻이다. 감독 하나가 바뀌었다고 그만한 효과가 나온다고?

"성민이 그러더군.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특히나 마린스 같은 팀이라면 말이야."

야구에서 명장의 조건은 무엇일까?

작전의 성공률? 선수단 장악? 유망주의 발굴?

만 명의 사람이 있으면 그 모두가 기준이 다르다.

"작전의 성공률? 감독은 샤먼이 아니야. 물론 더 좋은 감독의 작전 성공률이 더 높을 수는 있지. 감독은 관리인이니까. 좋은 보모는 아주 조그마한 징조로도 아이들의 이상을 눈치챌 수 있는 것과 같달까?"

관리.

사실 야구 감독에게 가장 핵심적인 능력이다.

전략과 전술은 축구나 미식축구의 감독에게 더 필요하다. 그 종목들과 달리 야구는 결국 투수와 타자의 1:1에서 시작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2034년 부산 마린스는 대체 왜 100패를 했을까?

많은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주요한 원인을 고르자면 역시 주전 선수들의 노쇠화다. 그리고 그렇게 노쇠한 선수들에게 편중된 연봉. 비싼 가격과 인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해야 하는 선수들. 덕분에 유망주들에게 돌아가는 기회는 줄어들고 그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선수단은 두 개로 분열됐고 그걸 관리해야 하는 감독과 코치는 자기들 밥그릇 싸움에 급급했다.

마린스의 프런트는 프레스톤 윌슨을 일종의 분위기 전환 면피용 카드로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선택은 마린스의 가장 큰 원인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마린스의 팬들이 외국인 감독을 원했던 것은 과거 마린스가 한참 비밀번호를 찍을 당시 외국인 감독이 부임해서 그것을 해결해줬기 때문이다. 당시 마린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던 그 외국인 감독의 가장 큰 공로는 내부의 알력이나 정치질, 기타 영향력들과 상관없이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줬다는 점이었다. 국내에 인맥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프레스톤 윌슨의 부임에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프레스톤 윌슨이었다.

명예의 전당에 첫 턴에 헌액된 선수. 최다 우승자. 감독으로도 우승을 경험했으며, 바로 직전 해까지 빅리그의 현역 감독이자 지금도 여전히 러브콜을 보내는 구단이 있는 손꼽히는 명감독이다.

그렇다면 메이저리그 팀들은 대체 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낼까? 간단한 이유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그의 '커리어'다.

평범한 고등학생들과 학원 선생님의 관계만 하더라도 그 선생님의 커리어에 따라서 그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하물며 프로 선수들이다. 그들은 각자가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가진 전문가들이다.

'내가 당장 은퇴해도 저것보다는 더 잘하겠다.'

'기껏해야 2군이나 오가면서 동네 야구나 하던 사람이 감히 나에게 충고를?'

프레스톤 윌슨을 상대로는 감히 이런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

마린스의 산적했던 그 많은 문제는 프레스톤 윌슨의 권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맥이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의 권위 자체가 압도적이다.

물론 단지 그것만이었다면 프레스톤 윌슨의 호언장담은 헛소리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KBO의 특성 하나가 또 빛을 발했다.

용병.

두 명의 선발 투수와 하나의 타자.

KBO 대부분 팀은 팀의 1, 2 선발이 용병 투수다. 그리고 중심 타자에 용병 타자가 들어온다.

여기서 프레스톤 윌슨이 또다시 빛을 발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바로 작년까지 빅리그에서 현역 감독을 하던 사람이다. 물론 성적 등에 관한 정보량만 따진다면 미국만 주시하고 있는 마린스의 스카우트들 역시 크게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스 자체가 차이가 난다. 그리고 다른 국가에 와서 용병하기 위해서는 그 부분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용병들의 태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그래도 MLB에서 뛰어 본 선수인데?' 웃기지도 않는다.

그래, 보통의 팀이었다면 이 정도면 우승을 다툴만하다.

하지만 마린스다. 리그에서 두 번째로 큰돈을 쓰고 41승 103패의 역사적인 시즌을 만들어낸 전설적인 팀.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선수 출신이자 현역 감독임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프레스톤 윌슨에게는 또 다른 신분이 존재했다.

김성민의 양아버지.

보통이라면 호락호락하게 협조하지 않았을 마린스 성골 출신의 코치들이 놀라울 만큼 순순하게 협조했다.

"에이, 선배. 솔직히 말해서 윌슨 감독님이 뭐 천년만년 마린스에서 감독 맡을 사람입니까? 그냥 한국에서 소일거리 하는 거죠. 자기 사람 만들어서 감독시키고 그럴 것도 아니고요. 그냥 급한 불 끄는 소방숩니다 소방수. 감독님이 좋은 성적 만들고 물러난다고 치자고요. 그러면 누가 하겠어요. 뭐 옆 동네 노는 감독님 불러오겠습니까? 아니면 KBO는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 감독을 도와서 그 좋은 성적 만든 코치에게 분위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까?"

실로 요사스러운 혓바닥이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프레스톤 윌슨은 점령군이 아니다. 그는 그냥 잠시 불을 끄러 온 소방수다. 그렇다면 그의 엉덩이를 걷어찰 게 아니라 최대한 협조해서 어차피 내 것이 될 세간살이를 지키는 게 우선 아닐까?

-딱!!

유격수 방면 빠른 타구.

동엽이 몸을 날렸다.

가능하다. 그의 머릿속에 페데리코 수의 환상적인 수비가 떠올랐다. 그에 비하자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페데리코 수에 비하자면 박동엽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글러브를 절묘하게 피해 가는 타구.

"아, 진짜 미치겠네. 박동엽 저 새끼는 대체 몇 년째 주전 유격수를 하는 데 저런 실수를 하는 거야."

"KBO 수준 봐라. 저런 새끼한테 2년 연속 골글을 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겉멋만 들어서는. 진짜 아니 저기선 안정적으로 처리를 해야지. 대체 무슨 미친 짓이냐고."

언제 나와 같은 비난이 동엽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경기가 끝났을 때.

"충분히 해볼 만한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확률의 문제죠. 불규칙한 바운드가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프레스톤 윌슨은 동엽의 수비를 두둔했다.

언론을 향한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선수들 앞에서 동엽이 플레이를 칭찬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건 저런 과감함이야. 실수가 두렵다고? 이봐. 그런 걸 두려워했던 플레이의 결과는 이미 작년에 받아봤잖아.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작년 아니야?"

작년의 공필승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면 무책임하다느니 감독이 요행수만 바란다느니, 기본기를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식의 여론몰이가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메시지가 같아도 스피커가 다르다. 그것도 너무 다르다.

[프레스톤 윌슨!! 중요한 건 자신감과 과감함!! 침체된 마린스 선수단에 자신감을 불어넣다!!]

프레스톤 윌슨의 말이 마린스에게는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동엽에게는 정답이었다. 그에게 질책을 주는 사람은 충분히 많았다. 하지만 그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은 항상 부족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관전이 그를 성장시킨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경기 좀 봤다고 야구 실력이 늘 수 있다면 '답답해서 차라리 내가 뛰고 싶다.'라는 하드코어 야구팬들의 이야기는 현실로 이뤄져야 할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페데리코 수의 빛나는 플레이는 박동엽에게 상상력의 한계를 넓혀주었다. 물론 그 넓어진 상상력의 한계만큼이나 더 많은 에러가 그를 시련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더 많은 에러 속에서 그는 분명히 더 성장했다.

프레스톤 윌슨이 냉정하게 평가하기를

'빅리그에서도 2년짜리 계약 정도로는 긁어볼 팀은 충분히 나오겠는데?'라고 이야기할 만큼 말이다.'

그리고 동엽의 성장 속에서 마린스 역시 정말 어마어마한 질주를 시작했다.

프레스톤 윌슨의 호언장담처럼 곧바로 우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1년 차에는 정규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를 제압하고 플레이오프까지 올라갔지만 아쉽게 탈락. 2년 차에는 무려 정규시즌 1위를 달성하며 한국 시리즈에 직행 준우승. 3년 차에는 정규시즌 2위와 한국 시리즈 승리.

그리고 마지막 4년 차. 팀 역사상 두 번째 통합우승까지.

[마린스 유격수 박동엽 포스팅으로 미국 진출?]

이제는 굳이 마린스를 탈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동엽은 굳이 마린스 탈출이 아니더라도 그날 목격했던 세계 최고의 무대를 뛰고 싶다는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물론 박동엽의 진출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입방아들을 찧어댔다

-14억 받고 쟤 보내느니 그냥 우리가 쓰는 게 백배 나은데.-

-아니, 박동엽 보내면 유격수 누구를 쓰려고 미국을 보냄?-

-걱정하지 말라는. 어차피 2년 후면 다시 마린스로 돌아올 테니까. 원래 2년 후에 FA인 거 4년 쓸 수 있으니 더 경제적인 거 아님?-

-도전 의식을 갖고 외국에 도전하는 애한테 무슨 막말들이야.-

-근데, 도전도 너무 도전이었음. 뭐, 박동엽이 좋은 선수인 건 맞는데, 솔직히 김성민처럼 KBO 박살 낸 것도 아니고 4년간 KBO 원탑이었냐 하면 그것도 좀 애매하잖아.-

-무슨 소리야. 박동엽이 원탑이 아니라니. 용병 포함해서 최근 2년 동안 wRC+에서 3위 밖으로 나간 적 없는 유격수면 KBO 원탑이라고 봐도 무방한 거 아님?-

-도전은 무슨? 2년 80억 받는 도전도 있음? 한국 남는 것보다 더 버니까 가는 거지.-

-솔직히 금전적으로 따지면 2년 700만 달러, 80억 정도가 엄청 커 보이지만 외국 나가서 이것저것 들어가는 부대 비용들 생각하면 한국 남는 게 더 이득이었을걸? 박동엽 지금 연봉도 7억인가 그렇고 2년 후에 FA 되면 4년 100억 시작이라는 게 대세잖아. 게다가 나이도 어리니까 FA 최소한 두 번인데 미국에서 실패하면 6년 뒤에 FA 되는 거고. 금전적으로는 확실히 도전 맞음.-

-에이, FA는 아니더라도 해외 리턴파 연봉 짭짤하게 챙겨주잖아. 박동엽은 손해 볼 것 없지.-

이런저런 옵션들이 붙긴 했지만, 클럽 옵션으로 2+1년. 700만+500만짜리 계약. 개정된 포스팅 제도에 따라서 14억이라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선물을 마린스에 안긴 채 동엽이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6개월이 흘렀다.

"아, 내가 미쳤지. 대체 돈이 뭐가 중요하다고."

나름대로 가장 조건도 가장 좋았던 팀을 선택했던 6개월 전의 자신을 크게 원망하며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유격수인 동엽이 타석으로 올라왔다.

하필 팀을 골라도 이 인간이 같은 지구에 있는 팀을 고르다니.

지난 두 경기.

상대 전적은 7타수 무안타 4삼진. 0.000/0.000/0.000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 외전(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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