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68화 (269/287)

< 그 너머의 공 하나(4) >

LA 다저스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지금 타석에 들어서는 사나이가 어떤 사나이인지를.

케빈 체임벌린.

최근 15년 동안 14번의 포스트 시즌 진출과 12번의 지구 우승. 9번의 월드 시리즈 진출. 그리고 세 번의 우승. 왕조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하지만 이 시대 최강의 팀이 LA 다저스였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 사나이가 있었다.

클러치 히터는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다. 득점권, 큰 경기, 혹은 큰 경기에서의 득점권 등등 조건이라는 것은 매우 자의적이고 표본이 커지면 커질수록 평균에 수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진짜 클러치히터가 있다면 이런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위기 상황에서 더 잘 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대체 평소에는 왜 그 능력을 안 쓰는 겁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클러치 히터는 존재한다. 단 그것은 숫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기를 지켜본 팬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로 남는다.

포스트 시즌의 성적, 혹은 득점권 타율 등으로 계산했을 때 케빈 체임벌린의 성적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커리어 평균 성적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LA 다저스의 팬들은 믿고 있었다.

꼭 필요한 순간.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그 순간.

다저스의 캡틴은 그 기대에 응하는 사나이라고.

“이거 어깨가 좀 무거운데?”

“그게 다 나이를 드셔서 그런 겁니다. 그 연세에 10월 말까지 야구하는 건 쉽지 않죠. 그러니까 오늘로 그 고생 싹 끝내고 집에서 애들이랑 노세요.”

“이것 참, 에드가 자네와 이야기만 하고 나면 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겠구만. 하지만 야구는 고생이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놀이지. 이 어깨의 무거움은 자네도 아마 한 10년쯤 지나면······. 아, 미안 그래도 자네 정도로는 알기 힘들겠구만. 이런 종류의 부담감은 자네 정도의 선수가 느끼기는 좀 힘든 종류거든.”

한순간 에두아르도가 할 말을 잊었다.

실제로 명예의 전당에 첫 턴에 헌액될 만큼 손에 꼽을 커리어를 가진 선수가 커리어로 내리누르는데 대체 뭐라고 대꾸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집에서 애들과 노는 것도 좀 힘들어. 애들이 10대가 되면 아버지랑 노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걸 더 좋아해서 말이지. 차라리 직장이 제일 속이 편하다니까.”

케빈 체임벌린이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그곳에 더이상 세파에 찌든 중년의 사내는 없었다. 남은 것은 15년의 위대한 커리어를 가진 다저스의 캡틴뿐이었다.

성민이 야구공을 가볍게 쥐었다.

다시 말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은 고작 닷새 전, 130개에 가까운 공을 던지며 9.1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내다가 홈런 한 방에 패전투수가 됐었다. 그렇기에 성민은 디아고 헤밍턴이 상상 이상의 활약을 보여준 것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많은 사람이 디아고의 압도적인 포스에만 주목할 때, 성민은 그의 다른 부분을 바라봤다.

걸음걸이, 호흡, 팔의 높이와 각도. 그 모든 것이 말하고 있었다. 저 녀석 지친 것은 확실하다. 다만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꺾이기는커녕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과연 이 시대 최고의 투수 소리를 들으려면 육체적인 기량 외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저 정도는 갖춰야 한다는 뜻이겠지.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한 마디를 건넬까 망설이던 찰나.

성민이 좌우로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타자부터.’

내가 상대하는 것은 상대 투수가 아닌 방망이를 쥐고 선 타자들이다. 그러니 일단은 눈앞의 타자에게 집중하겠다.

세상 모든 일이 계획대로 풀릴 수는 없다.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성민 역시 인생에 커다란 실패를 경험해봤다.

그렇기에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다.

성민에게는 이런 사소한 오류 정도는 깔아뭉개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필 니크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너클볼로 세계 최고가 될 확률이 있는 사람으로 성민이 선택된 것은 어쩌면 바로 이것 때문 아닐까? 저만한 재능을 지닌 아이가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구겨지지 않은 채 다시 야구에 정면으로 설 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물론 프로 야구 선수로 성공하는 게 아니면 도저히 길이 없는 남미 빈촌의 아이였다면 비슷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하지만 절박함으로 무언가에 매달린 사람은 작은 성공에 만족하기 쉽다. 그런 아이들이 지금 성민만 한 성공을 거뒀음에도 여전히 이 귀찮은 유령의 말을 호락호락하게 들어가며 세계 최고가 되겠다고 고생을 할 수 있을까?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다.

케빈 체임벌린이 크게 방망이를 들었다. 동엽의 표현처럼 거대한 곰과 같은 몸이 위압적이다. 작년 다저스에 있던 시절보다 한층 더 거대해졌다는 느낌이 전해진다.

우선 몸쪽 깊숙한 코스로 하나.

-딱!!

성민의 속구에 케빈 체임벌린의 방망이가 따라나왔다.

반응이 살짝 늦었음에도 배트 스피드가 어마어마하다. 아슬아슬하게 존에서 빠지는 코스에 집어넣은 절묘한 공이 파울로 둔갑했다.

볼카운트 0-1.

성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이번에야말로 가장 좋은 너클볼이다. 전신의 신경을 손끝에 집중했다. 지금 몸 상태에 걸맞은 가장 적절한 감각. 팔을 휘두를 때 생기는 회전력에 반대 방향으로 손가락을 튕겨냈다.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서는 더 빠르게 팔을 휘둘러야 하고, 거기서 생기는 회전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더 강하게 손가락을 튕겨내야 한다. 그 와중에 로케이션까지 신경쓴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곡예.

하지만 성민은 이번에도 그 터무니없는 곡예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수행했다.

그리고 그런 성민의 공을 상대로 케빈 체임벌린은 너클볼을 치기 위한 교과서적인 답안을 그대로 수행했다.

내가 볼 수 있는 한계까지 공을 잘 보고.

가장 자신 있는 스윙을 한다.

그리고 너클볼이 내가 예상한 코스로 와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부웅!!

“스트라잌!!”

성민의 79.8마일 너클볼이 방망이와는 거의 공 반개만큼 떨어진 곳을 지나갔다.

케빈 체임벌린이 타석에서 잠시 걸어나와 장갑을 동여맸다. 볼카운트는 0-2. 상대는 사상 최고의 너클볼 투수. 무대는 커리어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월드 시리즈다.

완벽하다.

그들의 에이스가 놀라운 역투를 보여줬다. 애송이이던 시절부터 살펴봤던 녀석이 그런 각오를 보여준 상황이다. 캡틴이라는 녀석이 여기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해서야 면이 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영웅이 되기 위해 태어났고,

영웅으로 살아온 남자가 성민의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빠졌다.

커트했고, 또 빠졌다.

그리고 여섯 번째.

이번에도 역시 가장 좋은 공.

하지만 조금 전보다 살짝 빠지는 코스.

물론 노린다고 너클볼이라는 놈이 그 노린 코스로 착착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런 마음으로.

여섯 번째 공이 날아왔다.

0.2초.

아직 공이 절반도 채 오지 않은 상황이다. 상대의 공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너클볼이라는 괴물이다. 대체 어디로 틀어박힐까?

다시 말하지만, 기존의 경험으로는 너클볼을 예측할 수 없다. 메이저리그에 온 이후 성민에 관한 데이터를 모조리 숙지했지만, 여전히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이것은 경험이라기보다는 그저 케빈 체임벌린의 직감이었다.

빠진다.

하지만 볼카운트는 2-2.

만약 휘두르지 않고 공이 들어온다면 그대로 루킹 삼진이다. 그리고 지금 미트를 낀 남자는 그 에두아르도 크루즈. 미트로 치는 장난질은 역대 최고를 다투는 포수다.

만약 20대의 케빈 체임벌린이었다면 여기서 방망이를 휘둘렀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30대 후반. 이제 은퇴를 목전에 둔 노련한 케빈 체임벌린은 가장 중요한 순간 믿어야 할 것은 직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비합리적인 일들이 가득하고, 특히나 이곳 메이저리그에서 이름을 남기는 놈들은 대부분 그런 비합리의 극치를 달리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직감은 본능이었지만, 선택은 경험이었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마침내 풀카운트.

경기를 지켜보던 박동엽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야, 근데 지금 저거 박동엽 아님?-

-박동엽? 무슨 헛소리야. 메이저리그에 박동엽이 왜 나와. 루시 알베리가 수비 잘 보고 있구만.-

-박동엽 그 실책쟁이가 메이저리그에 있으면 웃기긴 하겠다.-

-실책쟁이라니. 언제적 이야기 하는 거임. 작년 유격수 골든글러브에 올해도 골든글러브 제일 유력한데.-

-그게 무슨 헛소리? 올해 골든글러브는 블레이즈 김승섭이지.-

-아니, 선수 말고. 저기 뒤에 카메라에 잡힌 사람 말이야.-

-어? 잠깐만. 진짜 박동엽 닮았는데?-

-박동엽 맞을걸? SNS에 미국행 비행기 티켓 사진 올라왔었음.-

-미친, 팀이 그 지랄이 났는데 지는 월시 보러 미국을 갔다고?-

-팀이 지랄이 나고 뭐고 간에 박동엽은 할만큼 했지. 솔직히 올해 마린스에서 박동엽만큼은 까방권 줘야함.-

-야구가 개인 기록 겨루는 경기도 아니고. 팀 스포츠인데. 역대 최다패 팀의 선수한테 까방권은 무슨 까방권임.-

-근데 진짜 엄청 진지하게 경기 관전 중이네? 카메라가 저렇게 비추는데 카메라 쳐다도 안 봄. 설마 얘 메이저리그 진출에 관심 있는 건가?-

-풉. 박동엽 클라스에 메이저는 무슨. 그냥 성민이 경기니까 보러 간 거겠지.-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의 팬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당황하건 말건 동엽의 시선은 진지했다. 요 며칠 그의 머릿속을 괴롭히던 그녀의 얼굴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성민의 공. 그리고 방망이를 들고 선 타자 뿐이었다.

일곱 번째.

무언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경기장에 가득했다.

그래, 저 녀석도 사람인데 110개에 가까운 공을 던지고 고작 나흘을 쉬었는데 컨디션이 100%일 수는 없지. 또한, 녀석은 이제 겨우 메이저 2년 차고 이번 시즌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뛴 데다가 포스트 시즌까지 하면 거의 240이닝을 던졌다. 무엇보다 NPB나 KBO에서 뛰다 온 동양인 투수들의 내구성 문제는 유명하다. 퍼질 때도 됐다.

LA 다저스의 팬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그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필 니크로는 그저 침묵했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야구는 기록을 겨루는 스포츠가 아니다.

가끔은 멋진 하이킥이나 어퍼컷보다 가벼운 잽 한 방이 더 효율적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분위기를 바꾸고, 상대를 완벽히 침몰시키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그 순간을 알아채는 것은 본능 혹은 경험.

성민은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너클볼을 선택했다. 그리고 타석의 케빈 체임벌린 역시 성민이 그런 선택을 할 것임을 직감했다.

볼 수 있는 한계까지 공을 잘 보고.

가장 자신 있는 스윙을 한다.

그리고 너클볼이 내가 예상한 코스로 와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본능과 감각 그리고 경험의 싸움에서는 늙은 타자가 승리했다.

하지만 승부를 가르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기량.

늙은 타자의 방망이가 전성기와 비슷한 힘을 품은 채 움직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전성기의 예리함도, 전성기의 날렵함도, 전성기의 유연함도 없었다. 늙은 타자의 방망이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너클볼에 닿지 못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컨디션을 걱정했던 에이스의 분전과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언가를 해내던 노장의 활약으로 고무됐던 LA 다저스 팬들. 그리고 덕아웃에서 초조하게 해바라기 씨를 씹던 다저스 선수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짓밟아버리는 삼진이었다.

분위기 탓일까? 아니면 성민의 공이 그만큼 위력적이어서일까?

이어지는 두 명의 타자가 허무하게 물러났다.

시리즈 패배에 대한 불안이 다저스의 덕아웃을 짓눌렀다.

그리고 모두가 시리즈의 패배를 걱정하는 이 순간.

오직 오늘의 승리만을 생각하는 투수가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 그 너머의 공 하나(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