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70화 (271/287)

< 그 너머의 공 하나(6) >

성민은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만약 필 니크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사실 재기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전성기의 구속을 되찾는다면 KBO에서도 에이스급의 투수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토종 선발 투수가 부족한 KBO의 환경을 생각하면 오히려 C급 FA인 건 호재다. 부담 없이 다른 팀들에서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KBO다. 메이저리그?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혹여 도전한다고 해도 첫 FA가 끝난 만 33세 이후에나 가능했겠지. 위상 역시 지금과는 판이하였을 것이다.

기껏해야 불펜이나 중무리 정도? 게다가 설사 운 좋게 선발이 됐다고 하더라도 그리 오래 가긴 힘들었을 거다. 당장 저 천하의 욘 마르틴만 보더라도 이제 만 35세에 불과함에도 구속 저하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성민이라고 크게 달랐을까.

‘영감님 고맙습니다.’

-갑자기 고맙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냥 고마워서요. 야구가 원래 재밌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감님 덕분에 더 재밌어졌거든요.’

그 순간 필 니크로가 속에서 울컥 새어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성민이 말하지 않았던가.

좋은 게 좋은 거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는 할 필요 없다고. 그렇기에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싱겁기는. 원래 진짜 재밌는 경기는 힘들게 싸우고 결국 이기는 경기라는 건 잘 알고 있지?

‘당연하죠. 저도 졌지만 잘 싸웠다는 사양이라고요.’

필 니크로의 시선이 다저스의 덕아웃으로 향했다.

디아고 헤밍턴.

괴물 그 자체.

그리고 그 순간 필 니크로의 머릿속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죽음 이후에 있었던 대화. 그 상황. 그리고 그 장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도.

죽음 이후에 있었던 ‘그’와의 대화를 대체 왜 잊고 있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지금에서야 기억이 난 걸까. 이제 정말 떠날 때가 됐다는 의미일까?

차라리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죽음을 앞둔 당시의 필 니크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대로 죽어 사라진다면 앞으로 너클볼은 30년은 후퇴할 것이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현대의 야구사에서 그것은 사실상 너클볼의 종결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필 니크로는 소원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존재가 그가 꿈꾸던 너클볼을 던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고.

야구의 신은 평생을 너클볼에 헌신했던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성민과 필 니크로의 만남은 그렇게 일어났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성민을 위해 필 니크로가 내려온 것이 아니다. 필 니크로를 위해 성민이 존재한 것이다.

하지만 사건의 전말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필 니크로가 야구의 신에게 소원을 말하는 그 순간.

그의 곁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경기가 계속됐다.

사람들은 성민의 피칭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물론 성민 본인은 그 공을 던지기 위하여 집중력을 극한까지 짜내는 어려운 작업을 해내야만 했다. 하지만 너클볼의 특성상 겉보기에 설렁설렁 던지는 것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더군다나 성민은 누군가의 평가에 따르자면 사이 영보다 아카데미가 더 어울리는 남자다. 그런 사람이 여유로움을 연기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다.

반면 디아고 헤밍턴의 피칭은 위태로움을 느끼게 했다.

마운드 위의 그는 계속 화가 난 상태였다.

-딱!!

“#!$%!#$!%#$%[email protected]$%”

그 화가 절정에 다다랐던 것은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그의 공을 두들겨 안타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던 야수들에게인지 아니면 그런 타구를 허용한 자신에게인지. 방향 모를 분노가 마운드 위에서 폭풍처럼 쏟아졌다.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얼굴이 붉게 물든 디아고 헤밍턴이 콧김을 내뿜었다.

두들겨 맞은 투수가 흔들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것도 5회까지를 퍼펙트로 막아낸 투수가 6회 초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한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아, 이거 안 그래도 위태위태했는데 저렇게 무너지는 건가?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투수를 바라보며 미셸 에쉬만은 지금이 기회임을 직감했다.

아직 젊은 혈기가 불러온 미숙함이다. 아마 녀석도 이번 기회를 통해 더 좋은 투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1루에서 디아고 헤밍턴의 신경을 슬쩍슬쩍 긁었다. 좌완 강속구 투수인 디아고 헤밍턴이 상대인 만큼 무리하게 많이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분노를 주체하지 못 하는 느낌의 투수였다. 슬쩍슬쩍 신경을 긁어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초구.

미셸 에쉬만이 신경을 집중했다.

비록 팀에서는 부도덕한 꼰대. 수비는 제법이지만 방망이는 딱히 믿을만한 게 못 되는 사람 취급받는 미셸 에쉬만이지만, 12년 동안 일곱 개의 팀 떠돌았고 34세 시즌에 보스턴에서 3년 1,200만의 계약을 끌어낸 남자다. 코너 외야수로서 기본적인 수준의 타격능력은 보유하고 있다.

마음이 흔들린 투수의 공따위!!

-부웅

“스트라잌!!”

물론 그렇다고 항상 쳐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타자와 투수의 싸움은 투수에게 유리하다. 10번 중 3번만 안타를 만들어도 훌륭한 타자인 세상 아닌가. 하지만 분위기의 흐름은 명백하게 이쪽에 있다. 어떻게든 두들겨만 낸다면!!

-부웅!!

“스트라잌!!”

일루를 지키던 케빈 체임벌린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번에 2루를 밟기는 글러 보이는구만.”

“그거야 아직 모를 일이죠.”

“저걸 보고도?”

어떻게든 쳐내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한 타자의 모습에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영감 속이 너무 투명하게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 마운드의 저 자식이 보여주는 분노. 저거 아무리 봐도 일부러 만든 분노 같은데?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투쟁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에이스가 마운드에 서는 순간만큼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디아고 헤밍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정에 충실하고 다정한 남자였지만 마운드 위에서만큼은 폭군으로 변신한다.

지친 몸은 이제 그만 쉴 때가 됐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그의 투쟁심이, 그의 욕심이 아직은 아니라고 소리쳤다. 명백하게 느려진, 하지만 미셸 에쉬만 정도를 쓰러트리기에는 충분한 공이 존을 통과했다.

“스트라잌!! 아웃!!”

보스턴의 덕아웃.

-성민아.

디아고 헤밍턴의 피칭을 지켜보던 필 니크로가 성민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위해서였다.

‘잔소리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녀석의 피칭은 녀석의 피칭. 제 피칭은 제 피칭이죠. 게다가 저 녀석 고작 안타 하나로 무너질 녀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었어요.’

성민의 시선이 마운드의 디아고 헤밍턴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필 니크로는 도저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이 경기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

죽음 이후의 세계.

야구의 신?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인지를 초월한 어느 거대한 존재가 물었다.

-그대가 이론적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자를 원한다고?-

필 니크로의 대답을 읽은 그가 난색을 표했다.

-차라리 회귀는 어떤가? 아니면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하는 것도 괜찮고. 부상을 입지 않는 몸을 줄 수도 있다네. 혹은 다른 사람의 상태창을 보는 능력은 어떤가? 요즘은 그게 또 인기라던데.-

하지만 필 니크로의 의지는 완강했다.

회귀? 그는 자신의 인생에 후회가 없었다.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역사에 남을 인생을 살았다. 물론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잘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위대한 동료들 적수들 나아가 그가 만들었던 인생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환생은 조금 끌린다.

심지어 부상조차 없는 몸으로 환생이라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야구 선수의 몸 그 자체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린 세상이다. 미련으로 가득한 늙은 정신이 새 몸에 들어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혹여 달라진다면 달라지는 것 자체로 문제다. 그렇게 된 자신은 더 이상 지금의 자신이 아닐 테니까.

상태창?

말할 것도 없다.

-곤란하군. 곤란해. 그건 도저히 숫자가 맞지 않는단 말이지.-

-아, 신이 무슨 숫자냐고? 이봐. 신도 신 나름이라네. 전지전능은 나의 영역이 아니야. 게다가 최근에는 기원에 타격을 입는 바람에 가뜩이나 부족했던 자원이 더 부족해졌단 말이지.-

-아, 잠깐만.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겠군. 마침 저 녀석의 소원이 너와 겹치지 않는 범위에 있으니 둘을 동시에 이뤄주는 건 어떤가?-

그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눈앞에 선 거대한 존재의 존재감에 파묻혀 느껴지지 않던 몇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

-아, 저 녀석은 본 적이 없는 녀석이라고? 뭐, 인간에게 시간은 선형적이니 조금 이상할 수 있겠군.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거를 위해서는 과거보다는 미래가 낫지 않겠어?-

이제는 그림자를 넘어 또렷한 형상을 한 그가 이야기 했다.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일 최고의 적수를 원한다.

그리하여 나의 한계를 뛰어넘겠다.

역사에 기록될 가장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그것이면 족하다.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로 교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교만한 말이 조금도 교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녀석은 괜찮다는군. 뭐 그렇게 해도 여전히 좀 손해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개인적으로 재미도 있을 것 같고 말이야.-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잊지 말라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너, 그리고 저 녀석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

마운드 위.

야구의 신에게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적수를 허락받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 함성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니, 아직은 한계가 아니다.

나의 적수는 아직도 저렇듯 여유롭지 않은가. 나는 그보다 젊고 그보다 크고 그보다 강건하다. 내가 먼저 쓰러질 이유 따윈 없다.

필 니크로는 알고 있었다.

마라토너가 위대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완벽한 페이스메이커다.

위대한 신의 계획에서 성민이란 존재는 필 니크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디아고 헤밍턴이라는 투수의 위대함을 끌어내기 위한 페이스메이커에 불과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또한, 모든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최고의 적을 이겨낸다. 마치 모든 마라토너가 결국은 페이스메이커를 제치고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자, 이제 또 제 차례네요.’

완벽하게 완성된 최고의 페이스메이커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띠고 마운드 위로 올라갔다. 필 니크로는 그 웃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7회 초.

마르타 블랑코의 차례가 돌아왔다.

< 그 너머의 공 하나(6)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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