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너머의 공 하나(5) >
어린아이들은 항상 꿈을 꾼다.
누군가는 훌륭한 대통령을, 누군가는 위대한 박사를, 또 누군가는 유명한 아이돌을.
하지만 현실은 강력하고 그 앞에 꿈이란 파도 앞의 모래성과도 같다. 대부분 아이는 자라면서 그 꿈을 잊고 현실을 살아간다.
하지만 아주 가끔.
누구보다 훌륭한 재능과 그 재능 이상으로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매번 파도 앞에 허물어지는 모래성을 쌓고 또 쌓고 또 쌓아 올린다.
그들은 실제로 그 모래성을 쌓는 데 성공하였는가, 혹은 성공하지 못하였는가와 무관하게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분명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는 분명 재능이 넘치는 남자였다. 어쩌면 역사상 그보다 더 재능이 넘치는 사람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 놀라운 재능으로도 이루기 힘든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는 실패하고 또 실패했으며 또 다시 실패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으로 성공했을 때, 우습게도 그 성공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닌 누군가의 커다란 도움이 아래였다.
그는 분명 위대한 재능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빛나게 하는 것은 그 재능이 아니었다. 실패할 때마다 더 단단해지고 패배할 때마다 더 옹골차게 변하는 그 의지.
만약 야구의 신이 있다면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마운드 위에서 그 누구보다 더 선발 투수답게 공을 던지는 이 사나이를.
승리는 항상 옳다. 설사 고난이 없다 하여도. 하지만 항거할 수 없는 고난 앞에 굴하지 않고 얻어내는 승리는 옳음을 넘어 눈부시게 빛난다.
디아고 헤밍턴이 그 눈부신 승리를 향하여 손을 뻗었다.
-부웅!!
“스트라잌!!”
필 니크로가 그 피칭에 고개를 끄덕였다.
욘 마르틴이 먼 훗날, 성민을 위한 자산이 될 투수였다면 저 디아고 헤밍턴은 현재의 성민을 막아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적수다. 마치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그 스티브 칼튼처럼.
좋은 적수야말로 사람을 절차탁마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원동력이었으니.
랄로 가야르도가 덕아웃 난간에 바짝 붙어 디아고의 공을 지켜봤다. 관중석의 동엽 역시 자신도 모르게 점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부러웠다. 지금 저기서 뛰는 선수들은 얼마나 신날까? 얼마나 재밌을까? 문득 어린 시절의 일이 기억났다. 초등학생 시절. 그의 학교에는 브랜드 아파트를 사는 아이들과 빌라에 사는 아이들이 있었다. 동엽은 빌라에 사는 아이 중 하나였다. 사실 별다른 차별이 있었다는 기억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정말 부러웠던 것은 브랜드 아파트의 놀이터였다. 놀이 기구 의자에 푹신한 쿠션이 깔려있다는 그 놀이터.
어린 동엽은 그 놀이터를 그저 담장 밖으로 힐끔힐끔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월드 시리즈라는 세계 최고의 놀이터를 펜스 밖에서 바라보는 지금. 동엽은 그 시절 느꼈던 그것을 뛰어넘는 강력한 갈증을 느꼈다.
2회 그리고 3회가 지나갔다.
경기 전 많은 전문가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1차전이요? 물론 대단한 경기였죠. 하지만 5차전은 양상이 많이 다를 겁니다. 일단 1차전의 그 호투는 투수들도 투수들이지만 대단한 수비의 연속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야수들의 타격감도 며칠을 쉰 탓인지 조금 별로였단 말이죠. 하지만 지금 2, 3, 4차전을 거치면서 야수들의 타격감도 절정으로 올라왔습니다. 세 번의 경기에서 양팀 합계 55점의 점수를 냈어요. 저는 도저히 그 화끈한 방망이가 식을거라고는 믿기 힘들군요.”
“투수와 타자는 많이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타자 쪽이 유리하기 마련입니다. 보통 정규 시즌에서는 타자들이 같은 선발 투수를 만나는 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리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사이에 정말 많은 투수를 상대한단 말이죠. 하지만 포스트 시즌에서는 다르죠. 고작 나흘의 휴식입니다. 실제로 같은 시리즈에서 두 번째 등판한 투수들은 성적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 등판한 두 투수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합리의 너머에 있었다.
필 니크로가 생각하기에 1회 초 마운드에 오를 당시의 성민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했다. 닷새 전 9이닝 100개가 넘는 공을 던지고 다시 마운드에 서는데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라니.
그리고 4회 초인 현재.
성민의 육체는 1회 초 마운드에 오르던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쁘다. 닷새 전의 피칭으로 상처 입은 인대와 힘줄 그리고 완벽히 회복되지 못한 근육은 지난 3이닝 47개의 공으로 더 악화됐다.
필 니크로는 2차 대전기에 태어난 옜날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케케묵은 정신론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이란 결국 육체에 종속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그 케케묵은 정신론이 나온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민을 자극하는 경쟁자의 분투.
심지어 자신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은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칭은 너무나도 압도적이다. 그 경쟁자의 피칭이 성민을 한층 더 깊숙한 곳으로 몰아붙였다.
더 예리하고 더 날카롭게. 손끝에 온 정신을 집중해서. 1초를 수백으로 쪼갠 찰나의 시간에 오가는 어마어마한 정보의 교환.
필 니크로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신경 세포를 오가는 전기와 화학물질의 그 화려한 움직임으로 환하게 빛나는 성민의 몸이.
더 빠른 공은 항상 옳다.
하지만 더 빠르지 못하더라도 길은 존재한다. 너클볼은 본래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공이었으니까.
성민의 공이 춤을 추며 들어왔다.
이번 시리즈에서 마르타 블랑코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타자였다. 이 컨디션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면 내년의 MVP를 자신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예리한 감각과 예측력이 0.25초의 시간 동안 성민의 공을 파악했다.
약을 먹고 신이 됐던 전성기의 배리 본즈는 타이밍을 놓친 공에 한 타임 쉬었다가 다시 방망이를 휘둘러 홈런을 만들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르타 블랑코의 그것은 약마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스윙의 시작이 매우 늦었다는 점. 그럼에도 그 압도적인 배트 스피드가 그것을 메워줄 수 있었다는 점 정도는 어느 정도 흡사했다.
-딱!!
하지만 방망이를 휘두른 마르타 블랑코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커다란 당혹감이었다.
1회 초 첫 번째 타석과 또 다르다.
더 현란하게.
더 짜증나게.
높게 떠오른 타구가 루시 알베리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디아고 헤밍턴 역시 지지 않았다.
성민이 그의 분투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디아고 헤밍턴 역시도 성민의 호투에 자극을 받았다.
지고 싶지 않다.
어린 아이와 같은 유치한 생각.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의 그것은 어린아이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몰아치는 파도에 수없이 허물어지는 모래성을 바라보며 더 이상 모래성 쌓기를 포기해버리는 대부분 사람과 달리, 그는 그 허물어지는 모래성에 대한 집착을 더, 더, 더 크게 쌓아온 남자였으니까.
1차전 다저 스타디움에서 벌어졌든 그 장면이 펜웨이 파크에서 재현됐다.
조금 달랐던 것은 1차전의 그 싸움이 지켜보는 이들에게 대체 누가 승리할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쟁투였다면, 이번 싸움은 누가 먼저 무너질지를 걱정하게 하는 사투라는 점이었다.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매튜 쿠퍼가 고개를 저었다.
디아고 헤밍턴 녀석의 피칭은 혀를 내두를 만큼 사기적이었다. 1차전의 그 빈공이 타격감 때문이라고? 헛소리. 그건 그냥 지금 이 시점. 디아고 헤밍턴이라는 투수가 메이저리그에서도 규격 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1999년과 2000년. 그 위대했던 에이스처럼. 또한, 저 빌어먹을 페데리코 수 녀석. 녀석은 오늘도 철벽과도 같았다.
하지만 매튜 쿠퍼가 고개를 저은 것은 그를 막아선 저 강력한 적수들 때문이 아니었다.
랄로 가야르도
그의 뒤를 이어 타석으로 올라가는 저 망할 자식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와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않고 타석으로 올라가는 녀석의 표정은 뭐랄까? 그래, 마치 크리스마스 아침에 트리 밑 선물을 뜯으러 뛰어나가는 조카 놈들의 표정을 닮았다.
천재라는 놈들은 이런 순간에 저렇게 즐거울 수 있는 것일까? 지금 마운드에 선 저 괴물도, 덕아웃에서 그를 지켜보는 괴물도. 그리고 타석으로 즐겁게 달려나간 녀석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미셸 에쉬만이 그에게 다가왔다.
최악의 인간이다. 꼰대. 바람이나 피우는 주제에 그게 메이저리그의 전통이라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인간.
“자신의 능력에 맞는 야망을 가져라.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지.”
“헛소리하실 거면 경기에나 집중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저렇게 될 수 있는 녀석들은 한 줌이야. 우리 같은 녀석들은 그냥 길고 오래 리그에 붙어있는 게 남는 장사라고.”
매튜 쿠퍼가 고개를 돌렸다.
“이 바닥에 있으면서 참 많은 인간을 봤어. 대부분 녀석은 너와 같았지. 포기를 몰라. 그 녀석들? 진작에 어디 한 군데 고장 나서 야구를 관뒀지. 운 좋은 녀석이라면 모아둔 돈으로 어디서 세차장이라도 하나 운영을 하든지, 피자를 배달하든지 하겠지. 최악의 경우에는 어디에서 약 배달 하다 총 맞고 뒤졌을 수도 있고 말이야.”
“그냥 저리 가시라고요.”
“그런데 말이야. 정말 천 명 중에 하나. 아니 어쩌면 만 명 중에 하나는 꽤 근사해지더란 말이지. 물론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라도 절대 천 명 중에 하나, 만 명 중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생각은 없어. 그건 진짜 멍청한 짓이거든.”
메이저리거가 된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꿈을 이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본인은 알 수 있다. 자신이 꿈을 이뤘는지, 아니면 중간에 포기를 했는지를.
어쩌면 10년 전의 자신일지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충고를 건낸 미셸 에쉬만이 경기를 지켜봤다. 운이 좋다면 이번 이닝. 그게 아니더라도 다음 이닝 쯤에 돌아올 자신의 타석을 위하여.
랄로 가야르도의 신경이 디아고 헤밍턴에게 집중됐다.
다른 모든 선수가 느끼는 그 복잡한 감정 따위 그는 느끼지 않았다. 고작 그런 잡다한 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이 순간이 너무 아깝다.
본래 게임에서 가장 재밌는 순간은 깨질 듯 깨질 듯 깨지지 않는 어려운 미션을 마침내 해결했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재밌는 놀이터이며 지금 마운드에 선 상대는 세계에서 가장 재밌는 놀이 상대다.
재능.
압도적 재능.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그 의욕은 드높지만 분명 컨디션은 1차전 보다 부족하다. 저 격렬한 투쟁심의 뒤편에는 지친 육체가 있다. 1차전의 디아고 헤밍턴이 애초에 공략 불가로 등장한 이벤트 보스였다면 지금은 약점을 공략한다면 무너트릴 수 있는 정상적인 보스다.
공과 방망이가 오갔다.
몇 개는 미트에 들어갔고 몇 개는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디아고 헤밍턴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일곱 번째.
바깥쪽 꽉찬 코스.
타이밍을 빼앗는 체인지업.
우타자를 상대로 한 그의 결정구다.
랄로 가야르도의 시선이 야구공에 못박혔다.
이건 빠지는 공이다.
살짝 아쉽다. 하지만 볼넷이라도 어쨌든 공략은 공략이다. 세상에는 한 방에 마무리를 지을 수 없는 적도 있는 법이고 하나하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가 멈춰섰다.
-뻐엉!!
에드 맥밀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떠냐. 이 재수 없는 자식들아. 지금 승부에 임하는 것은 투수와 타자만이 아니고 이 승부를 결정 지을 자격 역시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다.
빠지는 공을 완벽하게 스트라이크로 둔갑시킨 22년 만의 포수 MVP(예정)가 희미하게 웃었다.
< 그 너머의 공 하나(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