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66화 (267/287)

< 그 너머의 공 하나(2) >

완벽한 투수.

그리고 그 앞에 기량과 컨디션이 극에 다다른 MVP급 타자가 섰다.

마르타 블랑코

그는 최고의 공이 들어온다고 해도 그 공을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타자라는 것을 앞선 경기들로 증명했다.

경기장을 찾은 보스턴의 팬들이 마르타 블랑코의 등장에 수군거렸다.

“나 마르타 블랑코 저 녀석 나오면 좀 불안해.”

“뭐가? 지난 1차전 경기 못 봤어? 다저스 타자들 성민한테는 쪽도 못 썼잖아.”

“그렇기는 한데 마르타 블랑코 컨디션이 워낙 쭉쭉 올라와서. 게다가 펜웨이에서 유독 잘 하는 것 같지 않아?”

“그거 나 이번 특집 기사에서 읽었던 거 같아. 뭐라더라? 다저 스타디움이 좀 투수 구장이라면 펜웨이는 타자 구장이고 가뜩이나 마르타 블랑코는 중장거리 타자라서. 2루타 특화인 우리 구장에 어울린다더라. 게다가 저 녀석 발도 빨라서 좌익수가 그린 몬스터 맞고 나오는 공 커버 조금만 잘못해도 인 사이드 파크 더 홈런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하던데?”

그리고 같은 시간.

동엽은 자본주의의 힘을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요 며칠 워낙에 형편없는 자리에서 경기를 지켜봤기 때문일까? 체감이 더 확 온다.

“그나저나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알겠네.”

사진이나 영상. 혹은 저 멀리서 오페라글라스로 볼 때와는 느낌이 확 달랐다. 조금 펑퍼짐한 옷 아래로도 거대한 몸의 크기가 느껴진다.

내야수.

그것도 유격수 다음으로 순발력과 유연성이 필요한 이루수의 몸이 저 크기라니. 물론 동엽은 벌크업에 회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2010년대 이후 KBO의 전반적인 흐름은 내, 외야를 가리지 않는 벌크업 쪽이었으니까. 사실 옳은 일이다.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건 근육이고 몸에서 근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는 건 결국 힘이 증가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힘의 증가는 항상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정 부위의 힘이 더 강해진다는 건 그걸 받쳐주는 다른 부위에 그만큼 더 큰 무리가 간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가뜩이나 갑작스러운 동작이 많은 내야수의 경우 부상의 위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운동선수에게 부상은 치명적이다. 사람의 몸은 기계와 달리 마음대로 바꿔 낄 수가 없다. 특히나 인대나 건의 손상은 되돌릴 수 없다. 노화와 별개로 운동능력의 저하는 필연적이다. 최대한 본인의 상황에 맞게 전문가의 도움 아래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동엽은 참을 수 없는 증량의 유혹을 느꼈다.

[타석에 마르타 블랑코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 선수 같은 경우 최근 경기에서 몹시 놀라운 타격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죠?]

[그렇습니다. 최근 3경기로 한정 지으면 무려 13타수 6안타 슬래시 라인이 0.462/0.533/1.231을 기록 중입니다. OPS가 1.231이라고 해도 매우 놀라운 수치인데 이게 OPS가 아니라 장타율이에요.]

[물론 마르타 블랑코 선수의 페이스 대단하다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6개의 안타 가운데 2루타 하나에 홈런만 세 개. 그야말로 불방망이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첫 번째 경기. 김성민 선수의 등판까지 고려하면 성적이 많이 달라지죠? 첫날 김성민 선수가 등판했던 경기에서 김성민 선수를 상대로는 3타수 무안타. 그리고 10회에 올라왔던 마무리 릭 코디로리 선수에게 1타수 무안타. 0.462/0.533/1.231의 기록은 0.353/0.421/0.941로 떨어지죠. 물론 여전히 무서운 숫자이고 무서운 타자입니다. 하지만 오늘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는 저 무서운 타자를 3타수 무안타로 틀어막았던 김성민 선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보통은 같은 리그, 같은 지구 소속이라고 해도 한 시즌에 맞붙는 경기는 19경기에 불과하며 같은 선발 투수가 같은 달에 같은 팀을 두 차례 상대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포스트 시즌은 다르다. 한 시리즈,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같은 투수를 다시 상대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투수와 타자가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유리해지는 건 타자다. 타격은 결국 타이밍이고 피칭은 그 타이밍을 훔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포스트 시즌 한 시리즈에 두 번이나 등판하는 것은 투수에게 상당한 불리하다.

그리고 경기장에 모인 선수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을 기다리는 마르타 블랑코도, 공을 준비하는 성민도 마찬가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시즌 다저 스타디움의 파크팩터는 0.896으로 전체 26위. 펜웨이 파크는 1.087로 전체 5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차이다.

여기까지가 경기 직전 마르타 블랑코가 그의 동료들과 떠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성민의 공이 그 모든 이론들을 부쉈다.

-부웅!!

“스트라잌!!”

79.9마일 너클볼.

타이밍에 익숙해지면 유리해지는 건 타자라고?

젠장할. 세상에 80마일짜리 공에 타이밍을 못 맞추는 타자가 어딨겠는가. 심지어 성민은 디아고 헤밍턴처럼 디셉션이 터무니없어서 공이 나오는 타이밍을 맞추기 힘든 투수도 아니다. 정석에 가까운, 하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설렁설렁하는듯한 폼이다.

문제는 저 어디로 갈지 제 마음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너클볼 그 자체다.

‘아니야.’

마르타 블랑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성민의 무기는 그것만이 아니다. 그가 저 압도적인 투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타이밍의 너클볼. 그리고 허를 찌르는 속구와 칼로 잰듯한 커맨드가 모두 합쳐진 결과다. 그렇기에 그의 타이밍이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진 지금.

해볼 만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민 역시 지쳤다는 점이다.

79.9마일.

도량형은 인간이 만든 단위일 뿐이다. 사실 81마일이 80마일이 되는 것이나 80마일이 79마일이 되는 것이나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숫자가 주는 느낌이 다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다른 느낌을 굳이 이성으로 억제할 필요가 없었다.

마르타 블랑코가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61.7의 느린 너클볼.

그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걷어냈다.

볼카운트 0-2.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싸인에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속지 않는다.

지난 시간. 아이비 리그를 졸업한 LA 다저스의 비싼 인력들이 녀석을 정말 샅샅이 분석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저거 완전 미친놈이다. 종잡을 수가 없다. 심지어 가끔은 포수가 싸인도 안 보냈는데 고개 먼저 저어버린다. 저 녀석 행동에 괜히 신경 쓰면 지는 거다. 그냥 공만, 오직 공만 생각해야 한다.

필 니크로의 시선이 마르타 블랑코에게 향했다.

아름답다.

물론 그의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 니크로의 눈에만 보이는 세계.

극한까지 단련된 인간의 육체가 고도의 집중력과 어우러져 한계까지 도달한 그 모습은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활성화된 신경 시냅스들이 춤을 춘다.

그리고 그토록 높은 곳에 도달한 타자가 도전자의 자세로 성민을 향해 서 있다. 성민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필 니크로의 시선에는 명백하게 보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저 타자가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투수라는 것을.

성민이 관중석에 가득 찬 팬들도, 그를 응원하는 지인과 가족도, 그의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귀신조차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미세한 감각. 그 아주 작은 차이가 완벽한 공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성민의 몸이 꿈틀 거렸다.

80.4마일의 빠른 너클볼.

필 니크로가 수차례 목격한 성민이라는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너클볼이었다.

아니,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민이라는 투수는 이미 너클볼 역사상 가장 대단한 투수였다. 물론 시대의 보정을 거친다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무섭게 발전한 야구 기술의 역사를 생해보면 역대 그 어떤 너클볼 투수도 성민에게 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것은 너클볼 역사상 가장 대단한 투수가 던지는 가장 완벽한 너클볼. 너클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필 니크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대단한 공이었다.

포수 뒤편의 가장 좋은 자리.

타자와 가장 비슷한 시선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동엽의 눈이 커졌다.

이건 칠 수 없는 공이다.

저 공 앞에서는 동엽 자신이나 저 메이저의 MVP급 타자인 마르타 블랑코나 별 차이가 없으리라. 그래, 물론 방망이를 휘두르다 보면 어쩌다 맞는 경우도 나오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행운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바라야 하는 것은 역량이 아닌 행운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타자의 몸이 움직이는 순간 알게 됐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지. 그가 바라보던 세계의 밖에는 이런 터무니 없는 괴물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딱!!

마르타 블랑코의 방망이가 그 완벽한 너클볼을 두들겼다.

행운?

그럴 리가.

타이밍만 완벽하다면 저 완벽한 너클볼이라고 해도 걷어내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타구가 파울라인을 훌쩍 넘어갔다.

마르타 블랑코의 본능이 소리쳤다. 이제 같은 공이 또 들어온다면 이번에는 어떻게든 페어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 성민. 어쩔 생각이냐. 네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도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머릿속에 지난 3차전 그리고 4차전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3차전의 대패. 그리고 4차전은 꾸역꾸역 버텨냈다지만 마르타 블랑코는 억제하지 못 했다. 가장 좋은 공을 던지고도 두들겨 맞았던 투수들의 얼굴은 항상 흔들렸다. 브라이언 보일과 맥스 슈피겐의 차이는 그것을 참고 버텨냈느냐. 아니면 무너졌느냐의 차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성민은 어떨까?

필 니크로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공을 던진 투수를 그리고 그 공을 걷어낸 타자를 바라봤다. 타자의 몸에 호르몬들이 아우성쳤다. 그렇다면 투수는?

‘괜찮다. 침착해라. 그런 말씀 않으셔도 됩니다.’

필 니크로는 여전히 침묵했다.

스스로에게 되뇌는 저 투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만약 필 니크로 자신이 저런 완벽한 너클볼을 던질 수 있다면? 답은 뻔하다. 다음 공 역시 바로 저 너클볼이다.

하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는 성민이었다.

1800년대 초반 최초의 야구팀 이후 2034년 현재까지.

야구의 기술은 꾸준히 발전해왔다. 40년대부터 30년대까지 근 90년의 세월동안 야구를 지켜본, 그리고 그 가운데 약 20년 가깝게는 직접 최고의 무대에서 뛰어 본 필 니크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순수하게 기량만 따지자면 과거의 선수는 현대의 선수를 이길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대의 선수는 과거의 선수들이 답습해온 수많은 경험 위에 선 존재들이다. 본래 더 멀리 보는 것은 거인이 아닌, 거인의 어깨에 선 사람이기 마련이니까.

성민의 몸이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타석의 타자가 공을 판단했다.

80마일짜리 공이 날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공의 범위. 그리고 마지막 순간 배트 컨트롤까지. 그 모든 요소를 고려했다.

그리고 그 판단보다 약 0.02초 빠르게 성민의 공이 움직였다.

대부분 사람은 가장 잘 드는 검을 손에 드는 순간 수단과 목적을 헷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운드의 투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장 완벽한 공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국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타격은 타이밍이며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일이라는 것을.

91.9마일.

메이저 평균보다는 조금 느린.

하지만 이번 시리즈 그가 보여준 모든 공 가운데 가장 빠른.

-부웅!!

훌륭한 코스, 완벽한 타이밍으로 들어간 성민의 속구가 마르타 블랑코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스트라잌!! 아웃!!”

< 그 너머의 공 하나(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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