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71화 (272/287)

< 그 너머의 공 하나(7) >

세 번째 타순.

상대는 세계 최고 수준의 타자.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레드삭스의 팬들은 조금의 걱정도 생기지 않았다. 당연하다. 마운드 위의 투수가 보여주는 저 여유로운 웃음을 보라.

직전 이닝, 함께 기록을 이어가던 상대 투수는 삐끗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경 쓰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마치 애초에 넘을 수 없도록 설계된 최종 보스와 같은 느낌.

하지만 그럼에도 마르타 블랑코는 묵묵하게 자신의 루틴을 수행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태산을 만드는 것은 한 톨 먼지고, 댓돌을 뚫는 것은 한 방울 낙수다. 포기하지 않는 한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피곤한 몸과 다르게 고조된 신경.

예민한 손끝의 감각.

필 니크로가 감탄해 마지않은 가장 완벽한 너클볼이 성민의 손을 떠났다.

마르타 블랑코의 시선이 그의 손끝을 향했다.

충분히 끝까지 공을 보고.

최선을 다해 공이 올 것 같은 방향을 예측하고.

그저 힘껏 방망이를 휘두른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닿지 못했다.

-부웅

“스트라잌!!”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두 번 툭툭 털고 다음을 기다린다. 괜찮다. 어차피 저 공이 들어올 곳은 공을 던진 투수 본인도 모른다.

두 번째.

필 니크로가 기도했다.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결말이 결정된 그저 신의 손에 놀아나는 인간이라니. 그래요. 누군가는 이걸로 만족할지 모릅니다. 대단한 부와 명예 그리고 명성. 하지만 이 녀석은 김성민입니다. 여기서 약속된 패배를 당하기에는 그건 너무나도 작위적이잖습니까. 당신이 사랑했다는 그 전설적인 경기들은 모두가 이런 작위 위에 세워진 거짓이었습니까?

응답은 없었다.

이곳에는 그저 그가 상상했던 가장 완벽한 공을 던지는 완벽한 투수만이 존재했다.

-부웅!!

“스트라잌!!”

얼굴에 맺힌 자신만만한 미소가 더 짙어졌다.

사람들은 침묵한 채 그 투수를 바라봤다. 강력한 믿음을 담아서. 이 자리에서 그 자신만만한 미소 아래의 아슬아슬함을 아는 것은 오직 필 니크로뿐이었다.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만 있어도 그대로 무너질 아슬아슬한 경계의 곡예. 어느 쪽으로건 경계선 휙 너머로 기우는 순간 배팅볼이 돼버리는 아찔함. 심지어 성민 본인조차도 자신이 그 선 위를 영원히 달릴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3구.

성민의 확신은 일단은 현실이 됐다.

지금 이 자리. 랄로 가야르도와 더불어 가장 훌륭한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필 니크로의 근심은 더 짙어졌다.

당연했다. 만약 신이라는 놈이 그런 작위적인 이벤트를 좋아한다면 지금이 아니다.

그의 시선이 다저스 덕아웃의 저 늙어가는 타자에게 향했다.

기적적인 장면이 벌어진다면 바로 저 타자의 차례다.

7회 초.

성민의 퍼펙트가 이어졌다.

다저스의 덕아웃이 싸늘했다.

상식적이라면 이번 이닝에 투수를 교체함이 옳았다. 하지만 안타 하나를 허용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디아고 헤밍턴이 보여준 퍼포먼스가 너무 압도적이다. 게다가 다저스 입장에서 오늘은 어차피 벼랑 끝이다. 지금 그를 아낀다고 해서 7차전을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디아고 헤밍턴이 글러브를 쥐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아직이다.

나는 아직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다.

정신은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

우리가 발 디딘 곳은 현실 세계다. 지친 근육은 이전만큼 움직일 수 없고 한계까지 당겨진 힘줄과 인대는 비명을 내지른다. 가장 먼저 저하되는 것은 악력. 커맨드가 떨어지고 구위가 부족해진다.

다시 말하지만, 지난 1차전의 디아고 헤밍턴은 역사상 최고를 다툴만한 투수였다. 정신력으로 그것에 근접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괜찮았다. 언터쳐블의 투수는 아니었지만 지친 디아고 헤밍턴조차도 평균 이상의 투수였다.

다만 보스턴의 타자들 역시 방망이만 한정 짓는다면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특히나 이번 이닝은 2번 타자인 매튜 쿠퍼부터 시작되는 타순이었다.

선두 타자인 매튜 쿠퍼가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둘렀다.

낮게 깔린 커터가 스윗 스팟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의 무식한 손목 힘이 타구를 비틀었다. 쭉 뻗은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삼루수의 글러브를 벗어났다.

더 달릴까? 아니다. 너무 아슬아슬하다.

매튜 쿠퍼가 일루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노아웃 주자 1루.

성민이 주먹을 꽉 쥐었다.

랄로 가야르도의 차례다.

방망이만으로 한정 짓는다면 이 경기장 최강의 타자다.

다저스 덕아웃의 코치가 마운드로 오를 준비를 했다.

“No!!”

디아고 헤밍턴이 강하게 소리 질렀다. 물론 그가 소리 좀 질렀다고 걸어오던 코치가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보통이라면 교체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타이밍이다. 하지만 지난 경기들을 생각해보자. 보스턴의 타자들은 다저스의 모든 투수들을 골고루 두들겼다. 경기당 평균 9점. 보스턴의 타자들을 이만큼이나 막아낸 투수는 불펜과 선발을 통틀어 디아고 헤밍턴이 유일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 아직 손아귀에 악력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코치가 디아고 헤밍턴의 어깨를 두들겼다.

“진정해. 고작 공 하나 던지라고 널 마운드에 올린 거 아니니까.”

대기 타석의 랄로 가야르도가 타석으로 들어왔다.

디아고 헤밍턴이 자신의 뺨을 가볍게 짝 두들겼다. 할 수 있다.

착각이었다.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가 디아고 헤밍턴의 커터를 두들겼다. 일루의 매튜 쿠퍼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랄로 가야르도 역시 재빨리 일루를 향해 달렸다.

마운드의 디아고 헤밍턴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포기는 아직 일렀다.

페데리코 수에서 마르타 블랑코 그리고 케빈 체임벌린으로 이어지는 6-4-3 병살.

그 멋진 플레이를 해낸 내야수들이 글러브를 팡팡 두들겼다.

“좋은 땅볼 유도였어.”

“이런 타구라면 얼마든지 막아줄 테니까 안심하고 팍팍 던지라고.”

동료들의 응원으로 끌어낸 힘일까? 이어지는 5번 타자를 삼진으로 막아낸 디아고 헤밍턴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다시 성민의 차례. 이어지는 타자는 케빈 체임벌린.

이 작위적이며 뻔뻔한 전개에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극적 전개를 좋아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여기서 케빈 체임벌린이 점수를 내고 다저스가 승리한다면 8회 이후로 디아고 헤밍턴이 마운드에 오르지 않더라도 승리투수는 디아고 헤밍턴이다. 그리고 7차전의 마지막 즈음에 디아고 헤밍턴이 마운드에 오른다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스토리의 완성이다.

‘영감님, 뭐 하고 싶은 말 있죠.’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티 엄청나게 나거든요. 아주 뭔가 말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얼굴인데. 그냥 하세요. 괜히 나 퍼펙트 중이라고 신경 쓰지 마시고요.’

-그게, 그러니까. 그래 방심하지 말아라. 이런 상황에서는 경험 많은 노련한 타자만큼 무서운 상대도 없는 법이니 말이다.

‘뭐, 지금 말하기 그러면 이따 경기 끝나고 우승 파티 때 이야기하시던지요.’

케빈 체임벌린이 타석에 들어왔다.

여전히 몸은 무겁다. 하지만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을 잊게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일뿐. 실제 몸은 여전히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노장의 몸 그대로였지만.

마운드 위에서 가볍게 몸을 풀던 성민이 필 니크로에게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영감님, 저 사실 눈치 챘습니다.’

-어? 뭐라고? 네가 대체 어떻게?

화들짝 놀라는 필 니크로에게 성민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바보도 아니고. 영감님이랑 같이 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눈치 못 채겠습니까. 요즘 엄청 이상하게 굴었잖아요. 떠나실 때 된거죠?’

-어, 어? 그래. 그렇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를 은근슬쩍 월드 클래스라는 말로 바꿨는데 역시 통하지 않았나 보네요. 언제입니까? 이번 경기에서 제가 이기면 인가요? 혹시 제가 패배하면 안 떠나시는 겁니까?’

-성민아!!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압니다. 알아요. 그런 거 엄청 구리구리하잖아요. 그러니 똑똑히 지켜보세요. 이게 영감님이 그렇게 바라던 너클볼로 세계 최고를 노릴 가능성. 아니 너클볼로 세계 최고가 된 투수의 모습이니까요.’

필 니크로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야구의 신에게 소원을 빈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며 이 무대는 저기 저 디아고 헤밍턴이 빌었던 소원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이 무대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초구.

가장 완벽한 너클볼.

케빈 체임벌린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볼 카운트 0-1

‘느낌이 좋습니다. 평소에는 이런 공을 던지는 게 상당히 까다로웠는데 지금 구속이 좀 떨어져서 그런 건지 오히려 쉬운 느낌이에요.’

-성민아.

두 번째.

마찬가지로 완벽한 너클볼.

하지만 첫 번째 스윙보다 조금 더 깨끗해진 그의 폼이 성민의 공을 걷어냈다.

-딱!!

빗맞은 타구가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케빈 체임벌린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아저씨 운이 좋았네요.’

-······.

과연 운일까?

그리고 세 번째.

케빈 체임벌린의 스윙이 한층 좋아졌다.

-뻐엉!!

하나 빠진 공.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볼넷이라면? 녀석의 스토리는 분명 저 노장의 감동적인 홈런과 디아고 헤밍턴의 승리투수일 것이다. 여기서 만약 볼넷으로 녀석을 내보낸다면? 게다가 애초에 이런 머리 아픈 일은 오히려 성민이 녀석이 전문 아닌가. 녀석이라면 대충 웃으면서 이런 일조차도 해결해낼지 모른다.

네 번째.

필 니크로의 눈이 케빈 체임벌린에게 닿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것 가운데 가장 완벽한 폼. 가장 완벽한 힘의 분배. 가장 완벽한 스윙. 아마 야구의 신이 있다면 그 역시 이것과 흡사한 스윙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직 조금, 아주 조금 부족했다.

-딱!!

거대한 파울 홈런.

성민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주 조금 세게 밀었을 뿐 제법 훌륭한 너클볼이었는데 저걸 저렇게 두들기다니. 확실히 방심할 수 없는 타자다.

-성민아 할 이야기가 있다.

.

.

.

정신에서 정신으로 전해진 그 긴 이야기에 성민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야구의 신이라는 녀석 손바닥 위에서 추는 춤이고, 저는 영감님의 목적과 디아고 헤밍턴의 목적을 위해 키워진 수단이라는 이야기네요?’

필 니크로가 차마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볼넷으로 녀석을 내보내는 게 야구의 신인지 뭔지가 원하는 스토리가 아닐 거다. 왜요? 차라리 여기서 강판 당하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요?’

-그래, 확실히 그것도 나쁘지는······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크게 와인드업을 했다.

-성민아!!

성민은 그 이야기에서 야구의 신이 했던 말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전지도, 전능도 나의 영역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너클볼은 본래 그런 공이다.’

공을 던지는 투수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공을 받는 포수도 어떻게 받아야 할지 짐작할 수 없으며

공을 치는 타자는 그저 방망이를 휘두르고 기도해야 하는

마치 야구의 신이 강림한 것 같은 케빈 체임벌린의 스윙 앞에 필 니크로가 상상했던 가장 완벽한 너클볼을 넘어선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나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투수가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피칭을 보여주는 것?

아니, 본래 모든 스승에게 가장 기쁜 것은 청출어람이다. 그 순간 필 니크로는 자신이 바랬던 모든 것이 그 이상으로 이뤄졌음을 깨달았다.

야구의 신조차 알 수 없는 공이라니.

김성민.

2034년 월드 시리즈.

2경기 18이닝 무실점. 2승. 한 번의 퍼펙트. 그리고 MVP.

< 그 너머의 공 하나(7) > 끝

ⓒ 묘엽

작가의 말

일단은  길었던 이야기가 271화만에 끝이 났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사실 아직 조금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편은 이게 끝이고 조금 긴 후일담이 외전이라는 이름으로 연재가 됩니다.

적은 분량은 아니고 최소 10화에서 길면 20화까지도 가지 않을까 싶네요.

외전 연재는 다음주 금요일부터 주 5회로 진행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따라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마지막까지 만족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