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너머의 공 하나(1) >
“아, 네 그러면 그건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성민을 바라보며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민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라 뭐 그런 말씀이시죠. 그 잔소리도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괜히 반가운데요?”
그것은 바로 내일 등판일이 잡힌 투수라고는 믿기 힘든 여유로움이었다. 하물며 경기도 그냥 경기가 아니다. 무려 월드 시리즈. 그것도 우승이 달린 경기다.
-너 설마 뭐 또 이상한 계획 세우고 그러는 거 아니지? 보너스를 더 받으려고 일부러 7차전까지 가겠다든지, 이왕이면 극적이고 쫄깃한 승리를 위해서 7차전까지 가겠다든지 그런 헛소리 하는 거 아닌 거 맞지?
“에이,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연히 진지하게 우승 노려야죠.”
사무국에서야 이왕이면 조금 더 쏠쏠할 수 있도록 6차전 7차전까지 가줬으면 하고 바라지만 선수들 입장은 좀 다르다. 아무래도 홈에서 우승을 확정 짓고 싶다. 애당초 우승의 순간 눈앞에서 축하해주는 사람들의 숫자도 다를뿐더러 이왕이면 1년 동안 그들을 응원해왔던 사람들의 눈앞에서 우승을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성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11월 촬영 스케줄을 짜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내일 선발로 등판하는 녀석이?
“어차피 등판 준비는 다 끝냈잖아요. 게다가 이번 겨울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요. 드라마 촬영에 엄마 결혼에 한국도 들어가 봐야 하고. 한국 들어가면 예능도 두 개 정도는 나가야 할 테고. 게다가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니까 영화도 하나 찍을 계획이란 말입니다.”-마치 내일 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한 것 같이 말하는구나.
“이길 확률이 더 높겠죠.”
방심일까?
필 니크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봤을 때의 성민은 철부지 애송이. 방심왕 그 자체였다. 그러나 성민은 바뀌었다. 적어도 필 니크로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물론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성민과 필 니크로가 처음 만난 것이 벌써 3년 하고 2개월 전이다. 죽음 이후까지 따지자면 100년이 넘는 세월을 품고 있는 필 니크로에게도 3년 2개월은 길다. 하물며 이제 만으로 31살밖에 안 된 성민에게 3년 2개월은 인상의 1할이 넘는 시간이다. 바뀌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렇기에 필 니크로는 성민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성민이 필 니크로의 영향을 받아 변했던 것처럼, 필 니크로 역시 성민의 영향으로 변했다. 그 변화 속에는 성민이라는 인간을 향한 신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필 니크로는 성민을 혼내는 대신 질문을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그리고 잔소리 대신 질문을 하는 필 니크로의 모습에 성민이 웃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버지에게 처음 칭찬을 들은 아이처럼.
“예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컨디션 좋은 날의 저는 컨디션 보통인 날의 디아고보다는 좋은 투수라고요.”
-그랬지.
“제가 생각할 때 전 그때보다 조금이지만 더 좋은 투수가 됐거든요.”
-내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비슷하지 않나 싶었는데, 지난 경기를 보니까 디아고 자식도 거기서 조금 더 좋은 투수가 돼버렸더라고요. 곤란하게 말이죠. 하지만.”
-하지만?
“말씀드렸잖아요. 컨디션 좋은 날의 저는 컨디션 보통인 날의 디아고보다는 좋은 투수라고요. 그 자식 1차전에서 무려 127개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퍼펙트가 와장창 되면서 패전투수가 됐죠. 반면 저는 105개. 거기다 덤으로 승리투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컨디션이 다르다. 뭐 이런 이야기로구나.
“물론 녀석이 몇 살 더 젊으니 회복 속도가 조금 빠르기는 할 거고 저도 100개가 넘게 던졌으니 루틴대로라면 원래는 닷새를 쉬어야 하는데 나흘밖에 안 쉬는 거라 좀 피곤하긴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거의 130개를 던지고 멘탈까지 와장창한 녀석이 고작 나흘 만에 정상으로 돌아올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러니까 퍼펙트를 걸고 싸우던 그 순간에.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결정을 내리면서 여기까지 생각을 했다는 뜻인가? 다음 등판 일정까지?
“사실 우리가 3연승 해버리고 4차전에 디아고가 그냥 등판하는 것도 염두에 뒀었는데 그래도 다저스 하던 가락은 있어서 한 경기는 이겨 주네요. 덕분에 제가 그리던 가장 좋은 그림이 그려졌어요.”
-자신은 있는 게냐?
“밥상을 여기까지 만들어놨는데 이걸 못 떠먹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죠.”
***
“컨디션은 좀 어때?”
“요즘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아주 날아다니고 있죠. 문제는 나 혼자만 날아다니는 것 같다는 점이지만요.”
케빈 체임벌린의 질문에 마르타 블랑코가 어깨를 으쓱했다.
건방진 대답이었지만 이번 시리즈 그가 거둔 성적을 생각해보면 그는 충분히 건방질 자격이 있었다. 4경기 동안 홈런만 무려 세 개. 아마 다저스가 이번 시리즈를 역전 할 수 있다면 시리즈 MVP를 가져가는 것은 9이닝 10회 초 원아웃까지 무려 스무 개의 삼진을 챙기며 단 하나의 주자도 1루에 내보내지 않았던 디아고 헤밍턴이 아닌 이 남자가 될 것이다.
“그러는 캡틴 컨디션은 좀 어떻습니까? 이제 슬슬 찬 바람 불면 뼈가 시리고 막 그럴 나이잖아요.”
“찬 바람 불면 뼈 시린 건 진작에 그랬었고, 지금은 아침에 눈만 떠도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이러다가 조만간 지팡이라도 마련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갑자기 웬 엄살입니까. 마흔 전까지 캡틴 자리 내놓을 일 없다고 큰소리 빵빵 치시던 양반이.”
“그러게 말이다. 아무래도 10월이라 그런가? 조금 센티멘탈 해지는 것 같네. 그래서 말인데 ······.”
“거참. 이 양반이? 어디서 영화도 안 보고 다니시나. 괜히 사망 플래그 꼽지 마시고 이럴 시간에 가서 마사지나 한 번 더 받고 스트레칭이나 한 번 더 하세요. 괜히 1루까지 뛰다가 억!! 이러면서 다리 잡고 쓰러지지 마시고.”
마르타 블랑코가 케빈 체임벌린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모레면 마흔.
슬슬 은퇴를 생각할 나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시리즈 스코어 3:1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년의 캡틴을 부탁하는 장면 따윈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케빈 체임벌린이었다. 다저스에서만 15년. 그의 마지막에 어울리는 장면은 조금 더 화려하고 조금 더 극적인 장면이다. 그래, 이왕이면 커미셔너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이제 남은 1년은 오롯하게 나의 야구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멘트 정도가 딱 어울린다.
“3경기 이기면 그만이잖아. 안 그래?”
어쩌다 여기까지 몰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LA 다저스.
메이저리그 최강의 팀이었다.
그리고 내일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는 그들의 에이스. 시대를 넘어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이름을 새길 남자다. 나흘 만의 등판? 마지막 경기 127개의 투구 수?
그딴 것에 굴할 것 같았으면 이 자리에 서지도 못 했다.
마르타 블랑코가 다시 한번 내일 경기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
경기 당일 아침.
홈구장에서 뛰는 경기였지만 시리즈가 시리즈였던 만큼 집이 아닌 호텔에서 단체로 묵었다. 평소 특별히 가리는 것이 없는 성민이었기에 호텔에서 제공하는 제품들을 그대로 사용했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시리즈가 시리즈였던 만큼 집에서 가져온 베개와 이불. 그리고 특별하게 부탁해서 호텔이 준비한 매트리스까지. 거의 완벽했다.
조금 귀찮은 준비였지만 사실 호텔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니었다. 현재 성민은 그야말로 보스턴의 영웅이다. 만약 오늘 경기에서 성민이 승리한다면 두고두고 이 방과 침대는 김성민이 2034년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기 전에 사용했던 물건이라며 홍보하겠지.
성민이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꼼꼼한 스트레칭. 특별히 신경을 쓴 만큼 어디 결리는 곳은 없었다. 필 니크로 역시 별말이 없다. 어딘가 문제가 있었다면 백 퍼센트 잔소리할 양반이었으니 이건 아주 멀쩡하다는 증거였다.
“영감님.”
-응?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 것도 조금 웃기긴 합니다만. 왜 하필 저였습니까?”
-왜 하필 너였느냐고?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드라마나 영화, 하다못해 옛날 전래동화 같은 것만 봐도 그런 이야기들 많잖습니까. 알고 보니 제가 뭔가 착한 일을 해서 상을 받는다든지, 혹은 영감님이 의도치 않게 나에게 뭔가 잘못을 해서 그걸 메우려고 왔다든지. 사실 죽은 사람이 이렇게 귀신으로 나타나서 야구를 가르쳐준다는 거 조금 이상하잖아요. 게다가 결과를 좀 보십쇼. 너무 어마어마하잖습니까. 기껏해야 KBO에서 B급 FA가 꿈이던 녀석이 사이 영 상에 월드 시리즈에서 이러고 있다는 게요.”
-정말 네 말처럼 3년이나 지난 이제 와서 묻는 게 조금 웃긴 질문이긴 하구나. 하지만 지금까지 네 행동들을 생각하면 이해는 된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은 너에게 도움이 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렸다고 했었지?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두는 것이 좋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었으리라.
필 니크로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건 이미 너에게 말했단다.
“제가 세계 최고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요? 뭐, 그거야 조금 사기적인 경험 전수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3년 만에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이렇게 뛰고 있는 걸 보면 맞는 말 같기는 한데. 그래도 조금 이상하단 말이죠. 세계 사람이 70억 명이나 되는데. 그중에는 아직 팔이 쌩쌩한 어린 애들도 많고 말이죠.”
-세계 최고의 재능이 아니라 세계 최고가 될 가능성이다.
“그 말이 그 말······. 아!!”
-그래.
세계 최고의 재능.
세계 최고의 가능성.
고작 그것뿐이었지만 성민은 필 니크로가 말하는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말장난 같지만, 이 둘은 명백하게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저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아이가 성민보다 더 훌륭한 재능을 지녔을 수 있다. 혹은 어쩌면 오늘 성민과 겨루는 디아고 헤밍턴의 너클볼 재능이 성민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과 성민 가운데 누가 더 가능성이 큰지를 따지면 그건 성민이다. 전자는 환경이 후자는 필요성이 부족하다.
“그렇군요. 아직 미숙한 시기에는 KBO라는 무대에서. 게다가 단순히 마이너에서 실력을 기른다는 개념이 아니라 우승이라는 간절한 이유로 최선을 다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고작 1년 만에 FA를 얻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팔꿈치가 나가서 전성기의 실력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고 그래서 유일한 희망인 너클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
“뭔가 조금 찝찝했는데 이제 다 설명이 되네요.”
그동안 궁금했던 이유를 알았기 때문일까?
성민의 얼굴이 한층 상쾌해졌다.
그리하여 월드 시리즈 5차전.
세계 최고의 가능성이 세계 최고의 결과물이 되어 사람들 앞에 섰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LA 다저스. LA 다저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시리즈 5차전 경기!! 과연 보스턴 레드삭스가 자신들의 홈에서 이번 시리즈를 끝내고 30년 만의 커미셔너 트로피를 품에 안을지. 아니면 LA 다저스가 자신의 홈으로 승부를 유예할지!! 오늘의 선발 투수 김성민 선수가 마운드 위에 섰습니다!!]
< 그 너머의 공 하나(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