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67화 (268/287)

< 그 너머의 공 하나(3) >

그 수준 높은 싸움에 동엽이 흥분했다.

91.9마일의 몸쪽 높은 코스 꽉 찬 속구. 당연히 치라면 칠 수 있다. KBO에서 흔히 말하는 프로의 기본 조건은 150짜리 공을 칠 수 있느냐 없느냐였고 동엽은 KBO 최고의 현역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방금 그 공이라면?

대답은 당연히 No다. 염두에 두지 못했던 공이다. 게다가 지금 몸은 온통 직전의 80.4마일 너클볼에 맞춰진 상태다. 91.9마일은 결코 감당하지 못할 속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80.4마일에 타이밍을 맞춘 상황에서 91.9마일은 감당하기 힘든 속도다. 오히려 저만큼이나 방망이가 따라 나간 마르타 블랑코의 배트 스피드가 대단하다고 봐야 했다.

이건 이 자리에서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공부가 된다. 새삼스럽게 성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타석에 세실리아 마토스가 들어왔다.

다저스의 우익수. 당연히 나쁜 선수는 아니다. 애초에 시즌 중에는 역대 최강의 팀 소리를 들었던 다저스다. 그런 팀의 2번을 치는 타자가 나쁠 수는 없다. 어디에 가중을 두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가장 유명한 두 개의 사이트에서는 그가 3.7 그리고 4.1의 승리기여도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이 정도면 거의 올스타급의 활약을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딱!!

[높게 뜬 타구. 내야를 벗어나지 못 합니다. 세실리아 마토스!! 2구째 내야 뜬공 아웃.]

그는 놀라울 만큼 무기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실리아 마토스가 그리는 스윙의 궤적이 그 속도가. 그리고 공의 방향을 판단하는 판단력이. 모든 면에서 동엽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어지는 3번 타자.

에드 맥밀란.

그는 이번 시즌 내셔널리그의 가장 강력한, 아니, 거의 확실한 MVP다.

그가 생각했다.

바로 나흘 전 그 끔찍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자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성민 녀석 컨디션이 최고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녀석이 무서운 투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좋게 말하자면 작년보다 조금 더 간결해진.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금 더 설렁설렁 던지는 자세에서 성민의 공이 출발했다.

작년, 에드 맥밀란은 성민의 공을 받기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사실 공을 받는 것과 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만약 공을 받는 요령을 익혔다고 타격을 잘하게 될 수 있다면 세상 그 많은 포수들의 타격이 엉망인 것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너클볼을 받기 위한 훈련은 사실 허비라는 표현이 딱 적절했다. 애초에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공을 받는 훈련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에드 맥밀란은 결국 그것을 해냈다. 그것은 그의 놀라운 신체능력, 그리고 알 수 없는 짐승같은 본능의 승리였다.

성민의 공은 여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 대충 저 범위구나.’ 그러면 그 범위에 오는 공은 흘리지 않고 전부 다 받아내야지 하는 각오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충 저만한 범위로 오겠구나 하는 짐작. 그리고 그 범위의 공을 모조리 쳐보겠다는 각오.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거대한 미트를 이용해서 ‘면’으로 받아내는 포구와 ‘선’으로 두들기는 타격은 달랐다. 초구 헛스윙 스트라이크.

에드 맥밀란이 실망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양호하다.

1차전의 그 악몽 같았던 공에 비한다면······.

‘아니, 공이 약해진 게 아니라 내가 조금은 익숙해진 건가?’

두 번째.

마찬가지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최선을 다하고, 남은 것은 행운에 기대는 마음으로.

-딱!!

손끝이 얼얼하게 저렸다. 높게 떠오른 타구. 세실리아 마토스와는 달랐다. 에드 맥밀란의 힘은 진짜였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좌익수 정면. 미셸 에쉬만이 가볍게 공을 낚아챘다.

고작 공 여덟 개로 1회 초 삼자범퇴.

최악의 결과다.

하지만 에드 맥밀란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가능성이 보인다.

그리고 경기를 관전하던 박동엽은 2년 만에 보는 성민의 공에 새삼 감탄했다. 선배 정말로 메이저에 와서 더 강해졌구나. KBO 시절에도 이미 완성된 투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했지만 이건 거기서 또 한 차원 더 수준이 높다. 과연 이 정도 수준이니 메이저 최고를 다툴 만한 거구나.

성민이 평가하기를 자신보다 반 수쯤 뛰어난 투수.

필 니크로가 평가하기를 샌디 코팩스나 밥 깁슨, 스티브 칼튼과 비견할만한 투수.

그리고 시대의 보정을 버리고 객관적인 실력만으로 평가한다면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역사상 최강의 투수.

마운드에 디아고 헤밍턴이 올라왔다.

그는 나흘 전 거의 130개에 달하는 공을 던졌다.

게다가 9.1이닝 동안 2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퍼펙트를 기록하던 중 단 한 번의 실수로 패전투수가 됐다.

그렇기에 성민은 오늘 그의 컨디션은 최악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디아고 헤밍턴의 얼굴빛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지난 사흘.

디아고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최고의 경기였다.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 최고의 상대와 싸웠다.

단 한 번의 삐끗.

많은 사람이 이야기한다. 9.1이닝이나 퍼펙트를 기록했는데 패배했다는 것은 점수를 못 내준 야수들의 잘못이라고.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의 높은 프라이드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성민은 디아고의 컨디션이 최악에 가까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이었다. 최선을 다해 회복에 힘썼지만, 사흘은 너무 짧았다. 애당초 사람의 몸은 100마일짜리 공을 던지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제롬 스튜버츠가 타석에 들어왔다.

1차전과는 다르다.

지난 세 번의 경기에서 그들의 타격감은 점점 올라왔다. 실제로 그들은 지난 3경기 동안 27점이라는 경기당 평균 9점의 득점을 기록했다.

게다가 디아고 헤밍턴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투수가 지쳤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구속이나 구위가 아니다. 커맨드다. 성민이야 워낙에 커맨드가 특기이고 너클볼이라는 구질 자체가 종잡을 수 없는 공인 만큼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은 어떨까?

이 시대, 아니 어쩌면 야구 역사상 최강의 투수가 생각했다.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1차전 그는 역사에 남을만한 피칭을 선보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점수를 낼 수 있는 좋은 타자가 필요했을까? 그래, 그랬을지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역사에 남을 만큼 좋은 피칭을 넘어선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마운드에 선 디아고 헤밍턴의 얼굴에서 지친 기색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한 것은 압도적인 투쟁심.

지난 나흘 내내 내면으로 침착하여 되묻고 되물으며 키워내고 키워낸 그 야수가 포효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역사에 남을 만한 대단한 경기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승리.

시리즈를 뒤집고 팀에 우승을 가져올 수 있는 압도적인 승리다.

“아, 저건 솔직히 반칙이지.”

성민의 중얼거림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적수는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 대부분 이야기에서 성장하는 것은 주인공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렇다면 어쩌면 지금 마운드의 저 괴물은 성민이라는 터무니없는 적수가 만들어낸 업보가 아닐까?

바로 몇 분 전까지 성민의 피칭에 감탄하던 KBO의 한 유격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대체 뭐지?

아니, 잠깐만. 저거 분명 나흘 전에 130개 가깝게 공을 던지지 않았나? 게다가 몇 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피곤에 찌든 샐러리맨 같은 얼굴로 있던 녀석 아니었나? 무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도 아니고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선발 투수 중에 제정신 아닌 녀석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저건 좀 심한데?

제롬 스튜버츠에 이어 매튜 쿠퍼 그리고 랄로 가야르도까지.

다들 대단한 타자들이고 가까이서 보고 싶던 타자들이었다. 하지만 1회 말 보스턴의 공격이 끝났을 때 동엽의 기억에 남은 것은 마운드 위에서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던 이 시대 최강의 투수뿐이었다.

2회 초

마침내 타석에 케빈 체임벌린이 들어왔다.

미국으로 오기 전 동엽이 가장 보고 싶던 야구 선수를 꼽는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다투는 남자다. 지난 10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상징하는 두 명의 아이콘이 있다면 그건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와 이 남자, 케빈 체임벌린일 것이다.

가까이에서 본 케빈 체임벌린은 두껍고 거대했다.

마르타 블랑코가 보기보다 커다랗다는 느낌이라면 케빈 체임벌린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커다랗다는 느낌이었다. 마린스의 코치인 형진이나 리더인 태경도 곰 같은 사내였지만 그와는 또 달랐다.

‘선배님들께는 미안하지만, 그분들이 겨울잠을 자기 전의 곰 같은 느낌이라면 이쪽은 겨울잠을 자고 막 깨어난 곰 같은 느낌이랄까?’

프로필상 120kg의 체중을 모두 근육으로 꽉 채운 것 같은 단단함.

물론 시즌을 치르는 사이 지방이 상당히 빠진 몸이기는 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애초에 근육과 체지방의 비율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물론 이것을 태경이나 형진이 게을렀다고 표현할 수만은 없다. 고양이에게 넌 왜 호랑이처럼 커지지 못하냐를 탓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초에 타고난 골격과 포텐셜 자체가 다른 것이다. 아마 그들이 저와 같은 몸을 만들고 시즌을 치렀더라면 진작에 어딘가 망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위대한 선수의 등장을 평생의 라이벌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은 몇 번 없었던 사나이가 TV를 통해 바라봤다.

TV에 비친 그것은 한때 홍안이었던 하지만 이제는 자신만큼이나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긴 시간이었다.

팽팽하던 얼굴은 이제 숨길 수 없는 주름이 또렷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얼굴뿐이지만 그의 몸도 아마 자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성기의 순발력과 탄성은 흔적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고 비대하게 키운 몸으로 간신히 근력만을 붙잡고 있겠지.

그나마 쓸만한 것이라면 오랜 시간 뛰어온 경험이라는 놈 정도? 하지만 마운드의 투수는 지금까지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괴물이니 그것도 그리 쓸모있는 녀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리암 루카스는 알고 있었다. 야구의 신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드라마를 사랑하는 존재일 것이라는 사실을.

야구의 역사를 보자면 가장 중요한 순간 그런 드라마틱한 사건은 너무나도 많았다.

바로 직전 수비.

마운드의 디아고 헤밍턴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다.

평생을 야구에 헌신했던 한 선수를 위한 기적을 일으켜줄 순간 말이다.

그렇게 절대 보스턴이 지는 꼴을 보고 싶어서가 아닌, 정말 순수하게 함께 늙어가는 라이벌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야구의 신이라는 녀석에게 기도했다.

“그러니까 위에서 지켜보고 계신다면 잘 좀 부탁합니다.”

< 그 너머의 공 하나(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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